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펜싱 남자 사브르 대표팀의 간판 구본길(29·국민체육진흥공단)에게 세계 최강이 된 비결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최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그는 "한국 펜싱이 좋은 성적을 거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외국 선수들보다 풋워크가 좋은 '발펜싱'이 비결이었다면, 지금은 당시 경험을 가진 선배들과 기량이 출중한 후배들의 호흡이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구본길·김정환(35·국민체육진흥공단) 김준호(25·국군체육부대) 오상욱(22·대전대)으로 구성된 사브르 대표팀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검술을 자랑한다. 이들은 지난 시즌인 2016~2017시즌부터 팀 부문 세계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다. 작년에 열린 홍콩 아시아선수권과 독일 라이프치히 세계선수권을 동시 석권했다. 한국 사브르가 단체전서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올 시즌에도 네 차례 월드컵에 출전해 세 차례나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했다.
환상의 팀워크가 완성되기까진 시행착오가 있었다. 사브르 대표팀은 런던올림픽 단체전에서 '깜짝 금메달'을 땄다. 한국은 이 대회에 출전한 8개국 중 최약체로 분류됐지만, 구본길-김정환-원우영(36·은퇴)·오은석(35·은퇴)이 상대보다 한 발 더 뛰는 발펜싱으로 일군 기적이었다. 김정환도 당시를 떠올리며 "사실 참가에 의의를 뒀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며 웃었다.
중앙일보=프리랜서 김성태1 그러나 이후 슬럼프가 찾아왔다. 세계 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김정환은 "원우영과 오은석이 은퇴한 뒤 공백기를 거쳤다. 1~2년간 단체전에서 메달을 구경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남자 사브르가 다시 살아난 것은 김준호와 오상욱이 가세한 뒤부터다.
10년간 대표팀에서 동고동락한 구본길과 김정환은 한참 어린 후배 선수들과 조화가 최대 과제라고 판단했다. 맏형 김정환과 막내 오상욱은 13살 차다. 두 형님은 후배들의 빠른 적응을 위해 체면을 버렸다. 훈련 후 지갑을 열고 후배들과 자주 식사를 하며 소통했다. 눈높이를 낮춰 후배들의 취미를 함께 했다. 김정환은 "후배들이 게임을 좋아한다. 쉴 때는 다같이 모여서 게임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제자 같은 선수들과 어울리다 보니 나이를 들었다는 걸 깜빡한다. 동창회에 나갈 때나 나이를 깨닫는다"며 웃었다. 구본길은 "김정환과는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며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면서 "후배들과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선배들의 노력에 힘입은 오상욱은 한국 펜싱의 차세대 스타로 성장했다. 구본길은 "단체전 마지막 주자는 막내 오상욱이다. 보통 마지막에 나서는 선수가 팀의 에이스"라고 말했다. 키 192cm의 압도적인 신체조건을 갖춘 그는 지난해 12월 월드컵(멕시코 칸쿤)과 그랑프리(헝가리 죄르) 개인전을 연달아 우승했다. 대한펜싱협회 '올해의 선수'로도 뽑혔다. 오상욱도 "고교 코치님이 정환이 형의 후배다. 그런데 정환이 형은 그냥 형 같다"면서 "세대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만큼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시려고 노력하신다"고 했다. 김정환은 "상욱이는 유럽 선수들조차 압도하는 월등한 피지컬을 가진 데다 스피드까지 갖췄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아직 경기 운영에선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 상욱이를 월드클래스로 만드는 게 은퇴 전 목표"라고 말했다.
현재 구본길이 세계 1위고, 오상욱이 6위, 김정환이 10위다. 세 선수는 이번 시즌 여섯 차례 대회(월드컵 4회·그랑프리 2회)에서 금3·은1·동1을 합작했다. 지난 1일 끝난 서울 그랑프리대회에선 김정환이 은메달을 땄다.
이들의 다음 목표는 오는 8월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 사브르 남자 단체전 금메달이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압도적 차이로 우승했다. 구본길은 "단체전에서 최근 이란(5위)이 상승세지만, 실력은 아직 우리가 위"라며 "분위기 싸움에서 말리지만 않으면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