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훈(38·KIA)은 감사하다. 야구장에서 보고, 듣고, 겪는 모든 게 말이다. 시련을 딛고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2017년의 끝은 처참했다. 2차 드래프트가 열린 11월 22일, 정성훈은 9시즌 동안 뛴 LG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다. 115경기에서 타율 0.312·6홈런·30타점·32득점을 기록했다. 녹슬지 않은 기량을 증명했다. 하지만 리빌딩 기조를 강화한 LG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두 달 동안 무적으로 보냈다. 2018년 스토브리그는 유독 베테랑에게 가혹했다. 20번째 시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KIA가 손을 내밀었다. 입단과 데뷔를 한 친정팀이다. 정성훈은 현역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고, KIA는 오른손 대타를 얻었다. 스프링캠프를 소화했고 바로 팀에 녹아들었다. 김기태 KIA 감독도 "훈련에서도 허슬플레이를 하더라.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존재다"며 반겼다.
소속팀을 잃었던 순간을 돌아본 그는 "마무리가 너무 좋지 않아서 허탈했다"고 했다. "현대에서 뛴 6시즌(0.288)보다 LG에서 뛴 9시즌(0.303) 타율이 더 좋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리기도. 보탬이 될 수 있는 기량이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엿보였다.
지금은 털어냈다.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웃어보인 뒤 "예전에는 막연하게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다른 길에 놓였다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니 모든 게 새롭고 간절하다"며 속내를 전했다. 경기장 한 바퀴를 더 돌고, 배트 한 번을 더 돌린다.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며.
즐거움도 생겼다. 정성훈은 "KIA 타자들의 훈련과 경기를 지켜보면 놀랄 때가 많다. 좋은 결과를 내는 기술이 정말 뛰어나다. 기량이 올라온 선수들도 훈련할 때 집중력이 좋다"고 말했다. 이어 "연차가 20년이 넘다 보니 어릴 때보다는 관점이 다양해졌다. 이 점을 감안해도 KIA 타자들은 정말 뛰어나다"며 감탄했다. 안치홍, 김선빈 등 9~10년 후배들에게도 배운다. 박용택(LG)과 나누던 '타격 토론'은 이제 이범호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타격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맡은 임무도 문제 없이 소화할 전망이다. 정성훈은 대타 요원이다. 데뷔 시즌(1999년)부터 주전으로 나선 그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경험이 자산이 됐다. 정성훈은 "지난해 백업으로 뛰면서 느낀 게 많다. 벤치를 지키다가 단 한 번 주어진 기회에 결과를 내야한다.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나도 몰랐고, 새삼 대타 요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그 과정에서 적응력을 키웠고 '이제는 주전이 아니다'는 자괴감을 달래기도 했다. 동료들의 타격은 더 집중해서 지켜볼 수 있다. "언젠가 지도자를 하게 되면 백업 선수들에게 심리적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목표는 "임무를 잘 해내서 팀 승리에 기여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정성훈의 가치가 온전히 인정 받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 개막전에서 대기록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통산 최다 경기 출장 기록이다. 지난해까지 2135경기를 뛰었다. 양준혁(전 삼성)의 종전 기록과 타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 꾸준한 기량 유지가 동반돼야 해낼 수 있는 기록이다.
정성훈은 담담하다. "그저 현역으로 오래 뛰었기 때문이다. 크게 조명받을 기록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한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달성한 기록이라면 더 멋있었겠다. 난 자의든 타이든 몇 차례 팀을 옮기지 않았나"라며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은 빼놓지 않았다. "프로 데뷔전을 한 팀 소속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된 건 의미가 있다. (박)용택이 형은 물론 젊은 선수들이 깨지 않을까. 나는 그저 다시 그라운드에 선 것과 기회를 준 KIA에 감사할 뿐이다"고 했다. 정성훈의 2018년은 그렇게 감사와 설렘으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