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으로는 관람을 끝낼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가 주는 여운이 너무 커서 다시 한 번 그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너무 좋았던 대사나 배우의 연기를 다시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극장에 평균보다 자주 갈 뿐인 영화 기자도 다르지 않다. 봐야 하는 영화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와중에도 ‘내돈내산’, N차 관람을 하게 한 2022년 개봉작들을 소개한다.
#헤어질 결심
언론 시사회에서 보는 순간부터 개봉을 기다렸다. 첫 관람 때는 난데없이 명작을 만나 당혹스러웠으니 마음을 다잡고 처음부터 집중해서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서래(탕웨이 분)의 심경과 사정을 알고 나면 영화가 얼마나 먹먹할까 싶어 개봉일까지 기다리는데 진짜 목이 빠질 뻔했다.
흔히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화려한 시각 효과의 작품들을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이야말로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다. 몰입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한 채 오롯이 영화에 집중해야만 느낄 수 있는 충만한 여운. 제대로 된 스피커를 통해 출력됐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사운드의 묘미까지 ‘헤어질 결심’을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만든다.
#토르: 러브 앤 썬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국내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됐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B급 유머로 무장한 가벼운 작품도 아니고, 토르를 우습게 만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과 인간의 관계를 풀어나가기 위해 아주 진지한 초석을 깔았다는 생각이다. 다만 이것을 너무 무겁게 풀어내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나 ‘미션’처럼 진지해질 가능성이 크니 화려한 액션과 CG, 유머로 포장한 것뿐이다.
다시 볼 기회가 있다면 영화의 맨 처음과 맨 마지막 장면을 붙여 보길 바란다. ‘신은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거룩한 신앙 고백으로까지 보이는 이 작품. 크리스 헴스워스의 탱탱한 뒤태를 볼 수 있는 건 덤이다.
#외계+인
이 영화를 다시 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배우 조우진의 연기다. 사실 처음 ‘외계+인’을 봤을 때는 첫 등장에서 조우진을 알아보지 못 했다. ‘조우진이 나온다고 했는데 언제 나오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다 문득 ‘설마 저 사람인가’ 싶어 눈을 씻고 다시 봤다. 배역에 따라 대사의 톤과 속도마저 완전히 바꿔버리는 배우. 완전히 반해버렸다.
두 번째 관람 때는 오로지 조우진의 등장만을 기다렸다. 이미 한 번 봤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마비된 도사 청운(조우진 분)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지 못 해 “앗 뜨뜨” 하는 장면에서 또 웃음이 터졌다. 오로지 배우 한 명 때문에 영화를 N차 관람한 건 ‘왕의 남자’ 이준기 이후 처음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흔하디 흔한 신파라고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뮤지컬 영화이기까지 하니 관객들의 발걸음을 쉬이 끌어당기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흔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지도 않는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내가 의도해서 시작되지도, 의도해서 끝나지도 않는 삶의 여정을 오세연(염정아 분)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사람을 통해 덤덤하게 그려낸다.
극에는 갈등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초반 세연의 남편인 김진봉(류승룡 분)이 다소 괴팍하게 그려진 점은 아쉽다. 그러나 그마저도 영화를 끝까지 보면 어느 정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세연이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있어서 즐겁게 살다 간다”는 말을 하는 장면은 눈물 버튼이라 두 번 모두 그 장면에서 울었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마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어 언론 시사회 때 보고 또 한 번 보러 갔다. 딱히 N차를 하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론 만족했다. 첫 번째 볼 때는 티찰라(채드윅 보즈먼 분)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스토리에 집중해서 봤다면 두 번째는 티찰라의 동생 슈리(레티티아 라이트 분)의 감정선을 따라갔다.
티찰라라는 영웅을 잃은 마블의 심정이 아마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속 슈리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고 난 이후 리한나의 ‘리프트 미 업’(Lift Me Up)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었다.
#올빼미
영화관에서 4번을 봤다. 7번을 봤던 ‘왕의 남자’ 이후 최다 기록이다. ‘왕의 남자’ 조감독이었다 ‘올빼미’로 장편 상업영화 데뷔를 한 안태진 감독에게 “‘왕의 남자’를 극장에서 7번 봤다”고 했더니 “‘올빼미’도 그 정도 봐준다면 밥을 사겠다”고 했다. 4번이 그 기준에 부합할지 모르겠는데, 양심에 손을 얹고 밥을 얻어먹으려고 그렇게 여러 번 본 것은 아니었다.
영화를 끌고 가는 두 주연인 유해진, 류준열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빛의 명암과 공간 구성에까지 신경 쓴 안태진 감독의 섬세함에도 혀가 내둘러졌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아주 또렷했다. 보통 N차 관람을 할 때는 이미 아는 장면이 많아서 영화가 더 길게 느껴지는 경우가 태반인데, ‘올빼미’는 두 번째 봤을 때가 제일 짧게 느껴졌다. ‘헤어질 결심’이 아니었다면 2022년 최고의 한국영화로 꼽았을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천하고 다녔다.
#영웅
뮤지컬 ‘영웅’을 워낙 좋아했던 터라 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 ‘영웅’에도 당연히 관심이 컸다. 윤제균 감독의 전작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면서 ‘역시 대가는 대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러 요소를 매끄럽게 배합하는 연출력과 스타일리시한 트랜지션에 감탄했다.
뮤지컬에서 제일 좋아했던 넘버인 ‘이것이 첫사랑일까’가 빠져 아쉬웠지만, 대신 김고은이 부른 ‘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에 푹 빠졌다. 김고은이 노래도 이렇게 잘하는 배우였던가.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잘 만든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 두 차례 더 관람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정성화의 유려한 가창력에 푹 빠졌고, 세 번째 봤을 때는 이토 히로부미(김승락 분)의 떠들썩한 출정식 장면 이후 바로 이어진 안중근(정성화 분)의 ‘장부가’ 넘버에 눈물을 흘렸다. 군인들로 가득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출정식과 홀로 그들에게 맞서는 안중근 의사의 고독이 대비돼 마음에 크게 다가왔다. 이후 ‘장부가’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