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졌다.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주객전도. 이쯤되면 특별출연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하다.
'배우' 이병헌의 아우라는 확실히 남다르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마땅하다.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빛날 존재감이다.
그런 그가 말도 한다. 배우의 발성이, 배우의 목소리가 얼마나 장면을 압도하는지 이병헌은 짧은 순간 다시 한 번 입증시켰다. 그리고 특별출연이기 때문에 더욱 돋보일 수 있다는 것도 이병헌이 '밀정'을 통해 친절하게 알려준다.
김지운 감독과는 '달콤한 인생', '놈놈놈', '악마를 보았다'까지 무려 세 작품을, 송강호와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놈놈놈'을 함께 한 이병헌은 '밀정' 속 의열단장 정채산 역의 특별출연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정채산은 3.1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주요 거점 파괴와 암살을 위해 의열단을 결성한 의열단장으로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주시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많은 작전을 이뤄내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적에게 들킨 적이 없으며 단원들에게조차 자신의 이동경로를 밝히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격을 자랑,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 놓을 정도로 굳은 신념을 지녔다.
실제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모티브로 따낸 캐릭터로, '암살'에서는 조승우가 역시 특별출연해 호평 받았다.
이병헌은 정채산이라는 인물의 굳은 기개와 강인한 내면을 완벽하게 흡수해냈다. 첫 등장은 '관상' 속 이정재(수양대군)의 등장신과 맞먹을 만 하다. 물론 속도감은 다르지만 임팩트는 그 못지 않은 것.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눈빛과 표정으로만 제 마음을 보여주던 이병헌이 입을 떼는 순간, 영화관 곳곳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탄성이 흘러 나온다. 극의 흐름을 단번에 바꾸고 주변의 공기를 모두 제 쪽으로 이끄는 능력은 사실상 이병헌이기에 가능하다.
여기에 유머코드까지 담당하며 다시 보고 싶은 명장면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송강호와 이병헌, 공유의 삼자대면 음주신은 놓친다면 분명 후회할 '밀정'의 한 수다.
특별출연이기에 '보는 맛' 정도를 살릴 줄 알았던 이병헌은 어느 때보다 무게감 있는 정극 연기를 선보였고, 일부분에서는 주연 배우들까지 잡아먹으며 제 것을 따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이병헌은 특별출연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이병헌은 이번 출연에 대해 "김지운 감독님, 송강호 선배님과는 '놈놈놈'이 끝나고 8년 만에 촬영 현장에서 만나게 된 것 같다. 두 사람과 오랜만에 함께 하면서 무척 설레는 작업이었다. 옛 추억도 떠오르면서 스스로에게도 뜻 깊은 촬영이 된 것 같다"며 "'밀정'이라는 작품에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