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대표팀 '리더' 곽윤기(33)는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일어날 일들을 마치 예언가처럼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가 개막 직전 "바람만 스쳐도 실격당할 수 있다"며 우려한 개최국 중국의 편파 판정은 개막 이틀 만에 현실이 됐다. 한국도 7일 남자 1000m 준결승전에서 황대헌과 이준서가 모두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실격당했다.
곽윤기가 확신한 미래가 한 가지 더 있다. 올림픽 개막을 열흘 앞두고 일간스포츠와 만난 자리에서 쇼트트랙 대표팀이 만들 반전을 장담한 것이다. 곽윤기는 "우리 조상님들 모습까지 올라가 보자. 한국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힘이 그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어수선한) 대표팀을 향해 '안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뭔가 해낼 것 같다. 동생들에게도 내가 믿는 바를 말해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 대표팀은 간판선수였던 심석희의 '동료 험담' 파문, 국가대표 선발전 3위 김지유의 부상 이탈 등의 악재가 겹친 상태였다. 전력도 분위기도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에이스 최민정의 컨디션도 4년 전 평창 올림픽 때보다 떨어져 보였다. 남자 대표팀을 향한 기대는 항상 여자 대표팀보다 낮았다.
베이징에서 성화가 타오르자, 곽윤기의 예언이 척척 맞기 시작했다. 한국 쇼트트랙은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를 따내며 이번 대회 출전국 중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했다. 이 종목 '최강국' 자존심을 지켰다. '타도 한국'을 외친 중국은 메달 4개(금2·은1·동1)를 땄지만, 편파 판정 논란이 불거진 후에는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K-쇼트트랙'의 부흥을 이끈 리더는 곽윤기다. 개막 전 그는 최민정과 김아랑을 붙잡고 "너희가 흔들리면 대표팀은 완전히 무너진다. 중심을 잡아달라"라고 당부했다. 김지유가 이탈로 인해 갑자기 개인전에 출전하게 된 김아랑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최민정에겐 "에이스인 네가 더 강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다그쳤다.
개막 후에는 판정 논란을 자초한 중국을 향해 쓴소리를 남기며 한국 선수단의 '스피커'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후배들을 살뜰히 챙겼다. 자신에게 몰리는 취재진에게 "후배들을 더 챙겨달라"고 요청했다. 곽윤기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은 스포츠팬과 대표팀을 잇는 소통 창구가 됐다. 16만 명이었던 구독자는 어느새 100만 명으로 폭증했다.
대회 초반, 메달이 나오지 않을 때 곽윤기는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전하려 노력했다. 9일 여자 대표팀이 계주 결승전에 진출했고, 이어 1000m 결승전에 나선 황대헌이 금메달을 따며 대회 터닝 포인트를 만들었다. 최민정은 황대헌이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 내 중계 화면을 통해 확인했다. 그는 "정말 잘했네요. 좋은 기운 이어갈게요"라며 배시시 웃었다.
곽윤기가 리더십으로 'K-쇼트트랙'의 각본을 짰다면, 최민정(24)은 반전 드라마를 완성한 주인공이었다.
심석희 험담의 대상이었던 그는 지난해 10월 출전한 월드컵 1차 대회에서 부상까지 당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베이징 올림픽 첫 경기였던 혼성계주에서 부진했다. 이어 개인전 500m에서는 넘어져서 탈락했다.
하지만 이겨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력이 좋아졌다. 주특기 바깥 코스 공략을 앞세워 개인전 1000m에서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저평가를 받던 여자 대표팀의 계주 은메달 획득도 이끌었다. 쇼트트랙 마지막 경기였던 1500m 결승에서는 마침내 금메달까지 획득하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최민정의 주행·전략·멘털은 완벽에 가까웠다. 16일 1500m 결승전이 끝나고 만난 최민정은 "(베이징) 대회 초반 경기가 잘 안 풀렸을 때, 최대한 침착하게 (눈앞에 닥친 상황을) 풀어가려고 노력했다. 조금씩 나아졌다. 메달 획득도 중요하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한계를 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최민정은 베이징 대회를 앞두고 "'쇼트트랙은 역시 한국"이라는 말을 듣게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할 것"이라고 출사표를 전했다. 온갖 악재 속에서도 그 약속을 지켜냈다. 최민정은 "모든 선수가 정말 많이 노력했다. 같은 대표선수로서 감사하다. 그 덕분에 '쇼트트랙은 한국'이라는 말을 지킬 수 있게 됐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