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이었다. 중립 지역인 영국 뉴캐슬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한국은 위르겐 클린스만(독일) 감독 부임 후 6경기 만에 첫 승을 신고했다. 클린스만호 출범 이후 5경기 연속 무승(3무 2패)의 흐름을 끊어낸 승리. 결승골은 조규성(미트윌란)이었다.
당시 상대가 바로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16강 상대이기도 한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이제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4개월여 만에 재대결을 펼치게 됐다. 무대는 오는 31일 오전 1시(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한국이 23위, 사우디아라비아는 56위다. 격차가 33계단이나 난다. 다만 큰 의미를 두긴 어렵다. FIFA 랭킹 87위 요르단과 2-2 무승부, 130위 말레이시아와 3-3으로 비긴 클린스만호라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대회 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우승권 전력’으로 평가받았던 팀이라는 점을 더 주목해야 한다.
물론 한 번 이겨봤던 상대라는 점은 자신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이기긴 이겼으나 경기력에서 압도했다고 보긴 어려웠던 탓이다. 조규성의 골도 상대 수비의 실수에서 비롯된 골이었다. 상대의 골 결정력 부족 덕분에 한숨을 내쉰 장면도 수차례였다. 더구나 당시 평가전과 이번에 만나게 될 사우디아라비아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당시와 큰 차이를 기대하기 어려운 한국과는 다르다. 16강전 최대 변수가 ‘감독’인 이유다.
전술 형태부터 달라졌다. 지난해 9월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포백 전술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번 아시안컵에선 스리백을 기반으로 한 전술을 가동하고 있다. 주축은 크게 변하지 않았어도 일부 선수 구성에 변화가 이뤄졌다. 이번 대회에서 골을 기록한 파이살 알감디(알이티하드)나 1도움을 쌓은 무크타르 알리(알파테흐)는 한국과 평가전에 나서지 않았던 자원들이다. 한국과 평가전 당시 선발 11명 중 3명은 아시안컵에 명단에 빠졌다.
세계적인 명장이자 연봉만 무려 2700만 달러(약 362억원)에 달하는 로베르토 만치니(이탈리아) 감독이 빠르게 팀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지난 한국과 평가전 역시 만치니 감독에겐 부임 후 2번째로 치른 경기였다. 선수 구성도, 전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치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만치니 감독의 전술과 선수 구성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만치니 감독은 이탈리아의 2020 유럽축구연맹(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0) 우승을 비롯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맨체스터 시티) 이탈리아 세리에A(인터밀란·3회) 우승 경력이 있는 명장이다. 클린스만 감독은 “토너먼트 경험이 많다. 어떻게 준비하고 꾸려야 하는지 경험이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그 경험이 만치니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니다.
더욱 우려되는 건 클린스만 감독은 사실상 이미 이른바 패를 다 깠다는 점이다. 지난해 9월 한국은 조규성과 손흥민(토트넘)이 투톱으로 나서는 4-4-2 전형을 가동했다. 황희찬(울버햄프턴)과 이재성(마인츠05)이 양 측면에, 황인범(츠르베나 즈베즈다)과 박용우(알아인)가 중원에 포진했다. 포백 수비는 이기제(수원 삼성)와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정승현, 설영우(이상 울산HD)가 섰다. 골키퍼는 김승규(알샤밥)였다. 당시 부상으로 빠졌던 이강인(파리 생제르맹)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클린스만호의 플랜A이자 이번 대회 베스트11과 다르지 않다.
특히 당시 클린스만 감독은 오직 결과만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평가전에 나섰다. 직전 웨일스와의 원정 평가전과 비교해 단 한 명만 바꾸고 베스트 라인업을 가동했을 정도다. A매치 평가전 2연전에선 최대한 많은 선수를 시험대에 올리는 것과 달리, 당시 클린스만 감독은 웨일스전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전에도 총력전을 펼쳤다.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클린스만호, 이번 16강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은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만치니 감독에겐 반가운 일이다.
수비적인 약점, 전술적인 문제 등은 이미 조별리그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상태다. 한국은 앞선 조별리그 3경기에서 무려 6실점이나 허용했다. 상대와 전력 차를 고려하면 처참한 기록이었다. 여기에 조별리그 내내 전술적으로 중원싸움에서 상대에 밀려 어려운 경기를 치르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그런데도 경기 흐름에 따른 벤치의 대응 등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클린스만 감독의 전술적인 역량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 틈을 만치니 감독이 놓칠 리 없다. 선발 라인업이든, 경기 중 상황에 따른 변화든 집요하게 파고들 가능성이 크다. 만치니 감독의 노림수에 클린스만 감독이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구심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한국이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됐던 이유 중 하나는 ‘역대 최고 전력’으로 평가받는 전력이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대표팀 전원이 자국리그에서 뛰고 있다. 선수들 면면에서 나오는 전력 차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축구 통계 업체 옵타가 조별리그 성적과는 반대로 한국의 8강 진출 확률을 51.3%, 사우디아라비아는 48.7%로 한국의 우세를 전망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반대로 그 격차가 겨우 2.6% 포인트에 그친다는 건 선수들 면면에서 나오는 전력 차가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최근 경기력, 즉 감독들의 전술적인 역량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 결과가 중요한 만큼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이라도 폭발해 승리라도 따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조별리그처럼 ‘졸전’이 반복돼 탈락이라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엄청난 후폭풍은 불가피하다. "클린스만 감독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국의 유력 스포츠매체 디애슬레틱의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