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물이 뚝뚝 흐르는 큰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그를 다시 보게 되고, 다시 듣게 된다. ‘조명가게’ 속 배우 설현이 그 주인공이다. 그간 그에게선 본적 없던 섬뜩하고도 애절한 캐릭터로 ‘아이돌 설현’을 지우고 ‘배우 김설현’을 새로 썼다.
18일 최종화를 공개한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조명가게’는 어두운 골목 끝을 밝히는 유일한 조명가게에 어딘가 수상한 비밀을 가진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강풀 작가의 ‘미스터리 심리 썰렁물’ 시리즈의 5번째에 해당하는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지난 4일 첫 공개된 에피소드 네 편에서 설현이 연기한 지영은 등장부터 궁금증을 일으키는 존재다. 어두운 버스 정류장에 홀로 앉아 파리한 얼굴로 한 남자를 기다린다. 심지어 비에 흠뻑 젖어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나를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 그 차분한 목소리에 남자 현민(엄태구)도, 시청자도 그 존재를 홀린 듯 따라간다.
전형적 도시 괴담 같은 출발과 긴장감이 높아지는 전개 속 지문 대신 손톱이 자리한 지영의 손이 드러나는 장면은 놀라움을 안겼다. 이는 화제성으로 이어져 디즈니 공식 유튜브 채널에 게시된 ‘조명가게’ 클립 영상 중에서도 가장 높은 조회수인 17만 회를 기록했다. “설현이 이토록 무서울 수 있었나”라는 것이 지배적인 감상평이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영상과 달리 웹툰을 볼 때 독자는 칸에 묘사되지 않은 공백을 상상하며 읽는다. 따라서 실사화 작품의 배우들은 사람들이 상상할 만한 것들을 보편적으로 볼 수 있도록 연기해야 한다”며 “‘조명가게’는 그런 캐릭터 해석이 돋보인 작품이다. 특히 설현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설현은 과거 연기력에 대한 지적을 받은 적도 있는데 이번 작품에선 목소리 톤부터 시작해서 일정한 자신의 존재감과, 특이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 냈다”고 평했다.
앞선 회차에서 설현의 이미지 변신이 그려졌다면 지영의 전사가 다뤄지는 5~6회에선 설현의 두터워진 표현력이 돋보인다. 알고 보니 지영과 현민은 현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키우던 연인 관계였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회상 장면 속 밝고 청순한 모습보다도 가장 큰 반전은 지영이 농인이라는 점이다. 설현에게서 처음 듣는 냉랭한 목소리는 사실 극중에선 들릴 리 없는 것이었다. 현민이 탄 버스 사고를 목격하고 119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지만, 언어가 되지 못하는 애끓는 소리만을 내다 뛰쳐나가는 지영의 간절함을 설현은 실감 나게 표현했다.
또 웹툰의 메시지를 풍성히 만든 연출 속 지영은 호러와 휴먼 드라마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 작품의 코어로 기능했다. 현민을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지영을 바느질이라는 행위로 힘차게 표현하는 설현은 잔혹하면서 애틋하다.
실제로 설현은 지영의 캐릭터에 매체적 특성을 고려해 접근했다. 공개 전 제작발표회에서 그는 “웹툰은 이미지라 목소리 톤은 나오지 않아서 저만의 해석으로 연기했다”면서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추려고 했다. 감독님과 따로 만나 연습도 해보며 캐릭터의 톤을 잡아갔다”고 설명했다.
설현은 드라마 ‘내 딸 서영이’(2012)로 데뷔해 올해로 연기한 지 12년 차다. 최근에도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살인자의 쇼핑목록’에 출연했으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등을 통해 관객을 만났다.
하지만 ‘뒤태 설현’으로 한 시대를 사로잡은 아이돌 시절 활약을 뛰어넘을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엄태구와 첫 연인 호흡을 맞췄던 영화 ‘안시성’에선 화려한 액션까지 선보였으나 관객의 몰입을 끌어내기는 어렵다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작품으로 설현은 ‘인생캐’를 하나 적립하며 글로벌 시청자의 눈도장을 찍는 데 성공했다. 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17일 기준 ‘조명가게’는 디즈니플러스 TV 시리즈 글로벌 3위를 기록, 공개 3주 차에도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다.
원작자이자 각본을 담당한 강풀 작가는 설현의 싱크로율에 대해 “현장에서 진짜 지영 같다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인상 깊었다”고 만족을 표했다. 이 작품으로 감독 데뷔한 배우 김희원 또한 “첫인상은 시골 소녀 같았다. 그런 인상의 친구가 여러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 캐스팅 했다”며 “이번에 보니 배우를 꼭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고 극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