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나선 HDC현대산업개발(이하 현산)이 ‘원점 재검토’라는 카드를 꺼내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호기롭게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베팅했다. 하지만 내외부의 악재로 인해 아시아나항공 인수 협상에 백기를 드는 게 아니냐는 관측에 무게가 쏠리고 있다. ‘육해공 모빌리티’ 기업을 발판으로 재계 10위에 진입한다는 계산을 세웠던 정 회장의 꿈도 덩달아 희미해지고 있다.
현산은 9일 '아시아나항공 인수 조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공문을 아시아나항공 채권단에 전달했다. 지난해 11월 베팅했던 2조5000억원 인수금액으로는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산은 “인수 의지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10일 '재검토 요청'과 관련해 "효율성 제고 등의 차원에서 이해관계자 간 논의가 진전될 수 있도록 현산에서 먼저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해 달라"는 공식 입장을 냈다. 이어 "서면을 통해서만 논의를 진행하자는 의견은 자칫 진정성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며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촉구했다.
현산은 '계약 체결 이후 아시아나항공 부채가 무려 4조5000억원이 증가하고, 부채비율이 지난해 6월 말 대비 1만6126%나 급증하는 등 재무상태가 악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9년과 비교해 2020년 1분기 아시아나항공의 부채 비율은 1386.7%에서 6279.8%로 급증했다. 금융감독원의 자료와 현산이 주장하는 부채 비율이 다른 셈이다. 이와 관련해 현산은 “외부에서 평가를 받은 결과 아시아나항공 재무제표의 신뢰성에 의문부호가 생긴다”라고 했다.
업계 관계자는 ‘원점 재검토’ 입장과 관련해 “부채로 4조5000억원이 추가되었다고 적시한 점은 인수 가격을 낮추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겠지만, 인수 포기에 가까운 입장이라는 데 무게가 더 실린다”고 말했다.
현산의 주장대로라면 부채 증가 규모가 인수 입찰금액(2조5000억원)보다 많다.
다른 관계자는 “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부정적으로 돌아섰다는 게 읽힌다. 채권단이 현대산업개발과 아시아나항공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는 지난 4월부터 커졌다. 입찰 당시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던 범 현대가 모임에서도 회의적인 의견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컨소시엄을 이룬 미래에셋대우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그룹 내부에서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아시아나항공의 자본 잠식 우려가 커지면서 무리한 인수는 경영에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이런 내외부의 부정적 의견으로 인해 상황이 변하자 정 회장도 백기를 드는 게 아니냐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애초 현산은 2조원의 신주 발행으로 부채 비율을 300%까지 낮춰 아시아나항공의 경영 정상화를 도모한다는 계획이었다.
또 현산은 아시아나항공의 사전 동의 없는 추가자금 차입 승인과 부실 계열사 지원 등을 지적하며 현 경영진에 대한 의문부호를 던지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아시아나항공에서는 ‘인수가 재협상은 불가’로 맞서고 있다.
현산은 앞으로 구주 인수가격 조정(3228억원), 5000억원 영구채 출자전환, 차입금 상환 만기 연장 등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아시아나항공이 '헐값 매각 불가'를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협상 테이블을 차려야 하는 채권단으로서는 양측의 합의점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채권단은 현산의 인수 무산 시 아시아나항공을 ‘통매각’이 아닌 분리 매각한다는 대비책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