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팀의 면모는 위기 속에서 빛난다. 에이스 박혜진의 부상 공백 속에서도 1위를 사수하고 있는 아산 우리은행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은 개막 전부터 앓는 소리를 하지만 항상 좋은 결과를 낸다고 해서 '양치기 소년', '엄살 장인'으로 불린다. 올 시즌도 마찬가지다. 개막 미디어데이에서 위성우 감독은 높이의 열세를 꼽으며 3위를 예상한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위성우 감독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은행은 개막 후 열흘 넘게 지난 KB국민은행 Liiv M 2020~21시즌 여자프로농구(WKBL)에서 순위표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이 순위표가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은행이 또 한 번 위기를 극복하고 강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증거다. 위성우 감독의 앓는 소리를 마냥 엄살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개막전부터 박혜진이 전력에서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족저근막염 증세로 지난 10일 청주 KB스타즈와 개막전에서 불과 1쿼터 시작 4분45초 만에 벤치로 물러난 박혜진은 그 후로 계속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11월 휴식기 전까지 복귀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위성우 감독의 설명이다.
지난 시즌 MVP이자 팀의 중심인 박혜진이 코트에 없다는 건 우리은행에 치명적인 일이다. 외국인 선수 없이 치르는 올 시즌은 국내 선수들의 활약이 더욱 중요해졌는데, 최은실도 부상으로 빠진 상태에서 리그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박혜진마저 이렇게 되자 위성우 감독의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개막전에서 우승 라이벌 KB를 잡아낸 것도 모자라 1위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최악의 위기 속에서 기회를 만든 강팀의 저력이다.
위기 극복의 원동력은 '잇몸'들이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다는 말처럼, 지금까지 기회를 얻지 못했던 선수들이 연일 활약하며 우리은행을 지탱하고 있다. 베테랑 김정은이 중심을 잡고 버텨주는 가운데 김소니아가 공수 양면에서 그야말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올 시즌 4경기에서 평균 37분4초를 뛰며 평균 20.5득점(2위) 리바운드 11개(3위)를 기록 중이다. 공헌도에서도 160.20점으로 2위 박지수(KB·157.90점)을 앞섰다.
21일 삼성생명전 79-64 승리를 이끈 김진희(16득점 7어시스트 3스틸)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시즌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던 설움을 털어내듯 박혜진의 공백을 메우며 위성우 감독의 칭찬을 받았다. '기대주' 박지현 역시 성장세가 도드라진다. "박혜진이 없는 상황이 박지현에게 기회"라는 위성우 감독의 말처럼, 그는 올 시즌 4경기서 평균 17.5득점, 10.5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지난 2시즌에 비해 크게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팀의 중심이자, 건강한 상태였다면 결코 전력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선수가 부상으로 빠진 위기 상황. 그러나 위성우 감독은 불가피하게 맞닥뜨린 위기 상황을 역이용해 선수들의 성장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잇몸까지 더 단단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