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판하면 지지 않는다. 이름 뒤에 불패(不敗)가 붙었던 선수, ‘대성불패’ 구대성(53)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불펜 투수 부문에 선정됐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오승환(32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총 19표를 얻었다.
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은 "언제든지 믿고 투입할 수 있는 투수"라고 했다. 이대진 SSG 랜더스 투수코치는 "불펜 투수는 10번 중 7~8번은 성공해야 한다. 구대성은 그에 가장 가까운 투수"라고 했다. NC 이용찬은 "구대성 선배님은 던지는게 참 시원시원했다"고 했다. KT 위즈 소형준은 "오승환 선배님 다음으로 임팩트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전했다.
구대성은 고교 시절부터 담대한 배짱으로 주목 받았다. 대전고 2학년 시절이던 1987년 연습 경기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선발로 올라왔던 그는 1회 초부터 3연속 볼넷으로 무사 만루를 허용했다. 이병기 당시 대전고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오자 그는 “절 테스트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결론은 3연속 탈삼진 무실점. 배짱 테스트는 성공이었다. 그해 대전고는 청룡기에서 창단 첫 전국대회 우승을 거뒀다.
한양대 진학 후 그는 1990년 국제야구연맹(IBA) 대회 최우수선수(MVP), 1991년 대륙간 컵대회 최고 투수상, 1992년 대통령배 최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구대성에게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는 계약금 1억 2000만원을 선사했다.
프로 시작부터 ‘불패’는 아니었다. 고교-대학 때 너무 많이 던져 어깨에 탈이 났다. 시속 140㎞대 후반을 기록했던 구속이 130㎞대까지 떨어졌다. 2년 차 때부터 꽃을 피웠다. 마무리를 맡으며 34경기(선발 9경기)에 등판해 7승 8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60으로 활약했다. 이듬해에도 47경기(선발 12경기) 4승 1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54를 기록했다. 완투도 6번이나 기록했지만, 승운이 따르지 않아 다패왕에 올랐다. 긴 이닝을 던지고 선발까지 겸하는 이른바 ‘중무리’였지만 묵묵히 맡은 바를 해냈다. 동시대를 뛰었던 조원우 SSG 코치는 "선발과 마무리를 전부 잘했다. 전성기 구위가 최고였다"고 전했다.
1996년, 드디어 불패의 수호신이 됐다. 55경기에 등판해 55경기 139이닝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88 탈삼진 183개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다승 공동 1위, 세이브 2위, 승률 1위, 탈삼진 3위를 기록했고, 규정 이닝을 채워 평균자책점 1위까지 독차지했다. 당시 수상 기준이던 세이브 포인트(구원승+세이브) 40개로 구원왕까지 오르며 4관왕에 올랐다. 정규시즌 MVP와 투수 골든글러브도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대성불패라는 별명도 탄생했다.
구대성을 불패의 투수로 만든 건 투구폼, 그리고 배짱이었다. 그는 타자에게 등을 보인 채 와인드업하는 토네이도 폼으로 타자와 주자를 위협했다. 등뒤에서 빠르게 공을 뿌려 구종을 숨기는 디셉션(Deception)의 달인이었다. 무엇보다 강한 멘털이 구대성의 최고 결정구였다. 강속구가 사라진 후에도 자신있게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었다.
김종국 KIA 타이거즈 감독은 "구대성 선배처럼 배짱 있는 투구를 하는 투수를 본 적 없다"고 했고, KT 위즈 박경수는 "구대성 선배님의 릴리스 포인트가 보이지 않았다. 우타자 몸쪽과 바깥쪽 제구도 자유자재로 하셨다. 너무 까다로웠다"고 떠올렸다.
구대성의 공은 큰 무대로 갈수록 빛났다. 한화의 첫 우승을 이끈 것도 구대성이었다. 1999년 한국시리즈 5경기에 모두 등판해 1승 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0.93으로 뒷문을 걸어 잠그고 시리즈 MVP가 됐다.
김인식 전 감독은 "리그뿐 아니라 국제대회에서 활약이 돋보였다"고 했다. 국제대회에서는 역사상 최강의 일본 킬러로 통했다. 대학 시절 1989년 대륙간 컵에서 후일 메이저리그(MLB) 123승에 빛나는 노모 히데오와 맞대결에서 18탈삼진 완투하며 명투수전을 펼쳤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3·4위전에서 마무리가 아닌 선발로 등판, 155구를 던지며 9이닝 5피안타 1실점 완투승으로 동메달을 한국에 안겼다.
KBO리그를 평정한 구대성은 2001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스와 계약했다. 첫해 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7승 9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4.06을 기록했다. 이어 2년 차 5승 7패 평균자책점 2.52로 퍼시픽리그 평균자책점 2위로 활약했다. 2004년까지 오릭스에서 뛴 그는 2005년 도전의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MLB 뉴욕 메츠와 계약해 33경기 23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3.91 6홀드를 기록했다.
투수가 아닌 타자로 이야기를 남겼다. 5월 22일 뉴욕 양키스전 타석에 들어서 당대 최고 투수 랜디 존슨의 직구를 통타해 2루타를 쳤다. 공격적인 주루로 결승득점까지 기록했지만, 주루 때 어깨를 다쳤다. 결국 그해 9월 지명할당(DFA) 처리되어 미국 생활을 마무리했다.
2006년 귀국한 구대성은 한화의 수호신으로 복귀했다. 평균자책점 1.82 37세이브(리그 2위)를 거두며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이끌었다. 이어 2007년에도 26세이브를 기록했다. KBO리그 역대 최초로 7년 연속 20세이브, 최연소·최소 경기 200세이브를 남겼다.
그러나 영원히 불패는 아니었다. 2008년 마무리에서 물러나며 이후 커리어에서 단 1세이브에 그쳤다. 2010년 한화 유니폼을 벗었지만, 그의 야구가 끝난 건 아니었다. 그해 11월 호주 프로야구(ABL) 시드니 블루삭스와 계약했다. ABL 통산 6시즌을 뛰고 평균자책점 2.13, 구원왕 3번을 받고서야 24시즌, 4개국에 걸쳐 이어갔던 수호신의 역사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