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악역이라는 설명으론 부족하다. 시청자를 소름 끼치게 만드는 사이코들이 매력적 안타고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이유 없는 살인은 물론 사회적 얼굴과 진짜 얼굴이 다르다. 그 변화가 너무나 극과 극이라 드라마 속 연기임에도 보는 이를 밤잠 못 이루게 만든다. 덕분에 주인공보다 사랑받는 악역들이 여럿 등장했다. 이미 종영한 OCN '보이스'의 김재욱과 SBS '피고인'의 엄기준을 비롯해 현재 방송 중인 KBS 2TV 월화극 '완벽한 아내'의 조여정 등이 '인생 연기'라는 호평과 함께 사랑받았다.
장르물의 증가
요즘 악역들은 대부분 살인마다. 단순히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을 떠나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악당들의 숫자가 증가하게 된 것은 TV 장르물 유행과 깊은 관계가 있다. OCN을 중심으로 장르 드라마의 편 수가 증가했고 보다 대중화됐다. 연쇄 살인마 캐릭터는 장르물의 한 축을 담당한다. 게다가 연쇄 살인마를 그리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설정이 바로 사이코패스다. 드라마 속 많은 사이코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배우 입장에서도 사이코패스 역할은 '꼭 한 번쯤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로 꼽힌다. 감정을 극한으로 몰고 가 표출시키는 장면이 많아 연기력을 보여 주기도 용이하다. 많은 악역들에 '인생 연기'라는 극찬이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 많은 드라마가 살인마를 메인 악역으로 삼고 배우들도 선호하니, 드라마 속 사이코 전성기가 열릴 수밖에 없다.
사이코는 곧 우리
이 사이코들은 이른바 '내 아버지의 원수' 방식의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OCN 주말극 '터널'에 등장하는 연쇄 살인마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기도 한다. '보이스'의 김재욱은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을 갖고 놀다 목숨을 빼앗는다. '피고인'의 엄기준은 이무런 죄책감 없이 자신의 친형마저 죽인다. 이들의 악행엔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극 중 엄기준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학대받으며 자란 아동 학대 피해자였다. 김재욱은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데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아버지의 살인을 목격하며 진정한 사이코패스가 됐다. '완벽한 아내' 조여정의 경우 어린 시절 따돌림을 겪었고, 이후 남편의 외도로 자존감이 붕괴된 인물이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정신이상자가 됐다.
이는 의외로 시청자의 공감을 사는 지점이다. 오히려 구구절절 사연을 간직한 악행이었다면 이토록 큰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현대인은 누구나 크고 작은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어린 시절 따돌림의 트라우마를 가진 사이코들은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