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두케' 올란도 에르난데스는 한 시대를 풍미한 오른손 투수다. 1998년 서른세 살의 늦은 나이로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데뷔해 2007년까지 통산 90승을 기록했다. 뉴욕 양키스의 황금기를 이끌며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4개나 챙겼다. 투구 시 왼 무릎을 어깨높이까지 올리는 하이 키킹 동작으로 타격 타이밍을 빼앗았다. 투구 밸런스 때문에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시그니처였다. 그뿐만 아니라 주자 상황에 따라 팔 각도와 구속, 구종까지 달리했다. 몬트리올 엑스포스 포수 크리스 위저는 "에르난데스는 예측할 수 없는 투수"라고 했다.
KT 위즈 외국인 투수 오드리사머 데스파이네(34)는 '수원의 엘 두케'다. 에르난데스와 같은 쿠바 출신으로 투구 시 왼 무릎이 어깨높이까지 올라가는 것도 닮았다. 에르난데스만큼은 아니어도 KBO리그 보기 드문 하이 키킹 투구폼을 사용한다. 한 타자는 "원 투에 타격해야 하는데 원 투 쓰리까지 되는 느낌"이라며 "타격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경기 중 오버핸드로 던지다가 갑자기 스리쿼터로 바꿔 타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변칙 투구'도 에르난데스와 판박이다.
MLB 시절부터 위력을 인정받았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배터리 호흡을 맞춘 포수 데릭 노리스는 데스파이네에 대해 "앵글을 잡기 힘든 선수"라고 말했다. 그만큼 공이 어느 각도에서 날아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까다로운 하이 키킹 투구폼에 투구 각을 달리해 기술적으로 타자가 느끼는 체감 구종을 다양하게 만든다. 대런 발슬리 전 샌디에이고 투수 코치는 "데스파이네는 정말 독특하다"며 타자를 상대하는 12가지 방법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데스파이네는 "모든 구종을 던질 수 있다"고 자신한다. 야구통계전문업체 스포츠투아이에 따르면 데스파이네는 올 시즌 평균구속 시속 147㎞ 포심 패스트볼(직구·27.7%)에 투심 패스트볼(23.1%) 컷 패스트볼(11.4%) 커브(22%) 체인지업(15.8%)을 섞었다. 특정 구종에 편식하지 않는다.
이충무 KT 스카우트 팀장은 "다양한 변화구와 이닝 소화 능력을 갖췄다. 미국에 있을 때는 언제든지 나가서 던질 수 있는 이른바 '고무팔'에 가까운 선수였다. 여기에 구속까지 갖췄다"고 말했다. 이강철 KT 감독은 "데스파이네는 1선발의 자질을 90% 이상 갖췄다. 게임을 운영할 줄 안다. 타자를 쉽게 상대한다"고 했다.
2020년 KT와 계약한 데스파이네는 어깨가 무거웠다. 11승을 기록하고 팀을 떠난 라울 알칸타라(현 한신 타이거즈)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2년 연속 리그 최다 이닝 투수가 되며 연평균 14승(15승→13승)을 책임졌다. 특히 지난해에는 무려 207과 3분의 2이닝을 소화하기도 했다. 불펜 소모를 줄여주며 확실한 '1승 카드'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에이스의 입지가 좁아졌다. 또 다른 외국인 투수 윌리엄 쿠에바스의 워낙 페이스가 좋기 때문이다. 정규시즌 1위를 결정하는 단판 승부(타이 브레이커)는 물론이고 지난 14일 두산 베어스와 한국시리즈(KS·7전 4승제) 1차전 선발 등판도 쿠에바스였다.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가 쿠에바스 쪽에 쏠렸지만 데스파이네는 크기 신경 쓰지 않았다. 17일 열린 KS 3차전에 선발 등판해 5와 3분의 2이닝 동안 2피안타로 두산 타선을 꽁꽁 묶으며 팀의 시리즈 3연승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