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체코가 보여준 '낭만' 야구. 압박감에 무너진 한국야구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모습이다.
지난 13일 열린 체코와 호주의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1라운드 4차전. 보기 드문 장면이 나왔다. 1-1 동점이었던 6회 초 2사 1루 상황에서 선수 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오른 파벨 하딤 체코 감독이 앞선 5와 3분의 1이닝을 막았던 투수 마틴 슈나이더에게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것.
경의를 표한 것이다. 슈나이더는 이날 1라운드 제한 투구 수(65개)를 꽉 채웠다. 그는 10일 중국전에서도 49구를 기록했다.
체코는 호주전에서 3실점 이하로 승리하면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딤 감독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선수에게 마운드를 맡겼다. 무엇보다 경기장을 찾은 체코팬, 자국에서 중계를 통해 지켜보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슈나이더는 지난해 9월 독일에서 열린 스페인과의 예선 최종전에서도 선발 투수로 등판, 6과 3분의 1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체코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체코 야구 리그(엑스트라리가)에서 투·타 겸업을 하며 특별한 재능을 보여준 선수다.
감독은 WBC를 치르는 모든 여정에서 동료와 자국민에게 울림을 준 슈나이더의 헌신에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체코 야구 영웅' 슈나이더의 본업은 소방관이다. 체코 선수들 대부분 본업이 있다. 구장 관리인, 협회 홍보팀 직원, 전기 기술자 등. 비록 전업 선수는 아니지만, 체코 선수들의 야구 열정은 다른 국가에 밀리지 않았다. 실력도 마찬가지다. 10일 중국전에선 8-5로 승리하기도 했다.
대회를 즐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일본전에 등판, 메이저리그(MLB)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를 상대한 온드레이 사토리아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며 감격했다. 그는 3회 말 오타니를 상대로 3구 삼진을 잡아내기도 했다. 경기 종료 뒤 소회를 전하며 오타니에게 사인을 받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일본전에서 상대 선발 투수이자 '파이어볼러' 사사키 로키의 공에 무릎을 맞았던 윌리엄 에스칼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속 162㎞ 강속구를 맞고도, 몸을 가누며 1루를 밟아 도쿄돔 내 일본팬들의 박수를 끌어냈다. 사사키는 경기 뒤 에스칼라에게 사과의 뜻으로 과자를 선물했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체코는 일본에 2-10으로 패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보여준 투지와 열정에 일본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오타니도 개인 소셜미디어(SNS)에 'Respect(존경)'라는 문구와 함께 체코 선수들 사진을 게재했다. 하딤 감독은 일본전이 자국 국영 방송을 통해 중계되고, 도쿄돔 만원 관중 앞에서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 일부 선수들은 호주·일본전에서 압박감을 짓눌린 모습을 보여줬다. 제 실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볼넷을 남발한 투수도 있었다. 승부의 세계에서 즐기는 자세가 항상 맞는 건 아니다. 하지만 출전에 의미를 부여하고, 동료의 투지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체코 선수단의 모습은 한국 선수들에 귀감이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