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리암 니슨 탄생이다. 배우 박근형(76)이 액션 영화에 과감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술, 담배는 일절 하지 않으며 여전히 몸 관리에 철저하다. 모두가 "할 수 있겠냐" 우려했지만 결국 해냈다.이 작품으로 42년 만에 제20회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기 못하는 후배들을 '똥배우'라 거침없이 지적할 수 있는 원동력은 부단한 노력과 열정에 있다. 누군가를 감동줄 수 있는 연기를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는 박근형은 살아있는 전설이자 영원한 로맨티스트다.
※인터뷰 ①에서 이어집니다.
-리암 니슨이 출연한 '테이큰'과도 비교된다.
"비슷하지만 스토리는 다르다. '그랜드파더' 속 손녀가 납치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웃음) 무엇보다 오락에 치중하기보다는 내면에 치중했다. 오히려 '그랜 토리노'에서 이웃집에 있는 이민자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리암 니슨과의 비교는 환영이다."
-브라운관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라 신선하다.
"TV에서 나이 먹고 한 역할은 '추적자' 속 회장 같은 인물이다. 두뇌 놀음을 하는 역할이다. 늙은 여우같은? 소통이 안 되고 단절된 옹고집스러운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다. '그랜드파더'는 대사가 많지 않아 좋기도 했다. 배우의 계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감정적으로 힘든 캐릭터의 중심을 어떻게 잡고 나갔나.
"난 연극배우 출신이기 때문에 희곡에 대한 분석력이 강하다. 우리가 허구로 꾸며놓은 이야기 가운데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떻게 가야만 하는지 계산한다. 캐릭터가 겪는 모든 과정을 단위별로 세세하게 쪼갰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연기했다. 감당할 수 없을 땐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게 내가 연기하는 방식이다."
-연극배우로도 정말 오래 활동 하셨다.
"고등학교 연극 경연대회에 나가면서 처음 연극계에 발을 들였다. 그 때 바람이 들어서 연기를 내 진로로 잡았다. 그러니까 시작은 1958년부터다. 한국배우전문학원이라고 충무로에 있는 유명한 배우 양성소에서 연기를 했다. 당시 연기 전문대학이 2년제 밖에 없어서, 종합대학은 나중에 생긴다고 하기에 학원에 가서 먼저 공부를 했다."
-연극배우는 가난하다고 하지 않나.
"돈은 없었다. 당시 10명이서 영화 단역알바를 하고 저축을 했다. 그리고 원각사라는 을지로입구에 있던 극장에서 연극 공연을 했다. 돈을 날리면 또 돈을 모아 공연을 했다. 대학교 진학 후에도 연극은 꾸준히 했다. 그래서 난 내가 우리나라 연극사 발전 한 가운데 서있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물론 돈벌이는 안됐다. 굶는 건 예삿일이었다. 버스비도 없이 걸어 다녔다."
-연극계의 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우리 때보다 더 어렵다. 일단 경쟁자가 많아졌다. 하루에 연극 영화를 공부하는 친구들이 2만 명이 넘는다더라. 엄청 걱정스럽다. 사실 내 아들도 그렇고 손자도 그렇고, 다 연극 공부 중이다. 아들은 연극배우고 손자는 올해 대학 연기과에 입학했다. 내가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땐 부모님이 말렸는데 난 그런 얘기는 못한다. 이번에 손자가 장학금을 탔다고 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웃음)"
-할아버지가 박근형이라니. 손자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선생님이겠다.
"손자가 질문을 많이 한다. 아들은 책을 직접 보는 편이고. 공연 등을 끊임없이 보고 다니면서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때 나도 내가 배운 걸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손자는 밖에서 내가 할아버지라는 이야기를 안 하더라. 그래서 나도 '끝까지 네 힘으로 해라'라고 했다. 내 손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당연히 비교가 될테고 말이 많이 나오지 않겠냐. 3대가 연기를 하는 것은 참 좋다. 그리고 이 길로 성공한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대물림 하듯 일가족이 그렇게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의 삶을 택할 것 같은가.
"지나온 과정을 생각하면 배우 일은 하기 싫다. 너무 괴롭고 힘들다. 다른 이에게 인정받고 동조를 얻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두 다 마찬가지다. 지금의 연극학도들이 오염된 곳에서 연극을 하며 어려운 생활을 하는 걸 보면 안타까워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