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 SK텔레콤 대표가 하반기 산업계 최대 이슈 중 하나인 국회 국정감사까지 뒤로 하고 급히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탈통신을 이끌 핵심 먹거리인 반도체를 지키기 위해서다.
6일 업계에 따르면 박정호 대표는 10일간의 일정으로 지난주에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공급 부족을 이유로 각종 기밀을 요구하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서다. SK텔레콤은 현지 미팅 계획 등 세부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바이든 정부, 삼성·SK에 반도체 핵심 자료 요구 백악관과 상무부는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올해 3번째 반도체 대책회의를 열었다. 반도체 부족 현상이 전 세계 산업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최근 반도체가 수요를 맞추지 못해 자동차와 노트북,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품의 생산이 중단되는 등 판매가 위축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2021년 글로벌 연간 스마트폰 출하량 성장 전망을 당초 제시했던 9%에서 6%로 하향 조정했다.
그러면서 "몇몇 스마트폰 업체와 공급사는 2분기부터 주문의 80%만을 공급받는 등 부품 수급에 차질을 빚었으며, 3분기에는 더욱 악화한 것으로 보인다"며 "스마트폰 업체의 90%가 문제를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반기 출하량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고 내다봤다.
문제는 미 정부가 기업 압박 수위를 높인 것이다.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 현지 기업들의 피해가 확산하고 있어 더욱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상무부는 생산자·소비자·중개자 등 공급망 모든 부분의 재고와 수요, 배송 체계에 대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유하도록 요청했다"며 "목표는 병목 현상이 발생하는 위치를 이해하고 수량화하는 것이다"고 했다.
러몬도 상무장관은 45일 안에 RFI(자료요청서)에 회신할 것을 요구했다. 사재기와 같은 시장 교란 행위도 살펴볼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 기업 가운데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SK스퀘어 출범 앞두고 악재…직접 해결 의지
이에 박정호 대표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통신사와 투자사로 회사를 쪼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악재를 만났다.
SK텔레콤은 오는 12일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인적분할 계획을 확정한다. 이어 11월 1일 존속회사인 SK텔레콤과 신설회사 SK스퀘어로 공식 출범한다. SK스퀘어의 지휘봉은 박정호 대표가 잡는다.
SK스퀘어는 '글로벌 ICT 투자전문기업'을 목표로 한다. 반도체·ICT 영역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해 2025년까지 순자산가치(NAV)를 현재의 3배인 75조원 규모로 끌어올린다는 포부를 밝혔다.
SK스퀘어는 반도체를 비롯해 앱마켓(원스토어)·커머스(11번가)·융합 보안(ADT캡스)·모빌리티(티맵모빌리티) 등 신사업을 품는다. 그중에서도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SK하이닉스의 역할이 막중하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통계에서 SK하이닉스의 올해 2분기 D램 시장점유율은 27.9%로 삼성전자(43.6%)에 이어 2위다. 낸드플래시 점유율은 12.3%로 삼성전자(34.0%), 키옥시아(18.3%), 웨스턴디지털(14.7%)에 이어 4위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 작업이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데, 마지막 관문인 중국의 기업결합 심사만 통과하면 6.7% 점유율을 추가 확보해 단숨에 2위에 오를 전망이다.
이처럼 앞길이 밝았던 반도체 사업이 예상치 못한 벽을 마주하자 박 대표가 직접 현지 상황을 점검하고 상황에 따라 아웃리치(대외접촉)에 나설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에서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만나 반도체 영업기밀 유출 우려를 전달했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는 정부의 도움을 받아 자료 제출 거부 입장을 전할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에 반가운 소식이지만 향후 미국 정부가 경영 활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어 선택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길준 기자 jeong.kiljh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