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충무로의 중심이 된 배우 조진웅이다. 단역부터 신스틸러를 넘어 어엿한 주연배우로 성장한 조진웅은 영화 '대장 김창수(이원태 감독)'을 통해 원톱 타이틀롤까지 맡았다. 백범 김구의 청년시절이라고 하지만 결국 김창수도 김구는 김구다. 누가 연기해도 부담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캐릭터이기에 조진웅 역시 몇 년에 걸쳐 고사와 거절을 반복했다. "굳이 왜"가 "내 차례인가"로 바뀌게 된 이유는 자신이 고심하다 잊어버린 그 시간동안 작품도 주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후배를 아우르며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까지 톡톡히 해낸 조진웅은 김창수를 연기하는 과정에서 지인들로부터 "이제 길거리에 침도 못 뱉는 것 아니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고. 덜컥 겁을 먹고 "어쩌지?"라고 생각하기 보다 "나쁜 것은 안 하면 되지. 더 좋은 것 아닌가"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는 조진웅은 이미 김창수의 인생을 받아들일 준비를 충분히 마친 상태였다.
- 포스터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혔다.
"상당히 부담스럽다. 왜 저랬는지 모르겠다.(웃음) 포스터는 촬영을 마친 후 스튜디오에서 따로 찍었다. 카메라를 얼굴에 계속 들이대고 찍길래 '왜 이렇게 찍죠?'라고 물었더니 '어딘가에는 쓰겠죠'라고 하시더라. 근데 포스터게 떡하니 실렸더라."
- 감정이 되살아나던가.
"신기했다. 한 달, 두 달이 지난 후였는데 느낌이 남아 있더라. 다른 배우들은 잘 모르겠지만 난 보통 포스터 촬영을 할 때 사실 마음이 좀 동하지 않는다. 이미 현장을 떠난 작품이고 새 옷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서 다시 예전 옷을 입으려니 쉽지는 않다. 근데 '대장 김창수'는 홍보를 할 때마다 울컥 울컥 한다."
- 영화가 주는 진정성 때문일까.
"영화 자체로도 그렇지만 실화다 보니 그 시대가 바로 떠오른다. 숙연해지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 몇 번을 고사하다 타이틀롤을 맡았다.
"…. 처음에는 '아무도 안 하려고 하나?' 싶었다. 그러다 '이제 내 차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량' 작업을 할 때 바로 옆에서 너무 고동스럽고 괴로워 하는 최민식 선배님을 보며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저렇게 고통스러운 일이구나' 느꼈던 적이 있다. 그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대장 김창수'를 선택할 이유가 당연히 없었다. 그 힘든 걸 굳이 뭐하러 하겠냐고.(웃음)"
- 스스로를 합리화 시킨 것인가.
"여러가지를 끼워 맞췄다. 김구 선생이 1875년 생인데 내가 1976년 생이다. 딱 100년 뒤에 태어났다. '100년 뒤에 태어나서 광대짓 하다가 이렇게 만나는구나' 합리화 시켰다.(웃음) 그리고 제대로 된 시나리오 최종본을 받았을 때, 삼각지 옆 백범로에 살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합리화다. 하지만 진짜 상황이 그렇게 됐다. 신기했다."
- 너무 끼워 맞춘 것 아닌가.
"생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웃음) 동네 끝에 효창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 김구 선생의 생묘가 있다. 부산에서 연극할 때 친할아버지 산소에 자주 갔다. 지금은 함안으로 이장했는데, 심란하고 싱숭생숭할 때마다 산소를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제는 자주 못가 아쉽다' 하고 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김구 선생님의 생묘를 알게 됐다. 심지어 집 근처다. '좀 칭얼대다 와도 되겠구나' 싶었고, 실제 와이프와 자주 찾아가고 있다."
- 가서 무슨 이야기를 했나.
"'홍보 시작하는데 잘 되게 해주세요'(웃음) 오늘도 인터뷰 하기 전에 오전에 잠깐 가 인사 드리고 왔다. 생각보다 잘 모셨더라. 생묘 뿐만 아니라 구국 열사들의 전당도 있고 기념관도 있다. 산책하기도 좋다. 다들 한 번씩 찾아가 보길 바란다."
- 연기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
"오히려 시작하기 전이 힘들었다.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 직전, 감독님 뵙고 '진행합시다'라고 말하기 직전이 쉽지 않았다. 처음 고사하고 1년, 1년 반 정도는 아예 이 작품을 잊고 살았다. 근데 1년 지나니까 또 쿡 찌르더라. '뭐야, 아직이야? 아무도 안 한대? 개런티를 반으로 불러야지!' 등 거절과 조언을 반복했다."
- 왜 그렇게까지 거절했나.
"일단 원래 제목이 '사형수'였다. 왠지 어감이 싫잖아.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끔찍한 것이 어디 있나. 뭐를 죽였으니까 사형수가 되지 않았겠나. 막연히 '싫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대장 김창수'로 바뀌었다는 것을 들었다."
- 힘들 것을 알면서 결국 선택했다.
"힘들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라 생각했다. 촬영하면서 나를 다시 생각하게 됐고, 연기 외적으로 눈물도 많이 흘렸다. 창피했지만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 이 순간도 겁이 난다."
- 감정적인 부담감이 컸던 것인가.
"사형집행 신을 전주 교도소 사형장에서 찍었는데 보수 공사를 계속 했다. 촬영 전까지 한 번을 안 들어가봤다. 재미로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안 들어가지더라. 촬영을 할 때 처음으로 들어갔다. 영화를 위한 과정이고, 어떻게 보면 픽션이고, 안전장치가 다 돼 있을 것이고, 마음가짐도 다 준비됐다 싶었는데 눈물이 났다. 그런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더라. 그 때 창피함을 느꼈다."
- 무엇이 창피했나.
"그 말을, 그 대사를 했던 실제 김창수라는 인물은 20대 초반이다. 나는 곱절이나 나이가 많은데 그 따위의 겁을 쳐먹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가. 나도 부산에서 한다면 했고, 어떤 상황이 닥치든 쫄지 않을 자신이 있다 생각했는데 그 땐 머리가 조아려지더라. 생소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