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더 아름답지 않을까. 기대없는 실망은 모든 이들을 지치게 만들 뿐이다. 4년째 떨어진 권위를 되찾지 못하고 있는 대종상영화제다.
22일 개최된 제55회 대종상영화제는 55회라는 역사가 무색하게 졸속 진행으로 비판과 비난, 더 나아가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 영화인들이 만들고, 영화인들이 함께 하는 축제인 만큼 대종상영화제를 바라보는 영화인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크게 "말 뿐인 변화라면 이쯤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과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폐지 시키면 그 이미지만 남게 된다. 반백년 위상을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써는 4년째 총체적 난국, 매회 역대급 사고를 경신하는 대종상영화제다. 민망함도 한 두번이지 1년에 한 번 노이즈마케팅 이슈의 중심에 서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만신창이 영화제를 지속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금씩 위상을 갉아먹던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들마저 등 돌리게 만든 사건은 지난 2015년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상을 줄 수 없다"는 일명 참가상 논란 발언이다. 거센 비난에 휩싸인 대종상영화제 측은 급하게 "다시 논의하겠다"고 말을 바꿨지만, 그 사이 유료투표와 공정성 문제 등에 휩싸이며 자기들만의 잔치로 전락시켰다. 결국 영화인들의 보이콧으로 후보 전원이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 해 대종상영화제는 몇몇 감독들과 함께 참석자 없는 시상식을 치러야 했다. 허술했던 준비 과정만큼 행사 진행도 무례했다. 대리수상 파티도 이 때부터 시작이었다. 수상자가 참석하지 않자 같은 부분 후보에 오른 다른 참석자에게 대리 수상을 요청하는가 하면, 한 명의 대리수상자가 여러 번 대리수상하는 일명 대리수상 돌려막기까지 벌어졌다. 잦은 실수에 자료화면 오타 오류도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이준익 감독의 이름을 '이익준'으로 잘못 표기, 이준익 감독과 악연의 시작을 알렸다. '국제시장' 10관왕 몰아주기도 씁쓸함을 자아냈다.
2016년에도 대리수상영화제는 이어졌다. 시상식 열흘 전 섭외에 들어가는 등 급박하게 시상식을 진행하면서 대부분의 후보들이 대거 불참, 대리수상이 줄을 이었다. 주요 수상 부문에서는 배우 이병헌이 유일하게 참석해 영화제의 체면치레를 도왔다. 대종상영화제 측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파국 속에서도 언론 및 대중과 기싸움을 펼쳤다. 그리고 내놓은 결과는 처참했다.
2017년은 절치부심 변화를 꾀하나 했다. 새로운 조직, 심사방식, 진행방향 등에 대해 '명예회복 리부트'를 선언하며 "젊은 영화인들을 대거 영입해 조직위를 꾸리겠다"고 밝히는가 하면 "그들만의 축제라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 적극적인 소통과 참여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배우들도 조금씩 마음을 바꿔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남배우들이 대거 참석을 확정지어 시상식 전 분위기는 꽤 좋았지만 생방 사고가 터지면서 문제없는 대종상은 대종상이 아니라는 사실만 재확인시켰다.
TV조선을 통해 생중계 된 54회 대종상영화제는 일명 '감독·배우 뒷담화'라는 역대급 방송사고로 영화인들과 대중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최희서가 수상소감을 말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털어놓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파를 탄 것. 후속 조치는 더 최악이었다. 사과없이 증거부터 없애려는 듯 관련 영상이 족족 삭제되는 정황이 포착됐고, 그 사이 문제가 불거지자 대종상영화제 측은 "스태프 목소리가 아닌 객석 소음이다. TV조선에서 공식입장을 밝힐 것이다"며 문제를 회피했다. TV조선 측은 "스태프 소음인지 확인 불가"라며 발을 빼 버렸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있지만 책임자는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영화인들의 미움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인배 이준익 감독과 최희서는 올해 시상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건 역시나 졸속 진행. 배우와 스태프들은 올해도 대거 불참했고, MC 신현준은 올해도 대리수상자마저 참석하지 않은 부문 수상을 위해 대신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끝없는 잡음은 이제 없으면 섭섭할 정도. 무엇보다 음악상 수상자 '남한산성' 사카모토 류이치를 대신해 상을 받은 탤런트 겸 가수 한사랑의 등장은 보는 이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영화 시상식이 아닌, 그림 경매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부상 존재감도 수상자보다 컸다.
관계자들은 "이제는 비난하기도 지친다. 왜 생중계를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사전 상황을 알았다면 생중계를 포기했을 법 한데 너무 막무가내 아닌가 싶다", "시상식의 권위가 상의 가치까지 떨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주먹구구식 진행을 이어갈 것이라면 조심스럽지만 폐지가 답 아닐까 싶다", "1, 2년은 이해했지만 4년째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건 분명 문제가 있다. 좋은 마음으로 돕고 싶은데 대종상 측에서 자꾸 걷어차는 느낌이다"며 불만을 호소했다.
물론 대종상영화제를 응원하는 이들도 많다. 2년 전 이병헌은 "5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쌓은 명예를 이전처럼 다시 찾는 것이 단 시간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명예로웠던 시상식이 불명예스럽게 없어지는 것은 더 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변화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된다기 보다는 모두가 한 마음이 돼 조금씩 고민하고 노력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후배들이 내가 20년 전 이 시상식에 오면서 설레고 영광스러웠던 마음가짐과 똑같은 기분을 갖고 참여하면 참 좋을 것 같다. 5~60년 전 나의 대선배들은 큰 뜻을 갖고 이 영화제를 만드셨을 것이다. 이제 우리 후배들이 더 고민하고 노력해서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소감을 남긴 바 있다.
올해 감독상을 수상한 장준환 감독 역시 "상을 받은 것은 기쁘지만 시상식을 지켜 보면서 왠지 모르게 쓸쓸함과 씁쓸함이 남는다. 뿌리의 깊이만큼, 큰 나무, 큰 축제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이다"는 애정섞인 당부를 표하기도 했다.
이제 대종상영화제에 바라는 것은 화려하고 성공적인 시상식이 아닌, '무사고' 단 하나가 됐다. 7년째 대종상영화제 MC로 나서고 있는 신현준의 의리도 대종상영화제에 대한 영화계 반응의 한 단면이다. 대종상영화제의 존속 여부는 결국 영화제 측에 달렸다. 기대가 사라진지는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