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에는 그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는 거대하고 높은 성이 하나 있다. 우리가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그 성은 바로 탁구 최강 국가 '중국'이다.
중국은 그동안 말 그대로 세계 탁구계를 지배해 왔다. 올림픽은 물론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안게임, 각종 오픈 대회 메달을 싹쓸이하고 세계 랭킹도 휩쓸었다. 강해도 너무 강한 나머지 자국 내 경쟁이 가장 어려운 탓에 수많은 중국 선수들이 탁구를 위해 다른 나라로 귀화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최근 열린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도 탁구 출전 선수 172명 가운데 44명이 중국 출신이었으니 그 위상을 능히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최근 이 견고한 '만리장성'에 도전장을 내미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일본이다. 눈부시게 약진하는 10대 신예들을 앞세워 중국을 위협하고 있는 일본은 2020 도쿄올림픽에 초점을 맞추고 '만리장성 넘기'에 도전한다.
◇ 세계선수권에서 보인 일본의 약진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보여 준 일본 탁구의 돌풍은 예사롭지 않다.
일본은 5일(한국시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끝난 2017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대단한 약진을 보였다. 금메달 1개·은메달 1개·동메달 3개로 2000년대 이후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혼합복식에서 요시무라 마하루-이시카와 가스미가 금메달을 땄고, 남자 복식에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1개를 챙겼다. 여자 복식에서는 이토 미마-하야타 히나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17세 여자 기대주 히라노 미우도 단식에서 동메달을 따내 일본인으론 1969년 세계선수권 이후 48년 만에 이 부문 메달을 땄다.
2003년생으로 올해 14세인 하리모토 토모카즈는 메달을 목에 걸진 못했으나 세계선수권 사상 최연소로 8강에 진출해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일본의 성과에 고무된 산케이스포츠는 "메달 6개를 딴 1975년 캘커타 대회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이라고 보도했다.
그동안 중국의 그늘에 가려 좀처럼 성적을 내지 못하던 일본이 이렇게 급격한 도약을 이뤄 낸 데는 엄청난 투자가 뒷받침됐다. 일본탁구협회의 한 해 예산은 100억∼150억원가량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가운데 20억원의 금액이 유소년 양성에 사용된다. 주니어 선수들을 성인 대표팀과 동행하게 해 직접 보고 현장 분위기를 경험하게 하는 등 일찍부터 ‘세계화’를 목표로 선수들을 키우고 있다. 생활체육으로 탁구를 즐기는 인구도 많을뿐더러 일본 용품 업체들도 앞장서서 유망주에게 연간 10억원 정도를 후원하고 있다.
선수만 후원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일본 용품 업체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국제탁구연맹(ITTF) 주관 대회가 탁구공 등 일본산 용품을 사용하게끔 하고 있다. 미디어도 의욕적이다. 도쿄TV는 이번 세계선수권을 위해 ITTF에 20억 이상의 중계권료를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뒤셀도르프를 찾은 일본인 취재진만 200여 명에 달한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부터 세계선수권대회까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일본 탁구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 2020 도쿄에서 만리장성 넘겠다
일본의 목표는 역시 2020 도쿄올림픽이다.
도쿄올림픽 이후 56년 만에 다시 안방에서 열리는 이번 2020 도쿄올림픽에서 일본은 종합 3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본격적인 엘리트 체육 육성에 나선 일본은 체육 정책을 주도하는 장관급 부처인 스포츠청을 신설하고 예산도 대폭 늘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직접 나서 "도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일본인 공통의 목표"라고 공언할 정도로 의욕적이다.
축구, 야구 등 인기 구기 종목은 일찌감치 2020 도쿄올림픽 준비에 돌입했다. 아마추어 종목도 마찬가지다. 특히 탁구는 다가오는 2020 도쿄올림픽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노리는 종목이다. 일본은 탁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88 서울올림픽부터 2008 베이징올림픽까지 20년간 노메달에 그쳤다. 2012 런던올림픽 은메달,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며 꿈틀거리더니 이젠 세계 최강 중국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 탁구는 2020 도쿄올림픽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일본 스포츠닛폰도 "국책이 결과를 맺고 있다"며 이번 대회 성과를 중요하게 언급했다. 마에하라 마사히로 일본탁구협회 부회장은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도 억 단위로 늘어나고 있다"며 투자를 통한 육성 정책이 결실을 맺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본의 '밀레니엄 세대'로 불리는 2000년대생 3인방 이토-히라노-하야타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모두 메달을 따내 2020 도쿄올림픽 전망을 밝혔다는 평가다.
이번 대회에서 최연소 8강 진출을 이뤄 낸 하리모토 역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표는 다가오는 2020 도쿄올림픽이다. 하리모토는 독일탁구연맹(DTTB)과 인터뷰에서 "2020 도쿄올림픽에서 최고의 결과를 남기기 위해 지금부터 더욱 집중적으로 훈련할 생각"이라며 각오를 드러냈다. 안방인 도쿄에서 '타도 만리장성'에 성공하겠다는 각오다.
투자는 일본에 비하면 적지만 한국 탁구도 분발하고 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남자 단체전에서 보여 준 정영식의 투혼에 이어 정상은, 이상수 등이 연달아 중국 선수를 꺾는 등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커녕 일본과 비교해도 저변이 넓지 못하고 투자도 적은 상황에서 한국 탁구가 더 발전할 길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안재형 여자 대표팀 감독도 "예산 규모보다는 그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하다”며 “일본을 거울삼아 정부와 탁구협회, 탁구인, 언론 등 모두가 한국 탁구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