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와 아마추어 팀이 함께 참가해 단판으로 승부를 가리는 토너먼트 방식의 FA컵은 '다윗의 승리'를 바라는 팬들의 기대가 성사될 수 있는 특별한 무대다.
"FA컵의 권위가 떨어졌다" "재미가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지만 프로와 아마추어가 한데 모여 싸우는 기회 자체가 워낙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대회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일단 FA컵이 아니면 '다윗의 승리'처럼 축구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짜릿한 '반전'을 맛볼 수 있는 무대가 없다.
승리 팀에 주어지는 부상이 아시아 정상을 가리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이라는 점도 그렇다. 현실적인 문제들은 차치하고서라도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라는 부상은 아마추어 팀에 주어지는 최고의 도전이다.
실제로 FA컵에서는 하위리그 클럽이 상위리그 클럽을 잡는 '반란'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칼레의 기적'이다.
'칼레의 기적'은 인구 약 8만 명인 프랑스의 북부 항만도시 칼레를 연고로 한 4부 리그 팀 라싱 위니옹 FC 칼레가 2000년 프랑스 FA컵 대회에서 상위리그 팀들을 연파하며 결승전까지 오른 일을 일컫는다. 당시 FC 칼레는 슈퍼마켓 주인과 정원사, 항만 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순수 아마추어 팀이었다. 선수 구성원만 보면 조기 축구회나 다름없는 아마추어 팀이 프로 팀을 연파하고 FA컵 준우승을 차지한 셈이다. 말 그대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칼레의 기적'은 전 세계적인 관용구가 됐다. 축구에서 벌어지는 '언더도그의 반란'을 묘사할 때마다 '칼레'의 이름이 회자됐다. 그리고 2017년, 한국에서 또 다른 팀이 '칼레의 기적'에 도전한다. 이들의 도전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앞으로 한국에선 '칼레의 기적'보다 이들의 이름이 더 많이 불릴지도 모르겠다. 그 주인공은 내셔널리그의 '목포시청'이다. K리그 챌린지(2부리그) 성남 FC를 꺾고 4강에 진출한 유일한 비K리그 클럽이다.
목포시청은 지난 9일 오후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17 KEB하나은행 FA컵 8강 성남과 경기에서 전반에만 3골을 터뜨리며 3-0 완승을 거두고 준결승에 올랐다. 대회 최고의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경기 전부터 많은 이들은 성남의 우세를 점쳤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2부리그인 챌린지로 내려와 있지만 성남은 1부리그 7회 우승, FA컵 2회 우승에 빛나는 '명가 중의 명가'였다. 그런 성남을 완파한 목포시청의 놀라운 승전보는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에게 칼레의 기적을 떠올리게 했다.
이날 승리로 목포시청은 2009년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FA컵 4강에 진출하는 기쁨을 안았다. 또한 2008년 대회 4강에 올랐던 고양KB국민은행 이후 한참 동안 끊겼던 내셔널리그 팀의 도전을 이어 가게 됐다. 내셔널리그 소속팀이 FA컵 4강 이상의 성적을 기록한 건 울산현대미포조선(2005년 준우승), 인천한국철도(2005년), 고양KB국민은행(2006·2008년) 3개 팀뿐이다.
이변을 연출해 낸 김정혁(49) 목포시청 감독 역시 4강 진출에서 '기적’을 끝낼 생각은 없다. "선수와 코치진의 강한 믿음이 만들어 낸 값진 결과"라며 이날의 승리를 곱씹은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부담을 줄까 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사실 (우승에) 엄청나게 욕심이 난다. 준결승을 넘어 끝까지 도전해 보겠다"고 다부진 각오를 전했다. 역대 아마추어 팀 최고 성적인 2005년 울산현대미포조선의 준우승을 넘어 최초로 우승컵을 들어 올리겠다는 원대한 포부다.
김 감독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다. 김 감독은 전남 드래곤즈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1997년 천안 일화를 꺾고 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경험이 있다. 당시 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쳐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 감독은 10년 뒤인 2007년 친정팀 전남에서 코치로 또 한 번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내셔널리그 목포시청을 이끌고 FA컵 우승에 도전한다. 10년 주기 3번의 우승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승 수는 단 2승이다.
김 감독도 이 신기한 '10년 주기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성남전이 끝난 뒤 "1997년, 2007년 FA컵 우승을 했기 때문에 2017년도 기대가 됐다"며 공교롭게도 그동안 '7'이 들어가는 해에 FA컵에서 우승했는데 10년이 지난 2017년 목포시청에서 새로운 역사를 쓴다면 신기하고 기쁠 것 같다"고 미소를 보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4강을 먼저 넘어야 한다. 김 감독은 "수원 삼성이나 울산 현대, 부산 아이파크 모두 쉽지 않은 팀이지만 한 경기에 집중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목포시청이 FA컵 4강에 진출하면서 지난 9년 동안 멈춰 있던 ’기적의 시곗바늘’을 한 칸 앞으로 움직였다. 과연 목포시청이 한국판 ’칼레의 기적’을 쓸 수 있을까. 그 답은 오는 10월 25일로 예정된 FA컵 4강에서 나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