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ROAD TO UFC(RTU)’ 시즌2 준결승전은 중국 종합격투기의 무서운 성장을 확인해준 대회였다. 필자는 현지에서 직접 경기를 취재하면서 그 부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RTU는 아시아 종합격투기 기대주들이 UFC 정식 계약을 따낼 기회를 준다. 지난해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열린 시즌1에서는 플라이급 박현성과 페더급 이정영이 우승해 한국 선수 2명이 UFC 정식 계약에 성공했다.
시즌1에선 네 체급 토너먼트 가운데 한국 2명, 일본 1명, 인도 1명이 정상에 올랐다. 반면 중국 선수는 1명도 우승하지 못했다. 이 가운데 밴텀급 우승자 나카무라 리냐(일본)는 이번 싱가포르 대회에서 UFC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로드 투 UFC 시즌2 라이트급 4강전에서 중국의 롱주(오른쪽)가 한국의 김상욱에게 펀치를 적중시키고 있다. UFC 제공
시즌 2에서는 중국의 강세가 뚜렷하다. 네 체급 토너먼트에 모두 중국 파이터가 결승에 올랐다. 심지어 페더급 토너먼트는 중국 선수끼리 UFC 계약서를 놓고 결승전을 치렀다. 반면 일본 선수들은 플라이급(쓰루야 레이)과 라이트급(하라구치 신)에서 결승전에 올렸다.
한국에선 밴텀급 ‘코리안 하빕’ 이창호(익스트림컴뱃)만이 결승 무대를 밟았다. 뛰어난 그래플링 실력을 갖춘 이창호는 중국의 자우파시에게 2라운드까지 고전하다가 3라운드에 짜릿한 TKO 역전승을 거뒀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한국 선수는 총 8명이다. 플라이급 이정현·최승국, 밴텀급 이창호, 페더급 김상원, 라이트급 홍성찬·김상욱·기원빈·박재현(4강전 대체 합류)이 도전장을 던졌지만, 결승까지 생존한 선수는 이창호가 유일했다.
특히 한국 종합격투기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4강전에서 중국의 높은 벽을 새삼 깨달았다. 한국과 중국 선수 맞대결이 4경기나 이뤄진 가운데 그중 3경기를 중국이 가져갔다. 유일하게 이긴 이창호조차 경기 내용 면에선 2라운드까지 중국 선수에 밀렸다.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중국 종합격투기 발전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국 진출을 노리는 UFC의 적극적인 투자와 중국 당국의 지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UFC는 지난 2019년 중국 상하이에 UFC 퍼포먼스 인스티튜트를 개관했다. 이는 세계 최초 종합격투기 종합 학술 연구 센터다. UFC에서 활약하거나 UFC 진출을 노리는 유망주들에게 다양한 혜택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규모가 약 8600㎡(2600평)에 달한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오리지널 UFC 퍼포먼스 인스티튜트보다 세 배나 크다.
UFC는 “중국뿐만 아니라 여러 아시아 국가 선수가 이곳에서 훈련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건 중국 선수들이다.
실제 이번 토너먼트에 참가한 중국 선수들은 모두 상하이 UFC 퍼포먼스 인스티튜트에서 먹고, 자고, 훈련했다. 심지어 장학금까지 받았다. UFC가 오랜 기간 쌓아온 선수 육성 노하우가 중국 선수들의 잠재력을 만나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현재 중국 선수 최초로 UFC 여성 챔피언에 오른 장웨일리를 비롯해 송야동, 리징량 등 현재 UFC에서 활약 중인 파이터들도 모두 이 시설의 도움을 받고 있다.
UFC 아시아 태평양 지역 지사장인 케빈 장은 필자와 인터뷰에서 “UFC 퍼포먼스 인스티튜트가 중국 선수들에게 도움이 됐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우리는 UFC 아카데미를 통해 선수들을 모집하고, 그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훈련과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시스템에 편입한다. 아시아의 작은 단체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UFC에서 경쟁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UFC는 중국 올림픽 위원회와 파트너십을 맺어 중국 국가대표팀의 자문을 맡고 있다. UFC 퍼포먼스 인스티튜트에서는 다른 종목의 중국 국가대표 선수들도 훈련한다. 스포츠를 국가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중국 정부는 UFC의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선수 육성 시스템이 자국 스포츠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다.
중국 국민들 사이에서도 격투기 인기는 높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관계자에 따르면 과거 중국인들은 전통 무술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반면 미국적인 색채가 강한 종합격투기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하지만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무술 고수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쉬샤오둥 같은 종합격투기 선수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일이 반복된 게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장웨일리가 중국인 최초로 UFC 챔피언에 오르며 국민적인 스타로 떠오르게 된 것도 중국인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최근에는 레슬링, 우슈, 태권도 등 다양한 종목의 엘리트 선수들이 종합격투기에 잇따라 뛰어들고 있다. 이번 RTU 시즌2에서 이창호에게 4강전에서 패했던 자우파시도 2014년 중국 아마 레슬링 전국대회 2위까지 올랐던 엘리트 선수 출신이다. 결승에서 이창호와 맞붙는 샤오룽은 중국 전통 무술인 산타를 오랫동안 수련했다.
이 시점에서 한국 종합격투기를 돌아본다. 한국도 종합격투기 인기가 뜨겁지만, 선수들의 현실은 밝지 않다. 작고 어두컴컴한 체육관에서 묵묵히 땀을 흘린다. 이름이 제법 알려진 선수도 생활을 위해 '투잡'을 뛰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턴건’ 김동현, ‘코리안좀비’ 정찬성 등 UFC 무대를 뜨겁게 달군 슈퍼스타들이 나왔다. 열정만큼은 한국 선수들이 뒤지지 않는다. 선수들과 직접 얘기를 나눠보면 그들이 얼마나 격투기에 진심인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더 안정적으로 훈련하고 생활할 여건이 마련된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