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KFA)가 앞으로 국가대표팀 명단 발표 기자회견을 따로 열지 않기로 했다. 보도자료를 통해 명단만 먼저 공개하고, 선발 배경 등에 대한 설명은 일주일 뒤 소집 첫날 인터뷰로 갈음하겠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재택·외유 논란이 있는 위르겐 클린스만(독일) 감독의 황당한 요구인데, 정작 KFA는 클린스만 감독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
KFA에 따르면 오는 28일 예정된 9월 A매치 평가전(웨일스·사우디아라비아) 국가대표팀 명단은 클린스만 감독의 기자회견 없이 보도자료로 공개될 예정이다. 그동안 대표팀 사령탑들은 대표팀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기자회견에 참석해 선수 선발 배경, 대표팀 운영 계획 등을 직접 설명해 왔다. 클린스만 감독 역시 지난 6월만 하더라도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진행된 대표팀 명단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한 바 있는데, 앞으로는 이 절차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KFA는 9월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평가전이나 월드컵 예선 등 명단 역시 보도자료로 먼저 명단을 공개할 계획이다. 그동안 기자회견을 통해 다뤄졌던 내용들은 명단 발표 일주일 뒤 진행되는 대표팀 소집 훈련 기간 인터뷰로 대체된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등 대회에 나서는 굵직한 명단 정도만 클린스만 감독이 예전처럼 직접 기자회견에 나설 예정이다.
클린스만 감독의 요청을 KFA가 그대로 수용한 결과다. 클린스만 감독은 대표팀 명단이 발표된 뒤에도 명단이 바뀔 수 있으니, 명단 발표 시점이 아닌 소집 이후 인터뷰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예컨대 8월 28일에 대표팀 명단이 발표되더라도 실제 소집은 일주일 뒤인 9월 4일에 이뤄지는데, 이 사이 부상 등을 이유로 명단에 변화가 이뤄질 수 있는 만큼 소집 후 취재진 앞에 서겠다는 의미다.
KFA 관계자는 “명단이 발표되고 선수들이 소집되는 기간 사이에는 소속팀 경기들이 있다. 부상 등을 이유로 선수가 바뀌는 변수가 있는 셈이다. ‘선수에 대한 이야기나 전술 등과 관련된 이야기는 소집이 이뤄진 뒤 훈련장 등에서 하면 된다. 굳이 기자회견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라는 게 클린스만 감독의 설명”이라고 전했다. KFA 측도 명단 발표 기자회견이 10여년 전 홍명보 감독 시절부터 정례화된 일이었을 뿐 규정 등에 명시된 필수 사항이 아닌 만큼 클린스만 감독의 요청을 그대로 수용했다.
문제는 대표팀 명단 발표 기자회견이 갖는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이다. A대표팀은 특히 국민적인 관심이 워낙 크고, 그중에서도 명단 발표는 늘 민감한 이슈다. 그동안 대표팀 사령탑들이 명단을 발표함과 동시에 특정 선수의 발탁 또는 제외 배경, A매치 기간 대표팀 운영 계획 등을 기자회견을 통해 직접 설명한 이유였다. 파울루 벤투(포르투갈) 전 감독은 코로나19로 대면 기자회견이 불가능한 시기에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기자회견은 결국 축구팬 등 대중들과 '소통'하는 자리이기도 한데, 클린스만 감독과 KFA가 한 창구를 닫아버린 셈이다.
더구나 대표팀 명단 발표 기자회견과 소집 첫날 진행되는 인터뷰는 엄연히 주제도, 분위기도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소집 인터뷰는 예정된 훈련·미팅 일정 등으로 인해 시간은 물론 장소 제약도 큰 게 일반적이다. 기자회견만큼 많은 이야기가 오가기도 어렵다. 클린스만 감독이 우려하는 부상 등 변수로 인한 명단 변경은 사례 자체도 드물고, 1~2명 변화가 있더라도 관련 질문은 그동안 자연스레 소집 인터뷰로 연결 돼왔다. 클린스만 감독도, KFA도 모를 리가 없는 내용들인데도 정작 기자회견 삭제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가뜩이나 클린스만 감독의 재택·외유 논란이 거세게 이어지고 있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기자회견 자체를 없앤 건 매우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취임 기자회견 때만 하더라도 국내 거주를 약속했던 클린스만 감독은 부임 후 절반도 안 되는 시간만 국내에 머물렀을 뿐, 대부분 미국·유럽 등 해외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도 미국 자택에 머무르며 ESPN과 유럽축구와 관련된 인터뷰 등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대표팀 명단 발표 시기를 앞두고도 귀국한다는 소식은 없고, 되려 그동안 있었던 기자회견을 안 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논란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 클린스만 감독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조 추첨 행사 등에 참석하기 위해 곧장 유럽으로 향할 예정이다. 가뜩이나 재택·외유 논란에 휩싸인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사령탑이 명단 발표 기자회견은 ‘굳이 필요 없다’며 건너뛰고, UCL 조 추첨식과 유럽파 점검을 위해 유럽으로 향하는 황당한 일이 한국축구에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클린스만 감독에게 쩔쩔매고 있는 KFA다. 재택·외유 논란 등 비판 여론이 거센 상황 속에서도 클린스만 감독이 꿋꿋하게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이뤄진 일부 언론들과 온라인 인터뷰, 이번 대표팀 명단 발표 기자회견 생략 모두 클린스만 감독의 요구를 그대로 KFA가 수용한 결과다. 팬들의 분노는 커져만 가는데, 클린스만 감독의 황당한 처사는 반복되고 있다. 아무런 역할조차 하지 못하는 KFA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