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키다리스튜디오 제공 누아르라고 하지만 회칼을 휘두르며 죽이고 싸우기 바쁜 잔혹한 핏빛 활극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뜨거운 피’에서 칼과 총은 그저 단역에 불과하다. 그보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에 가깝다. 독한 술 한 잔, 담배 한 모금이 생각나는 1980년대 홍콩영화를 보는 것 같은, ‘뜨거운 피’는 아주 깊고 진득한 감성 누아르다.
영화 ‘뜨거운 피’는 1993년 부산 변두리의 작은 포구인 가상의 도시 구암을 배경으로 구암의 주인 손 영감(김갑수) 아래서 그의 수족으로 일해온 박희수(정우)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에는 희수 외에 용병 용강(최무성), 영도파 철진(지승현), 희수의 첫사랑 인숙(윤지혜), 인숙의 아들 아미(이홍내)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의 구심점이 희수다. 사진=키다리스튜디오 제공사진=키다리스튜디오 제공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선택된 삶에서 오는 고독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에 떠밀리듯 했던 선택들이 점차 앞으로의 선택지를 줄여나가는 아이러니. 불안한 예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길밖엔 없어 그 길로 걸어가야 하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깊은 고독을 ‘뜨거운 피’는 잘 포착하고 있다. 대사보다는 눈빛으로, 정우는 박희수란 인물의 복잡한 감정선을 시종일관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40줄에 들어선 희수의 바람은 그저 좋아하는 여자 인숙 모자와 빚 없이 먹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희수의 바람만큼 녹록지 않다. 남자아이들은 커서 건달이 되고 여자아이들은 커서 술집에 나가는 구암이라는 기묘한 동네에서 박희수에게 건달 외의 다른 선택지는 그다지 없었을 터다. 하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 도착한 40대에 희수를 기다리는 건 수천만 원의 빚과 불확실한 미래, 불안한 관계뿐이다. 사진=키다리스튜디오 제공 누구는 희수 더러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왕이 돼야 할 사람’이라 하고, 누군가는 ‘싸움은 망설이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고 한다. 지지 않기 위해 망설임을 접어놓고 걷는 길엔 피가 쌓인다. 희수는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향해 나아간다.
‘뜨거운 피’는 소설가로도 유명한 천명관 감독의 데뷔작이다. 소설가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문학적인 감각이 영화에 잘 묻어나 있다. 러닝타임이 끝나면 마치 한권의 책을 읽은 것 같은 여운이 남는다.
껍데기는 부산을 배경으로 한 건달들의 이야기지만 ‘뜨거운 피’는 실은 삶의 불안함에 대한 영화다. 관객들은 아마 영화를 보며 열심히 살아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 순간, 자신도 모르게 떠밀려 가다 운명이란 것을 직감했던 순간들을 호출할 것이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이룰 수 없고, 절친한 친구에게도 칼을 들이밀어야 하는 차가운 세상에서 뜨거운 피를 흘려봤던 이들이라면 공감할 구석이 많다. 120분.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