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프로배구 간판 스타였던 '슈퍼 쌍둥이' 이재영·이다영(25·흥국생명)이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학폭)'을 저질렀다는 폭로가 있고 난 뒤였다. 다수의 피해자가 21가지로 상술한 학폭 내용은 참혹했다.
10여년 전, 그러니까 이재영·이다영이 미성년 시절의 일이다. 그때도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들이 가한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거나 이해받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쌍둥이의 폭력은 둘만의 힘으로 가해질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 주위에는 부모가 있었고, 교사가 있었다. 지도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프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침묵했다. 폭력을 조장했거나 최소한 방관했다. 그런데도 학폭이 있었다는 걸 하나같이 몰랐다고 했고, 그걸 사과했다. 가까이에서 벌어진 폭력을 인지하지 못한 걸 자책(하는 척)했다.
쌍둥이의 중학교 시절 배구부 감독은 17일 한 방송사와 인터뷰에서 "운동 끝나고 나선, 기숙사가 2층이니까. 거기서 일어난 건 저는 잘 모르죠. 여자 아이들이다 보니까 제가 거길 올라갈 수도 없고…"라고 말했다.
기시감이 든다. 쌍둥이의 아버지 이주형 익산시청 육상팀 감독은 하루 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전혀 몰랐던 일이 갑자기 터지니 '멘붕'이 왔다. 쌍둥이가 중학교 때 선생님(코치)이 배구부의 숙소를 총괄했다. 그 선생님이 워낙 강인한 분이라 그걸(학교 폭력) 감췄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고 말했다. 이주형 감독은 "선수 생활을 해본 내가 (학폭을 알았다면 쌍둥이를) 가만 안 놔뒀을 것이다. 운동 잘한다고 까불면 안 된다.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사과했다.
지난 10일 인터넷 커뮤니티에 폭로 글이 올라온 뒤 이재영·이다영은 즉각 사과문을 올렸다. 배구 팬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느끼는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무작위로 올라오는 '추가 폭로' 탓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최숙현이 지도자와 동료들의 폭언·폭행·가혹행위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지난해 6월이었다. 가해 시점은 쌍둥이의 학폭이 먼저이지만, 사건 후 벌어지는 일들은 거의 똑같다. 고(故) 최숙현과 학폭 피해자들은 가까운 어른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가해자를 두려워했다.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들어준 건 여론이었다. 다시 말하면, 여론이 들끓지 않으면 폭력 피해자가 하소연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최숙현은 죽음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알렸다. 그가 숨진 뒤 가해자들은 한동안 억울하다고 맞섰다. 전 국민이 주목하고 사실관계가 밝혀진 뒤에야 끔찍한 가해 사실이 드러났다.
학폭의 피해는 가해자가 '슈퍼 쌍둥이'였기에 주목받을 수 있었다. 이재영·이다영은 육상선수 출신 아버지와 배구선수 출신 어머니(김경희씨)로부터 운동 능력을 물려받았다. 특히 김경희 씨는 1988 서울올림픽 배구 세터 출신으로 배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뛰어난 재능'과 '든든한 배경'을 가진 자매가 또래에게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우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력이 권력이 되고, 권력이 실력을 더 강화했으며, 결국 폭력으로 번졌다. '슈퍼 쌍둥이' 학폭은 이 시대의 폭력성을 잔인하게 드러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공정·인권 감수성을 건드렸다.
보통의 경우, 평범한 상대라면 피해 사실을 폭로하기도 어렵다. 어른들의 무심과 방관 때문이다. 지금도 여럿이 이런 일을 겪고 있을 것이다. 2010년 11월 흥국생명에 입단했던 김유리(현 GS칼텍스)는 선배의 심한 괴롭힘에 스무 살에 은퇴했다. 이후 4년 뒤 다른 팀에 입단해 지금까지 뛰고 있다.
학교가 아닌 프로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학폭 폭로 후 흥국생명은 "두 선수의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라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은 "과도한 관심 때문에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이재영·이다영 외에) 남은 선수들이 더는 다른 요인으로 방해받지 않았으면 한다"고 읍소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경기력과 우승이 중요했다. 소속팀 선수로 인해 세상이 뒤집어졌는데, 어른들은 코트만 바라보고 있다. 죄송하지만, 몰랐단다.
어른을 믿기 어렵다. 결국 시스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19일) 시행되는 일명 '최숙현법(국민체육진흥법 2차 개정안)'은 ▶체육인에게 인권침해·비리 즉시 신고 의무 부과, 신고자·피해자 보호 조치 강화 ▶직권조사 권한 명시, 조사 방해·거부 시 징계 요구 등 스포츠윤리센터 조사권 강화 ▶가해자에 대한 제재 및 체육계 복귀 제한 강화 ▶상시적 인권침해 감시 확대 및 체육지도자 등에 대한 인권교육 강화 ▶체육계 표준계약서 도입 및 실업팀 근로감독·운영관리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체육계 폭력은 관련법이 없어 벌어진 게 아니다. 지금도 스포츠윤리센터라는 신고기관이 있지만, 피해자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호소했다. 과거에도 다른 이름의 기관과 법이 있었다. 다만 어른들의 의지가 부족했던 거다. 문재인 대통령은 "학교부터 국가대표 과정 전반까지 폭력이 근절되도록 각별하게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취임 첫 행보로 17일 스포츠윤리센터를 찾아 이진숙 이사장 등을 격려했다. 황희 장관은 "스포츠윤리센터가 (폭력 예방에) 선제적 역할을 해달라"고 말했다.
법과 제도 등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권력자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통령도 여러 번 당부한 일이 관련 법을 강화하고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시민이 준 힘을 제대로, 제때 사용하지 못한다면 권력자들도 쌍둥이 뒤에 숨는 어른과 다를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