'기동전사 건담'과 '장송의 프리렌' 스틸 대중문화 속 ‘영웅’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과거의 영웅은 절대적인 힘을 쥐고 악을 물리치는 신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고도로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초인은 더 이상 우리의 팍팍한 현실에 온전한 공감을 주지 못한다.
애니메이션 역사를 살펴보면 4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서로 맞닿아 있는 두 명의 영웅이 있다. 1979년 일본 애니메이션의 판도를 바꾼 ‘기동전사 건담’의 주인공 아무로 레이와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 신드롬을 일으킨 ‘장송의 프리렌’의 용사 힘멜이다. ‘SF 메카물’과 ‘정통 판타지’라는 장르적 형태는 다르지만, 두 작품은 우리에게 동일하고도 무게있는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영웅이란 과연 무엇인가.
‘기동전사 건담’은 절대선과 절대악이 싸우는 기존 슈퍼 로봇물의 공식을 완전히 파괴했다. 주인공 아무로 레이는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이 아니라,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로봇에 탑승한 내향적인 소년이었다. 어른들의 이기심이 만든 전쟁에 예고 없이 내던져진 그는, 병기의 압도적인 힘에 짓눌리고 살인에 대한 죄책감에 구토한다. 전장에서 각성한 ‘뉴타입’이라는 능력은 더욱 비극적이다. 타인과 깊이 교감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 능력은, 적의 슬픔과 고독마저 여과 없이 흡수하게 만들었다. 내가 완벽히 이해한 상대를 내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모순. 1970년대 후반, 유례없는 고도성장의 이면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소모되며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청년들은 폭력의 시대 속에서도 타인과 교감하려 고뇌했던 이 연약한 소년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2020년대. ‘장송의 프리렌’이 그리는 세계는 거창한 스펙터클 대신 잔잔한 여운으로 가득하다. 극 중 마왕을 물리친 위대한 용사 힘멜은, 놀랍게도 세상을 구원할 자만이 뽑을 수 있다는 ‘용사의 검’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가짜 용사’였다. 힘멜의 진짜 무기는 화려한 검술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길을 잃거나 두려움에 떨 때 언제나 뒤돌아보며 안심시키는 다정한 소통과, 곤경에 처한 이웃을 지나치지 않는 작은 선의였다.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라는 극중 프리렌의 대사가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귀찮거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싶을 때, 스스로 제동을 거는 하나의 따뜻한 윤리적 나침반이 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는 마왕도, 우주 전쟁도 없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작은 수고를 감수하는 마음, 평범하지만 다정한 소통과 선의가 모일 때 우리는 서로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40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건담의 소년과 프리렌의 용사가 우리에게 남긴, 시대를 초월한 진짜 영웅의 가치다.
노종언 변호사 (법무법인 존재) 노종언 변호사 ▶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컬처인컬처’(Culture in Culture)는 문화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문화를 성찰해 그 연결 고리를 소개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