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 클럽이 속한 프리미어리그(EPL)는 잉글랜드 축구리그 시스템의 최상위 단계다. 하위 리그인 2부(챔피언십), 3부(리그 1), 4부(리그 2)에는 각각 24개 팀이 속해 있다. 즉 1~4부리그에 속한 팀이 총 92개이고, 이들은 전업(full-time) 프로 축구 클럽이다.
92개 팀 중 2021~22시즌을 기준으로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클럽은 13개다. 이 중 아스널, 첼시, 토트넘, 웨스트햄이 런던을 대표하는 팀이다. 아스널, 첼시와 토트넘은 1992~93시즌 출범한 EPL 역사에서 한 번도 강등된 적이 없다. 1993~94시즌 EPL에 합류한 웨스트햄은 두 번의 강등과 승격을 겪으며, 26시즌을 이곳에서 보냈다.
메이저 대회 우승 횟수를 기준으로 4개 팀의 순위를 매겨보자. 아스널은 47회 트로피를 들어 올려 런던팀 중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잉글랜드 클럽 중에서는 세 번째로 우승을 많이 한 팀이 아스널이다. 참고로 잉글랜드에서 우승을 가장 많이 한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66회)이고, 다음이 리버풀(64회)이다.
토트넘은 잉글랜드 클럽으로는 최초로 1960~61시즌 더블(리그와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1962~63시즌에는 영국(UK) 클럽 최초로 유럽대회인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다. 토트넘은 현재까지 2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오랫동안 런던에서 2인자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21세기에 토트넘이 우승한 대회는 2007~08시즌 풋볼 리그 컵이 유일하다.
21세기에 토트넘을 추월한 팀은 첼시다. 구단주이자 러시아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첼시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덕에 런던 클럽으로는 유일하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 첼시가 현재까지 들어 올린 트로피 34개 중에서 무려 21개가 아브라모비치 시절(2003~2022년) 얻은 것이다.
웨스트햄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3부리그로 강등당한 적이 없는 8개 클럽 중 하나다. 웨스트햄은 1965년 유로피언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다.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 당시 주장이었던 보비 무어가 이 클럽 소속이었다. 하지만 1부리그에서 이들이 거둔 최고의 성적은 3위(1985~86시즌)에 불과하고, 클럽이 들어 올린 트로피도 8개밖에 안 된다.
아스널, 첼시, 웨스트햄을 응원하는 팬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토트넘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손흥민의 소속 팀으로 최근 한국을 찾은 토트넘은 어떻게 런던 축구 팬 '공공의 적'이 됐을까?
물론 아스널 팬이 토트넘을 미워한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남런던 울위치에 있던 아스널이 1913년 북런던으로 이사하면서, 이들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는 시작됐다. 두 클럽이 벌이는 '북런던 더비'는 EPL 히트 상품 중 하나로 성장했다.
첼시와 웨스트햄의 팬들이 토트넘을 싫어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비록 최근 성적은 다소 주춤하지만, 역사적으로 아스널은 런던에서 제일 강한 팀이었다. 첼시와 웨스트햄 입장에서 아스널은 따라잡기 힘든 상대였다. 따라서 이 두 클럽은 토트넘을 잡아 런던의 2인자가 되고자 했다. 이에 첼시 팬들은 보통 아스널보다 토트넘을 더 싫어한다. 또한 첼시 근교의 풀럼과 퀸즈파크 레인저스(QPR)는 첼시를 지역 라이벌로 여기지만, 이들에게 관심 없는 첼시 입장에서는 라이벌로 보이는 토트넘이 싫은 것이다.
웨스트햄의 최대 라이벌은 밀월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이 두 클럽이 같은 리그에 속한 적은 네 시즌밖에 없었다. 따라서 웨스트햄의 팬들은 대결할 기회가 제한적인 밀월을 대신해 같은 리그에서 자주 경기하는 토트넘을 제2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다. 특히 토트넘과 연고지가 겹치는 에섹스(Essex)와 북동 런던 지역의 웨스트햄 팬들이 토트넘을 더 미워한다.
118년 동안 토트넘의 홈구장이었던 화이트 하트 레인 근처의 스탬포드 힐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정통 유대교 공동체가 있다. 클럽은 오랫동안 런던 동북부의 유대인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1930년대 토트넘 팬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사실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는 아스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스널을 응원하는 유대인들은 중산층이었던 반면, 토트넘의 지지층은 노동자계급의 유대인들이었다. 전통적으로 축구는 노동자들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토트넘은 유대인의 클럽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된 것이다.
이후 토트넘 팬들은 잉글랜드 내 경기와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반유대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곤 한다. 1960년대 토트넘과 맞붙은 팀의 팬들은 반유대주의 구호인 “Yids”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에 토트넘 팬들은 자신을 "Yid Army(이드 아미·유대인 군대라는 의미)”로 칭했다. “Yid”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고, 모욕과 차별에 맞선 것이다.
한편 첼시와 웨스트햄의 우익(right-wing) 성향을 가진 일부 훌리건들은 토트넘을 너무 미워한 나머지 도를 넘는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때도 있다. 이들은 경기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가스실 소리를 흉내 내기도 한다. 또한 “Adolf Hitler is coming for you(히틀러가 너를 잡으러 올 거야)” “I’d rather be a Paki than a Jew(유대인이 되느니 차라리 파키가 되겠어, Paki는 파키스탄 혹은 남아시아 출신을 비하하는 단어)”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토트넘 팬들을 모욕할 때도 있다.
현재 토트넘 팬 중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5%라고 한다. 즉 팬들의 절대다수는 유대인이 아니다. 아울러 요즘 경기장에서는 상대방 팀 팬들의 ‘Yid’라는 구호도 거의 안 들린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Yid army”를 아직도 외치고 있는 비유대인 토트넘 팬들의 모순적인 행동에 반감을 갖는 이들도 있다.
토트넘의 1부리그 마지막 우승 연도는 1961년이다. FA컵 정상도 1991년 이후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토트넘 팬들은 언제나 그들의 패배나 실망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곤 한다. 그리고 “내년에는 우리가 이길 거야”라는 불굴의 태도를 갖는다. 지역 라이벌 팀 팬 입장에서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토트넘의 이런 정신이 거슬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