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57)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 같다. 꽤 많은 플롯이 있고, 코미디와 드라마가 적절히 버무려져있다.
그가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건 극장 간판을 그리면서부터다. 세종대 회화과를 중퇴하고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다. 1986년부터 서울극장 합동영화사의 선전부장으로 광고를 기획하다 영화사를 설립했고, 각종 해외 영화들을 수입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영화 연출에 도전했다. 하지만 데뷔작 '키드캅'은 참패했고, 당시 무명의 신인 감독이었던 이준익은 지인들에게 "연출을 하지 않겠노라"며 선언했다. 영화 기획과 제작에만 몰두하던 중 다시 그가 메가폰을 다시 잡은 건 딱 10년 만이었다. 배우 캐스팅까지 다 정해진 '황산벌'을 찍기로 한 감독이 이중계약을 한 게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얼떨결에' 다시 연출을 맡았다. 결과는 성공적. 이후 '왕의 남자'로 초대박을 치며 스타감독 반열에 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 편의 인생 역전 감동 드라마를 썼지만,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 한 마디에 두 번째 은퇴를 하며 인생 장르는 코미디로 바뀐다. "'평양성'이 흥행하지 않으면 은퇴하겠다"고 농담 섞어 던진 폭탄 발언에 발목이 잡혀 9시 뉴스까지 나왔다. 이후 또 다시 은퇴 번복. 그런 이준익이 '소원(2013)'부터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사도'와 '동주'까지 연속 세 작품을 흥행시키며 '왕의 남자' 이후 백상예술대상에서 10년 만에 두 번째 대상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맛 봐서일까. 제5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대상을 받고 2주 만인 15일 비오는 날 저녁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식당에서 만난 이준익에게선 좀처럼 들뜬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수다스럽고 인간미 넘치는 모습일 뿐.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 낯뜨거워하고, 자신을 '디스'하는 것엔 관대하게 낄낄 웃는 것도 여전했다. 솔직하고 참 묘한 매력이 있는 감독이다. "골짜기가 깊은 산일수록 봉우리가 높은 법이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든 순간은 한 때죠. 다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산전수전을 겪어보니 이제 좀 알겠더라고요."
※인터뷰②에서 이어집니다
-연출과 제작, 기획 외에 특별 출연도 계속하고 있어요. "요청이 들어오니까 거절할 수 없어서 하는 거에요. 근데 난 찍고 나서 내가 나오는 걸 절대 안 봐요. 볼 수가 없어요. '타짜2'도 그렇고 '대배우'도 아직 안 봤어요. 아 근데 지금도 '부당거래' 연관검색어에 '이준익 발연기'가 있어요. 그거 때문에 '대배우' 특별 출연 때 정말 많이 신경 써서 연기했어요."
-영화감독이 되고 난 이후에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나요. "'즐거운 인생'·'구르믈 버서난 달처럼'·'평양성' 등 이렇게 3개가 쭉 망해서 피해가 만만치 않았어요. 3편이 연속으로 망하니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소원'·'사도'·'동주'가 다 잘 됐지만 앞에 셋은 바닥이었어요."
-캐스팅이 아쉬웠던 작품은 없나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영화가 망한 건 감독인 내가 못 만들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잘 만들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왕의 남자' 당시 이준기도 당시엔 인지도가 없었는데도 잘 됐잖아요. 영화의 성공 실패는 감독의 책임이 1번이에요. 배우 캐스팅을 탓하는 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요."
-'사도' 흥행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배우의 경우 그 영화가 잘 될 수 있도록 대중의 주목을 받게끔 하는 역할을 해요. 유명세 때문이라기보다도 캐릭터와 배우의 하모니가 기가 막히면 배우 덕분에 잘 될 수 있죠. 하지만 배우 때문에 망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잘 안 된 작품들에 출연한 배우들에 미안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출연할 때 기대감이 있었을 텐데 상실감으로 바뀐 것에 대한 미안함이죠.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가지고 갈 것 같아요. 배우는 배우예요. 배우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연기의 책임은 100% 감독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감독의 설명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예요. 영화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졌을 때 '최고였을까, 최악이었을까, 차선이었을까' 그건 감독의 선택이에요. 많은 테이크 중에 감독이 선택해서 영화를 만드는 거잖아요. 배우의 연기 책임은 감독에게 있어요.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테이크를 많이 가지 않아도 좋은 걸 잘 끄집어내는 배우로는 누가 있나요. "송강호와 유아인은 '사도' 때 50% 이상이 원테이크였어요. '동주' 박정민과 강하늘도 마찬가지고요. 박정민과 강하늘도 대부분 원테이크로 찍은 거예요."
-이준익 감독에게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작품이 '평양성'이에요.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나요. "오기의 부작용이에요. 앞에 2개의 영화가 잘 안 되고 나서 '황산벌'의 연작으로 한 번 웃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속 좁은 오기의 결과죠. 그것이 주는 교훈이 너무 커서 '평양성'한테 고마워요. 만약에 '평양성'이라는 삐뚤어진 오기가 없었다만 '소원'이 나올 수 없었을 거에요. 시련을 시련대로 다 겪었기에 '소원'이 있었고 '사도'가 있었고 '동주'가 있을 수 있었죠. 골짜기 3개 이후에 봉우리가 있었던 거예요. 골짜기가 깊을수록 봉우리는 더 높아지죠. 근데 또 다음 영화가 골짜기로 바뀔지도 몰라요. 다음 영화가 망할 확률은 70~80% 정도? 하는 영화마다 다 되는 감독이 어디 있나요. 최동훈 감독 말고는 없어요. 류승완 감독도 안 된 게 있어요. 봉준호, 박찬욱 감독도 안 된 게 있죠. 하는 것마다 잘 되는 건 최동훈 감독 한 명인 것 같아요."
-이준익 감독이 인정하는 감독은 누군가요. "최동훈·봉준호·류승완·박찬욱·나홍진 등 다 인정하는 감독들이에요. 너무 많이 인정하는 게 병이에요. 이들은 굉장히 샤프하고 세련됐어요."
-그림 쪽에 대한 생각은 없나요. "아직은 없어요. 영화가 훨씬 더 재밌어요. 혼자 하는 작업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미술할 때는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난 영화처럼 여럿이 같이하는 게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그걸 나중에 알았어요.
-멜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나요. "없어요. 장르 영화를 안 좋아해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있는데 아마 장르 영화로 규명될 수밖에 없는 작품일 거예요."
-지금이 몇 번째 전성기라고 생각하나요. "인생 전체가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50년대, 60년대 출생한 사람은 시절 좋을 때 태어나서 문화적 혜택을 많이 누리고 새로운 어떤 가능성을 제일 먼저 누렸던 세대에요. 축복받은 세대죠. 그거에 대해 감사해요. 개인이 잘나서 전성기를 맞이하기 전에 시절 자체가 좋았어요. 지금 젊은 친구들의 의욕과 자질을 가지고 내 세대에 살았으면 훨씬 더 성공했을 것 같아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대표작 세 개를 정한다면요. "1위는 '왕의 남자'죠. 천만 영화로 후광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황산벌'과 '라디오스타' 역시 만만치 않아요. 그 세 편의 영화가 잘 됐기 때문에 지금의 '사도'·'동주'·'소원' 이런 것들을 만들 수 있었어요. 기적을 만들어낸 영화라고 생각해요."
-추구하는 이상향은 무엇인가요. "죽음을 향해 가는데 나의 죽음을 선명하게 그리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죽어야 잘 죽을까' 이 고민을 가장 많이 해요. 죽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게 행복해요.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하죠. 상상을 하는데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아요. 아직 죽을 날이 많이 남아서 그런가봐요.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선명해질 것 같아요. 자기 죽을 자리를 선명하게 그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행복의 가치를 많이 느끼고 살 것 같아요."
-묘비명에 넣고 싶은 문구가 있나요. "다 지나간다."
-언제까지 메가폰을 잡을까요. "재밌있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버킷리스트도 많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