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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팬들에게 'K-볼'을 묻다⑦] 최양락 "한화는 다이너마이트인데 요샌 물총을 쏘네? 그래도 괜찮아유~"

2024년 KBO리그는 새 역사를 쓰고 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 처음으로 정규시즌 1000만 관중을 돌파한 것이다. 경기장에 가지 않더라도 TV와 모바일로 야구를 즐기는 팬들은 그 몇 배다.프로야구는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올해는 스포츠를 뛰어넘어 한국 최고의 콘텐츠로 도약하고 있다. 1000만 명은 단지 관객이 아니다. 야구장에서 응원가를 만들어 부르는 가수이며, 함께 춤추는 댄서다. 그리고 기발한 응원문구를 쉴 새 없이 생산하는 카피라이터다. 불같은 열정을 내뿜으면서도 매너는 쿨하다. 야구 종주국 미국과 야구가 국기(國技)로 여기는 일본에서도 깜짝 놀라는 응원 문화다. 일간스포츠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팬으로 불러도 좋을 이들을 만나 'K-볼'의 매력에 대해 들었다. 개그맨 최양락은 ‘원조 보살팬’이다. 충남 아산 출신인 그는 1986년 빙그레(한화) 이글스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심하지 않았다. 방송에선 ‘깐족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야구팬으로서는 지고지순 그 자체다.최양락은 40년 가까이 한화의 흥망성쇠를 목격했다. 이는 곧 그의 희로애락이었다. 최양락으로부터 젊은 야구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최양락은 한 시간 넘도록 한화와 야구에 얽힌 추억을 들려줬다. 승리보다 패배가 많은 팀을 응원하면서도 늘 행복해 보였다. 그의 유행어처럼 한화라면 뭐든지 ‘괜찮아유~’다. - 언제부터 야구팬이셨나요?“초등학생 때. 그러니까 1970년대부터였죠. 당시에 아마추어 야구 인기가 워낙 좋았으니까요. 대구상고(상원고) 장효조 선수, 한국화장품 김재박 선수 등이 정말 대단했죠. 그때 TV 중계는 거의 없었고, 주로 라디오로 들었죠. 눈에 보이지 않는 야구를 귀로 듣고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드라마를 좋아했던 누나도 중계를 듣다가 어느새 야구팬이 될 정도였지.”최양락은 소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라디오에서 들었던 캐스터 목소리를 재연했다.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간다, 간다. 홈런!” 반세기 전에 지었을 법한 표정으로 그는 추억 여행을 떠났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엔 어느 팀을 응원했나요.“프로 원년에 대전 연고 팀은 OB(두산) 베어스였죠.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했잖아요. 그땐 ‘우승이 제일 쉬웠어요’라고 했지. 내 또래 충청도 팬들이 아직도 한화를 응원하는 이유는 그 감동과 전율이 남아서일 거예요. 너무 고마웠고, 좋았으니까. 고등학생 아이가 공부 못하면 부모들이 그러잖아요. ‘우리 애가 초등학교 땐 잘했는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라고. 내가 딱 그런 마음이에요. 마음 잡고 노력하면 야구 잘할 거라고 믿는 거죠.”- 개그맨이 된 후에도 야구를 좋아하셨나요.“서울예전 연극과 1학년이었던 1981년 제1회 MBC 개그 콘테스트를 통해 데뷔했어요. MBC 청룡을 응원하러 이봉원과 서울 잠실야구장에 자주 갔지. 얼마 전 제가 운영하는 유튜브 ‘괜찮아유’에 출연한 남희석이 저더러 그러더라고요. ‘이 형은 배신자다. 한화만 응원한 팬이 아니다’라고요. 그때 난 MBC 소속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일장기를 달고 뛴 손기정 선수(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같은 심정이었다고.”- 빙그레 창단 후 마음을 다잡으셨나요.“진짜 충청도 팀이 생겼으니 다른 팀들은 다 정리했죠. 빙그레가 참 잘했어요. 정규시즌 1위도 두 번(89·92년) 했죠. 이상군, 한희민, 한용덕, 송진우, 구대성, 정민철 등등 대단한 투수가 많았지. 홈런왕 장종훈, 악바리 이정훈도 대단했죠. 이정훈은 선동열에게 홈런을 친 뒤 ‘선동열 투수한테는 죽어도 본전이니까 죽어라 (공을) 쳤다’라고 했다잖아요. 아유, 근성이 어마어마했지. 한화 하면 다이너마이트 타선이잖여. 그런데 요새 류현진은 물총을 찍찍 쏘며 놀던데….”2013년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했다가 올 시즌 한화로 복귀한 류현진은 득점한 주자들에게 앙증맞은 물총을 쏘며 더그아웃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다이너마이트(강팀)와 물총(약팀)을 대비시킨, 최양락 특유의 유머였다. - 한화가 9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죠.“90년대 야구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경기장에 자주 응원하러 갔는데 어느 날 엉뚱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더그아웃에서 선수들과 함께 야구를 보고 싶었던 거죠. 언젠가 야구 관계자를 통해 잠실구장 3루 더그아웃에 들어갔어요. 감독님과 멀리 떨어진 곳(주로 투수들이 모인) 의자에 한화 선수들과 같이 앉았어요. 그땐 평일 경기는 TV 중계도 안 됐으니 그냥 들어간 거지. 눈치 보면서 야구를 보는데 장종훈이 홈런을 날린 거예요. 어라? 선수들이 더그아웃 앞으로 나가서 하이 파이브를 하네? 나도 뛰어 나가서 같이 했지, 뭐. 손뼉을 마주친 장종훈이 내 얼굴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더라고. 요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옛날이니까 뭐.”- 2010년대 이후 한화가 참 부진했습니다.“꼴찌도 참 많이 했죠. 지는 것도 서러운데 연패 중인 팀이 한화를 상대로 3연승 하고 돌아가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어요. 부진했던 투수도 우리만 만나면 기적처럼 부활해. 야구를 끊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더 떨어질 데가 없으니 올라가겠지’라며 마음을 다잡는 거죠. 미우나 고우나 기다리는 거예요.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오기도 했고. 김태균, 류현진 같은 선수는 얼마나 대단해요? 강팀에 있었다면 두 선수 개인 기록이 더 좋았을 거예요. 연봉과 인기도 더 높았겠지. 마치 임진왜란 끝난 뒤 태어난 이순신 장군이랄까. 안타까운 마음이 커서 더 응원했어요.”- 그래도 한화 팬들은 정말 열성적입니다.“충청도 사람이 그렇잖아요. 느긋하고, 낙천적이고. 점심 잘 먹고 아무런 말도 안 하다가 다음날 ‘어제 참 맛있었어. 그 집 장사 잘되겄어’ 하거든. 우리 사위도 한화 팬이래요. 그렇다면 인내심은 믿을 만하지.”- 요즘 야구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정말 멋지게 응원하죠. 스케치북에 응원 문구 쓰는 거 있잖아요? 그거 예전에 방송 작가들이 출연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방식이거든. 그걸 야구장에서 보니 정말 재밌어요. 90년대에 대구구장에 간 적이 있는데. 장종훈이 홈런을 때린 거야. 벌떡 일어나서 환호했더니 만 명 넘는 관중이 동시에 날 노려보는 거예요. 몇 대 맞을 거 같은 분위기였지. 요샌 원정팀 응원 존이 정해져 있잖아요. 심지어 상대 팀 응원석에서 혼자 응원도 하고. 문화가 많이 달라졌죠.”- 올해 한화 야구를 보면 어떤 느낌인가요?“솔직히 가을 야구는 힘들 거 같았어요. 그래도 괜찮아유. 여름에 야구 많이 했잖여. 선수층이 과거에 비하면 두꺼워졌고, (늦여름까지) 6~7위는 했잖아요. 내년에 5강 가고, 다음에 우승하면 돼요. 우린 기다릴 수 있지.”- 창간 55주년을 맞이한 일간스포츠와 어떤 추억이 있나요?“80~90년대 방송국 개그맨 실에 가면 일간스포츠가 늘 비치돼 있었어요. 동료들과 인사하면서 ‘연예면에 네 기사 나왔더라’ ‘너 결혼한다며?’라고 안부를 주고받았죠. 스포츠지 1면에 자주 나오는 야구 기사도 열심히 봤어요. 홈런 친 타자가 아니라 ‘선동열이 홈런 맞았다’는 기사를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오랜 시간 함께해줘서 독자들이 고마워할 거예요.” - 일간스포츠 못지않게 긴 역사를 가진 방송인이자, 야구팬이시네요.“예전엔 참 재미있는 일이 많았어요. 대신 그 시절 개그맨이 큰돈은 못 벌었죠. 방송 출연해야 몇만 원 받던 시절이었으니까. 스포츠 스타도 마찬가지였죠. 장종훈 같은 타자가 지금 뛰었다면 돈을 엄청나게 벌겠지. 어쩌겠어요? 시대가 달라진 걸. 그래도 저는 여전히 방송을 하고 유튜브도 하잖아요. 팬들의 사랑을 받는 덕분이죠. 한화 응원가 제목처럼 ‘나는 행복합니다!’”김식 기자 2024.09.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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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GG] 최대 격전지 유격수 승자는 오지환, 득표율 52.9%

최대 격전지 유격수 황금장갑의 주인공은 오지환(33·LG 트윈스)이었다.오지환은 1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2023 KBO 골든글러브(GG) 시상식에서 유격수 부문 GG를 받았다. 유효표 291표 중 154표를 획득, 득표율 52.9%로 박찬호(KIA 타이거즈·41.2% 120표)를 따돌리고 2년 연속 GG를 차지했다. LG 소속 유격수가 GG를 품에 안은 건 김재박(1983~87, 89) 류지현(1998~99)에 이어 오지환이 역대 세 번째다.오지환은 정규시즌에서 타율 0.268(422타수 113안타) 8홈런 62타점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성적은 박찬호(타율 0.301 3홈런 52타점)와 비교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LG를 29년 만에 통합우승으로 이끌어 가산점을 받았다. 오지환은 한국시리즈(KS) 5경기에서 타율 0.316(19타수 6안타) 3홈런 8타점으로 활약했다. 시리즈에서 출루율(0.409)과 장타율(0.842)을 더한 OPS가 1.251에 이르렀다. 특히 2~4차전에서 모두 손맛을 보여 단일 KS 사상 첫 3경기 연속 홈런으로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다. 1승 1패로 맞선 3차전 5-7로 뒤진 9회 초 2사 1·2루에서 터트린 역전 결승 스리런 홈런은 리그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었다. 3차전을 짜릿한 역전승으로 마무리한 LG는 4·5차전마저 승리, 29년 동안 멈춰있던 우승 시계를 돌렸다.오지환은 수상 뒤 "2023년을 최고의 해로 만들어주신 염경엽 감독님 감사드린다. 많은 코치님과 차명석 단장님, 프런트, 너무 많은 분에게 도움을 받았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2023년이 저한테는 최고의 한해인 거 같다. 29년 만에 (팀이) 우승이라는 걸 해봤고, 지금이 시작점이라고 생각하겠다. 내년에도 LG가 정규시즌, 통합 우승해서 왕조를 할 수 있게 하겠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에게 고맙다. 마지막으로 10개 구단 팬분들 모두 최고"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삼성동=배중현 기자 bjh1025@edaily.co.kr 2023.12.1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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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포지션의 우상" 박진만 감독이 '70번' 선택한 이유

박진만(46)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왜 등 번호로 70번을 선택했을까. 박진만(46) 신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26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취임식을 갖고 삼성 제16대 사령탑으로 첫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전임 허삼영 감독 때는 코로나19 탓에 단출하게 취임식이 진행됐지만 이번엔 달랐다. 원기찬 삼성 라이온즈 대표이사와 홍준학 단장을 비롯해 마무리 투수 오승환, 주장 오재일 등 20여명의 선수도 취임식에 참석했다. 이날 눈길을 끈 것 중 하나는 박진만 감독의 등 번호였다. 선수 시절 주로 7번을 달았던 박진만 감독은 등 번호 70번을 선택했다. 70번은 현대 유니콘스 시절 김재박 감독의 등 번호와 같다. 1996년 현대에 입단한 박 감독은 현대 전성기 멤버이자 KBO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박진만 감독은 "김재박 감독님의 야구 스타일을 많이 배웠다"며 "프로 들어오기 전부터 내 포지션(유격수)의 우상이어서 나중에 코칭스태프를 하면 70번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없었다. 나이가 어릴 때는 고참급 선수들이 등 번호를 달고 있었다. 기회가 생기면서 70번을 달게 됐다"고 전했다. 박진만 감독은 선수 시절 지도한 여러 감독의 스타일을 조합할 계획이다. 그는 "김재박 감독님의 야구를 한다는 건 아니고 선동열 감독님(삼성)과 김성근 감독님(SK 와이번스) 등을 조합해서 운영하려고 마음먹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배중현 기자 bjh1025@edaily.co.kr 2022.10.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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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는 2등 필요 없다" 닻 올린 박진만호

'박진만호'가 닻을 올렸다. 박진만(46) 신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26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취임식을 갖고 삼성 제16대 사령탑으로 첫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전임 허삼영 감독 때는 코로나19 탓에 단출하게 취임식이 진행됐지만 이번엔 달랐다. 원기찬 삼성 라이온즈 대표이사와 홍준학 단장을 비롯해 마무리 투수 오승환, 주장 오재일 등 20여명의 선수도 취임식에 참석했다. 박진만 감독은 지난 8월 1일 성적 부진으로 사퇴한 허삼영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 대행으로 팀을 이끌었다. 허삼영 감독 체제에서 38승 2무 54패(9위)를 기록한 삼성은 박진만 감독 대행 체제에선 28승 22패로 같은 기간 리그 4위로 성적이 향상했다. 최종 7위로 가을야구 진출엔 실패했지만, 그의 지도력을 인정, 지난 18일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다. 삼성은 2년이 아닌 계약 기간 3년을 보장하며 최대 12억원(계약금 3억원, 연봉 2억5000만원, 옵션 연 5000만원)을 안겼다. 박진만 감독은 선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독으로서 무게감을 느낀다.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부담이 있지만, 올해 후반기 감독 대행을 하면서 선수들의 활기차고 패기 있는 모습을 봤다. 2023년이 기대되고 빨리 왔으면 하는 설렘이 큰 거 같다"고 말했다. 이어 "화려함보다 기본기에 충실한 플레이, 그 플레이 안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길 부탁한다. 집중력 없고 흐트러진 모습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어달라"고 당부했다. 박진만 감독은 등 번호 70번을 선택했다. 현대 시절 지도를 받은 김재박 감독의 등 번호와 같다. 그는 "김재박 감독님은 어렸을 때부터 우상이었다. 야구 스타일도 많이 배웠다. 프로에 오기 전부터 내 포지션(유격수)의 우상이어서 코칭스태프를 하면 70번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없었다"며 "김재박 감독님의 야구를 하겠다는 것보다 선동열 감독님, 김성근 감독님 등 (선수 생활을 하면서 겪은 걸) 조합해서 운영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정규시즌은 단기전이 아니어서 선수층이 두꺼워야 성적이 날 수 있다. 부상으로 빠지면 대체할 수 있는 선수들이 있어야 한다. 대행을 하면서 보여준 기조(경쟁)를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의 박진만 감독 선임은 두산의 이승엽 감독 선임과 맞물려 많은 화제를 낳았다. 삼성 레전드 출신 이승엽 감독이 두산 사령탑에 올랐고 며칠 뒤 박진만 감독의 계약이 발표됐다. 두 감독은 1976년생 동갑내기로 과거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박진만 감독은 "팬들 입장에서 관심이 커진 거 같다. 이승엽 감독도 얘길 했지만, 야구가 침체해 있는데 국제 대회 나갔을 때 (좋았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게 이승엽 감독이나 내 의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진만 감독은 보강이 필요한 포지션으로 불펜을 꼽았다. 시장 상황을 살펴 트레이드 시장에서 움직이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가장 관심이 큰 외국인 선수 관련해선 "좋은 결과를 보여줬고 안정적인 선수들"이라면서 "3명(뷰캐넌·수아레즈·피렐라) 모두 재계약이 우선순위"라고 공언했다. 삼성은 정규시즌 종료 후 곧바로 감독을 발표하지 않았다. 모그룹 보고와 결재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강인권 NC 감독 대행이 먼저 대행 꼬리표를 뗐다. 이승엽 감독의 두산 계약 소식까지 전해져 삼성 감독 선임에 더 큰 관심이 쏠렸다. 박진만 감독은 "강인권 감독이나 이승엽 감독이 빨리 발표되면서 얘기들이 많았는데 '내 발표가 정상적인데 그게 빨리 된 거 아닌가' 싶었다. 크게 좌우하지 않았다"고 말해 현장을 잠시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목표는 왕조 재건이다. 박진만 감독은 "프로는 2등이 필요 없다. 1등을 해야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다. 그게 프로"라며 "내 마음은 한결같다. 우승을 위해 준비할 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구=배중현 기자 bjh1025@edaily.co.kr 2022.10.2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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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모인 날, ‘국민 유격수’가 기본기를 말했다

박진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 대행은 현역 시절 '국민 유격수'로 불렸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 데뷔 직후부터 탄탄한 수비를 선보였고, 삼성으로 이적한 뒤인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메이저리거 못지않은 탄탄한 수비를 선보였다. 그 덕분에 박 대행은 실업야구와 프로야구 초창기 활약했던 김재박 전 LG 트윈스 감독부터 시작되는 KBO리그 최고 유격수 계보를 잇는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박 대행은 17일 서울 잠실 LG전에서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로 선정된 김재박 전 감독의 시상식을 함께했다. 여기에 1990년대를 대표하는 유격수이자 '계보'의 일원으로 꼽히는 류지현 LG 감독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선배들과 함께한 의미 있는 날, 박진만 대행은 모처럼 후배들에게 쓴소리를 전했다. 박 대행은 경기 전 인터뷰 때 “프로야구에 갓 입단한 어린 선수들의 수비 기본기가 잡혀 있지 않다”고 했다. 감독 대행 전까지 퓨처스팀(2군) 감독을 맡았던 그는 "퓨처스팀에서 육성, 스카우트 파트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최근 아마추어 선수들이 타격은 열심히 하는데 수비에는 신경을 덜 쓰는 경우가 많다. 드래프트에서 타격 능력을 먼저 보기 때문이지만, 입단하면 수비 기본기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며 "고교 대형 유격수라는 선수들도 대부분 타격 능력으로 주목받는다. (사설 아카데미 등) 학교 밖에서도 야구를 배우는 선수들이 많지만 역시 타격만 익힌다. 내야수는 외야수와 송구 자세가 달라야 하는데 차이가 없다. 포구 자세가 준비 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올해 삼성에는 대형 유격수 이재현과 김영웅이 입단했다. 이재현은 주로 1군, 김영웅은 주로 2군에 머물며 시즌을 소화했다. 박 대행은 “이재현은 주로 1군에 있어서 내가 많이 보지 못했지만, 김영웅은 퓨처스팀에서 손주인 수비 코치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본기 훈련을 반복했다. 초반에는 몸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는데, 이제 포구 자세와 스로잉이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했다. 직접 훈련을 담당했던 손 코치는 "내야수와 외야수는 팔 스윙부터 다른데 어린 선수들이 잘 인지하지 못했다. 캐치볼을 하더라도 마구잡이로 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최근에는 퓨처스팀 경기가 많아져 훈련 시간이 부족해진 이유도 있다”며 “재현이와 영웅이는 타고난 재능은 굉장히 좋지만, 기본적인 것들에서 많이 부족했다. 상황마다 다른 포구나 송구 자세에 대한 숙지가 부족했다. 영웅이와는 기본적인 스텝과 송구 훈련 등을 집중적으로 반복했다"고 했다. 박 대행 역시 이 시기를 겪었다. 현대 시절 신인이었던 그를 지도했던 건 다름 아닌 김재박 당시 감독이다. 그는 “감독님은 내가 신인 때부터 시작해 4년 동안 스프링캠프에서 수비 훈련만 시키셨다. 타격 훈련이 더 재밌는데 수비만 해 답답했다”고 돌아봤다. 손 코치는 "이재현과 김영웅은 재능이 확실한 선수들이다. 조언하면 빨리 이해했고 발전 속도도 좋다. 훈련이 이어진다면 더 좋은 수비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2.08.1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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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의 진"…'2년+프랜차이즈 계약' 류지현 감독 선임 의미

LG의 선택은 '프랜차이즈 출신' 류지현(49) 감독이었다. LG는 "류지현 수석 코치를 제13대 감독에 선임했다"고 지난 13일 발표했다. 3년 계약이 만료된 류중일 전 감독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뒤 사임 의사를 밝히자, LG 구단은 발 빠르게 새 사령탑 선임을 마무리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프랜차이즈', 그리고 '2년 계약'이다. 그동안 LG는 명성 있는 외부 인사를 주로 영입했다. 현대와 삼성에서 여러 차례 정상에 오른 김재박·류중일 전 감독을 '우승 청부사'로 데려왔다. 또한 두산 2군 감독이었던 박종훈, 롯데 사령탑에서 물러난 양상문 감독과 계약했다. LG 2군 감독을 지낸 김기태 전 감독과도 동행했다. 2000년대 LG는 프랜차이즈 출신 사령탑을 둔 적이 없다. 류지현 신임 감독은 '27년 트윈스 맨'이다. 사실상 프랜차이즈 출신으로 LG 지휘봉을 잡은 첫 감독이다. 앞서 백인천·김재박 감독이 MBC 청룡 출신으로 LG 사령탑에 올랐고, MBC 청룡과 LG에서 뛴 이광은 감독이 1999년 12월부터 2001년 5월까지 LG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류지현 신임 감독은 한양대를 졸업하고 1994년 LG 1차 지명으로 입단, 신인상을 받았다. 1번 타자·유격수로 활약하다 2004년 LG에서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총 1108경기에서 타율 0.280, 379타점, 719득점, 296도루. 미국 메이저리그(MLB)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기간을 제외하면, LG에서 수비·주루·수석 코치를 두루 역임했다. 오래전부터 LG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 1순위로 언급됐다. 차명석 LG 단장은 "외부에서 오신 감독님들이 연임하지 못했다"는 말로 그동안 다른 노선을 택한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에는 '프랜차이즈 출신 지도자를 선택하자'는 분위기가 퍼졌다. LG 구단은 "(류지현 감독은) 팀의 내부사정에 정통하고, 선수의 기량과 특성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 또한 선수단과 소통 및 프런트와의 협업에 가장 적합하다는 장점이 있다"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LG는 감독 후보(5명)들을 인터뷰했다. 이를 바탕으로 모 그룹에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는데, 이번에는 구단의 의견이 많이 반영됐다고 한다. LG 구단의 자율성과 함께 책임을 부여한 것이다. 과거 LG는 이순철·김재박·김기태·양상문·류중일 감독과 3년 계약을 맺어왔다. 박종훈 감독과는 5년 계약을 깜짝 발표하기도 했다. 류지현 신임 감독과는 2년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 3억 원, 연봉 3억 원 등 총 9억 원의 조건이다. 차명석 LG 단장은 "(우승을 향한) 배수의 진을 쳤다"라고 표현했다. 류중일 감독 재임 기간 고우석·정우영·이민호·홍창기·김윤식 등 신예 선수들이 성장했다. 팀 전력의 기반을 어느 정도 다졌고, 자연스럽게 신구 조화가 이뤄졌다.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팀을 잘 파악하고 있는 류지현 신임 감독이 2년 내 '성과'를 내주길 기대한다는 의미다. LG는 "(감독 선임 과정에서) 소통과 협업, 데이터 야구, 팀 운영에 대한 철학 등을 평가했다"며 "류지현 감독은 공부하는 지도자로, 현대 야구의 트렌드인 데이터 분석의 중요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수석 코치를 역임하며 지도자로서 준비를 충실히 해왔다"라고 평가했다. 류지현 감독은 "LG 트윈스는 신인 선수로 입단해 계속 몸담아온, 내게는 숙명이자 가족 같은 팀"이라며 "기회를 주신 구단에 감사하다. 앞으로 '무적 LG트윈스'를 만들겠다. 선수로 경험한 우승과 신바람 야구를 감독으로서도 재현해 팬들과 기쁨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seok@joongang.co.kr 2020.11.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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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식' 이진영 "기가 좋은 선수로 기억되길"

이진영(39)이 현역으로 뛴 지난 20년을 돌아봤다. 그는 "후회는 없다"고 했다. 이진영은 지난해 10월13일 잠실 두산전 출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1999년, 쌍방울에서 데뷔한 그는 1군 무대에서 20시즌을 뛰며 리그를 대표하는 외야수로 인정받았다. 역대 9번째로 통산 2000경기에 출장했고, 10번째로 2000안타를 돌파했다. 16명에 불과한 3000루타도 넘어섰다. 의미 있는 수식어를 남겼다. 이진영은 2006년 3월 5일 도쿄돔에서 열린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예선 1라운드 3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선발 출장했다. 0-2으로 뒤진 4회말 2사 만루에서 상대 타자 니시오카 츠요시의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캐치로 잡아냈다. 대표팀은 이후 1점을 추격한 뒤 이승엽이 8회 공격에서 역전 투런포를 치며 3-2로 승리했다. 이후 그는 국민 우익수라로 불렸다. KBO 리그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2008시즌에는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2013시즌에는 LG가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기여했다. 현역 마지막 세 시즌은 신생팀 KT에서 후배들을 이끌며 리더 역할을 했다. 현재 그는 일본 구단 라쿠텐 소속으로 코치 연수를 받고 있다. 오는 11월 열리는 프리미어12 국가대표팀 전력 분석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8일 수원 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KT와 LG전을 앞두고는 팬들과 현역 선수로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를 가졌다. 다음은 현역 생활 20년을 돌아본 이진영의 일문일답. - 정식 은퇴식을 앞둔 심정은."현역으로 뛴 20년 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마지막이 다가올 줄 몰랐다. 전날에는 잠을 설치기도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기상청 소식을 계속 확인했다. 그래도 팬분들을 보니까 그런 근심이 잊혀졌다. 좋은 추억이 생겼다" - 팬 사인회에서 오랜 만에 팬들과 호흡했다."선수로는 마지막 팬 사인회였다. 마음이 뭉클했다. 우시는 팬도 계셔서 울컥했다. '선수 인생은 마무리됐지만 꼭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해 드렸다." - 은퇴를 아쉬워한 팬이 많다."추측이나 오해도 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모두 내가 결정한 것이다. 많은 선배의 양보를 받은 덕분에 저연차 시절부터 뛸 수 있었다. 고참이 되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국가 대표팀에서 뛰면서 얻은 영광의 순간, SK에서 우승을 하고 느낀 환희, 포스트시즌 진출에 기여한 LG 시절 모두 기억이 난다. KT에서도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가 되고 싶었다. 뜻깊은 시간이었다. 20년 동안 정말 긴 시간을 보냈다." - 가장 의미 있는 별명이 있다면"아무래도 국민 우익수가 아닐까. 안 좋은 별명조차도 정말 감사했다." - 은퇴 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달라진 점이 있나. "정해진 스케줄로만 생활했다. 자율이 어색하다. 처음에는 가정에 충실했다. 그동안 좋은 아빠나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할 때는 또 다른 야구를 배웠다." - 선배들에게 받은 조언이 있다면."은퇴를 결정한 뒤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먼저 은퇴한 이병규 선배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얘기를 해줬다. 박용택 선배도 그랬다. 많은 얘기를 듣고 다시 한 생각이지만 은퇴를 후회하진 않는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가 있다면."김성근 감독님이 정말 많은 훈련을 시켜주셨다. 배운 게 많다. 강병철, 조범현, 김재박 감독님께서도 기회를 많이 주셨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다." -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가."내세울 수 있는 성적은 2000안타라고 생각한다. 군산에서 올라온 촌놈이 야구계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기록이었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강했던 선수, 좋은 흐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줄 수 있는 기가 좋은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도 크다." - 제2의 야구 인생에 대한 각오를 전한다면."코치 연수를 받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에는 코치님은 다 선생님 같았다. 요즘에는 다른 모습의 지도자도 있다고 생각한다. 곁에서 선수의 성장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 수원=안희수 기자 An.heesoo@jtbc.co.kr 2019.07.2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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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전9기 김경문 감독, '2등 트라우마'에서 벗어날까

프로야구에서 '2등'은 어떤 의미일까.김경문(58) NC 감독은 '2등'이라는 단어와 친숙하다. 프로야구에서 10시즌 이상 감독 중 6번째로 많은 802승을 거뒀고, 승률(0.542)은 김영덕(0.596), 김응용(0.547)에 이어 세 번째다. 2016년 가을은 감독 김경문에게 9번째 포스트시즌이자 9번째 '1등 도전'이다.선수로는 프로야구 첫 시즌에 1등을 차지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김경문은 우승팀 OB 베어스의 주전 포수였다. 1982년 10월 12일 6차전 9회말 삼성 배대웅의 타구가 유격수 땅볼로 아웃되자 OB 투수 박철순은 마운드 위에 꿇어앉아 두 팔을 치켜들었다. 이때 홈플레이트 뒤에서부터 달려와 그를 끌어안은 포수가 김경문이었다. 하지만 포수는 주인공이 아닌 포지션이다. 야구기록지에서 수비 번호는 2번, 이해 김경문의 등번호는 22번이었다.프로선수로는 10시즌을 뛰었다. 통산 타율은 0.220. 1989년까지 OB는 김경문과 조범현, 2명으로 포수진을 운용했다. 1990년 김경문은 태평양으로 이적했고, 라이벌 조범현은 이듬해 삼성으로 떠났다. 베어스 포수 계보에서 그 뒤를 이은 인물이 한국시리즈에 선착한 현 두산 감독 김태형이다.1991년 선수 유니폼을 벗은 김경문은 2년간 미국 애틀랜타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이후 삼성과 친정팀 두산 배터리코치를 거쳐 2003년 10월 마흔다섯 나이에 두산 감독직에 올랐다. 원래 '1순위 후보'가 아니었다. 두산은 당시 선동열 KBO 홍보위원과 접촉했지만 협상에 난항을 겪어 내부 승격으로 방향을 틀었다.의구심이 가득했던 2004년 첫 시즌, 김경문은 전해 정규 시즌 7위였던 두산을 3위까지 끌어 올렸다. 외야가 넓은 투수 친화적인 잠실구장에 맞춰 선수단을 재편했다. 한때 팀 컬러였던 홈런 대신 발 빠른 외야수 육성에 집중했다. 2000년 308타점을 합작하는 등 막강 생산력을 자랑한 '우동수 트리오(우즈·김동주·심정수)' 해체 후 팀 컬러를 잃은 두산이다. '잠실 육상부'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와 탄탄한 수비는 전력을 끈끈하게 만들었다. 두산은 김 감독이 팀을 맡은 8년 동안 무려 6번이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가 2013년 겨울부터 지휘봉을 잡은 9구단 NC는 원년을 제외한 3년 연속 가을 야구를 경험하고 있다.김 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12시즌 중 무려 9번이나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아직 한국시리즈에선 우승하지 못했다. 2005년엔 선동열 감독의 삼성에, 2007~2008년은 김성근 감독의 SK에 무릎을 꿇었다.2007년 한국시리즈에선 2승을 먼저 하고도 4연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이듬해에도 1차전을 이겼지만 이후 내리 4연패했다. 김 감독의 이미지에 '2등'이라는 각인이 새겨진 것은 이때부터다. 1승4패로 준우승이 확정된 뒤 김 감독은 "세 번째 기회를 놓쳤지만 오뚝이처럼 7전 8기 정신으로 다시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5년까지 7년 동안 그에게 한국시리즈 재도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2016년 가을, 10월 21일 마산구장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NC의 라인업이 발표되자 취재진이 술렁거렸다. 에릭 테임즈가 징계로 출장하지 못하는 가운데 강타자 나성범이 2번에 배치됐다. 정규 시즌 2번에 자주 기용된 박민우는 3번, 그리고 4번 타자에는 시즌 타율 0.268에 1홈런에 그친 권희동이 기용됐다. 파격적이었다. 트라우마는 과잉 반응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리고 전염된다. 혹시 김 감독은 '2등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김경문 감독은 야구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베이징올림픽에서도 그랬다. 예상하기 어려운 선수 기용과 작전을 보였다. 그 결과가 9전 전승 금메달이었다. 김 감독은 '뚝심의 야구'를 한다는 평을 받는다. 뚝심을 지키되 일반론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자기 색깔이 있다. 상대 왼손 투수가 선발 등판하더라도 1번에서 4번까지 왼손 타자로 채우기도 한다. 플래툰 시스템을 가장 적게 활용하는 감독이다. 지난해 NC에선 타자 9명이 규정타석을 채우는 진기록이 탄생했다.프로는 결과로 말한다. 그리고 감독은 결과에 책임을 진다. 감독으로서 김경문은 지금까지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802승 감독에게도 포스트시즌은 어렵다. 그는 "포스트시즌이 9번째면 부담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처음에는 멋모르고 했는데 갈수록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올해는 다른 점이 있다. 선수들에게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았다. 두산 시절부터 함께한 주장 이종욱은 "감독님이 많이 웃고 농담도 하셨다. 이렇게 선수들을 편하게 대하신 건 올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라커룸 근처에 화이트보드를 달아 놓고 선수들끼리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쓰도록 했다. 그라운드에서 승리는 만드는 이들은 결국 선수다.역대 800승 감독 6명 중 김 감독을 제외한 5명(김응용·김성근·김인식·김재박·강병철)은 모두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다. 김 감독은 올해 9번째 도전에서 과연 우승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프로야구에서 '2등'은 어떤 의미일까. 김경문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2위란 1년 내내 잘하다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때 '야구가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ins.com 2016.10.25 07:00
야구

올스타전의 추억, 장종훈은 올스타전에서 은퇴했다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들이 모인다. 승패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별들의 '잔치'라고 불린다. 2016년 KBO 올스타전이 16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다. 프로야구 최초의 돔구장 올스타전이다. 야구 팬, 선수, 그리고 양 팀 감독이 직접 선정한 올해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올해는 또 어떤 이벤트와 해프닝이 그라운드를 수놓을까. 올스타전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장면들을 돌이켜 봤다. ◇올스타전은 언제, 어디서 시작됐나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됐다. 올스타전도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가 먼저 열었다. 1933년 미국 시카고시 당국이 경제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국 박람회를 개최한 게 발단이었다. 당시 시카고 시장은 "이 시기에 맞춰 큰 스포츠 이벤트를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시카고 트리뷴지와 상의해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결국 그해 7월 6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 코미스키 파크에서 사상 첫 올스타전이 열렸다.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필드와 코미스키파크를 놓고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다. 시카고 트리뷴 체육부장 아치 워드는 "적자가 나면 내 봉급에서 제하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결과는 관중 4만7595명이 들어찬 폭풍 흥행. 뉴욕 양키스의 베이브 루스가 아메리칸리그의 첫 승리를 이끌었다. 이보다 더 훈훈한 '설'도 있다. 한 어린이가 시카고 트리뷴에 "최고 타자 베이브 루스와 최고 투수 칼 허벨(뉴욕 자이언츠)의 맞대결을 보고 싶다"는 글을 보내면서 시작됐다는 얘기다. 당시엔 월드시리즈 외에는 아메리칸리그 선수와 내셔널리그 선수의 맞대결을 볼 기회가 없었다. 양대 리그 스타 플레이어들이 서로 맞대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팬들의 소망이 있던 때였다. 이후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도 올스타전을 도입했다. 일본은 양대 리그 체제가 확립된 1951년부터 시작했고, 한국은 프로야구 원년부터 올스타전이 열렸다. 실업야구 시절에도 올스타전이 있었다. 84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로 뽑힌 동군의 김용희 SK감독 (당시 롯데 소속)이 부상으로 받은 맵시나 승용차 위에서 모자를 들어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미스터 올스타' 상품 변천사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올스타전.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를 '미스터 올스타'라 부른다. 김용희 SK 감독이 바로 프로야구 원년 '미스터 올스타' 출신이다. 원년부터 17년간 미스터 올스타의 부상은 승용차였다. 김용희 감독의 경우엔 1982년과 1984년에 두 차례 승용차를 받았다. 1982년에는 '맵시나', 1984년에는 '맵시'였다. 당시 승용차는 '부의 상징'으로 통할 정도로 큰 선물이었다. 당연히 '한 턱'을 내야 했다. 김 감독은 "경기 후 고깃집에서 동·서군 감독님과 코칭스태프, 선수들이 모두 모여 회식을 했다. 그때 돈으로 100만원하고도 수십만 원이 더 나왔던 것 같다"며 "사실상 내 돈 주고 차를 산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1998년 삼성 SM5를 마지막으로 승용차는 부상 목록에서 사라졌다. 1999년과 2000년에는 '금'으로 바뀌었고, 2002년부터는 상금으로 대체됐다. 2005년부터는 1000만원에 대형 TV까지 얹어줬다. 그러나 2009년부터 다시 추억 속의 자동차 선물이 부활했다. KIA 자동차의 포르테, K5, 뉴소렌토 등이 미스터 올스타의 품에 안겼다.역대 미스터 올스타는 롯데 출신이 가장 많다. 김용희 감독과 박정태(1998∼1999년), 정수근(2004년·2007년), 이대호(2005년·2008년)가 두 번씩 수상했고, 전준우가 2013년, 강민호가 2015년 MVP로 각각 뽑혔다. 투수 출신은 1985년 삼성 김시진, 1994년 태평양 정명원뿐이다. ◇올스타전 은퇴식의 영광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을 치르는 영광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전 구단 감독과 선수가 인정하는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여야 가능하다. 첫 번째 사례는 '홈런왕' 장종훈(한화)이었다. 2005년 6월 장종훈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자 KBO는 그해 올스타전에 특별 초청 선수로 초빙했다. 장종훈이 프로야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공식 은퇴 무대를 마련했다.이때 뜻하지 않은 해프닝도 벌어졌다. 서군이 5-6으로 뒤진 9회 2사 1·2루. 타석에 선 조인성이 초구에 볼을 고르자 김재박 당시 현대 감독이 갑자기 선수 교체를 요청했다. 올스타전 출전 선수 명단에 초청 선수 장종훈의 이름이 없었던 게 화근이었다. 경기가 끝나기 직전 장종훈이 가까스로 대타로 투입됐다. 장종훈은 2루수 땅볼로 마지막 타석을 장식했고, 후배들의 뜨거운 헹가래를 받았다.2014년 올스타전에선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은퇴식이 열렸다. 박찬호는 2012시즌을 마지막으로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진 현역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그러나 이후 고향팀 한화와 박찬호의 스케줄이 잘 맞지 않아 번번이 은퇴식이 무산됐다. 결국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KBO와 상의해 올스타전을 추진했다. 시구는 박찬호, 시포는 공주고 선배인 김경문 NC 감독이 맡았다.지난해에는 '코끼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응용 전 한화 감독이 사령탑 은퇴식을 치렀다. 후배 감독들이 뜻을 모아 성사시킨 자리였다. 김 감독이 시구를 하고, 애제자였던 선동열 전 KIA 감독이 그 공을 받았다. 김 감독은 이날 나눔 올스타 감독으로 1이닝 동안 명예 지휘봉을 잡았다. 카리스마로 무장했지만, 해학이 담긴 유머로도 잘 알려졌던 김 감독. 1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상대팀 최형우가 내야 안타로 세이프되자 심판 합의판정 요청을 해 큰 웃음을 안겼다. 배영은 기자 2016.07.15 07:00
야구

‘LG 명예 선수’ 홍경민에게 듣는 ‘2014 LG 트윈스’

가수 홍경민은 ‘LG팬’이자 ‘LG 명예 선수’다. 서울 토박이인 홍경민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를 만났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MBC청룡과 LG를 좋아하게 됐단다. 그가 본격적으로 ‘LG팬’임을 알리고, LG의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해부터다. 이후 두 번의 시구(플레이오프 포함)와 지난해 팬들과 함께 하는 ‘러브 페스티벌’ 등 구단의 공식 행사에 거의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무보수다. LG와 SK의 홈 개막전이 열린 1일에도 그는 애국가를 부르기 위해 잠실구장을 찾았다. ‘모태 LG팬’ 홍경민에게 2014년 LG 트윈스에 대해 물었다. - LG팬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좋은 기억은 아니다. 하지만 LG팬들에게 2002년은 잊을 수 없다. 삼성과 드라마틱한 승부는 유난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경기장에는 자주 오나. “일하느라 자주는 오지 못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중계는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요즘은 야구를 볼 수 있는 채널이 많기 때문에 거의 챙겨본다.”-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면. 은퇴한 선수도 좋다.“(선수들과 친분이 있어) 요즘 선수를 특정해 말하기는 좀 그렇다. LG팬이라면 90년대 초반 서용빈, 김재현, 유지현 이 세 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세 명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나는 원래 김재박 감독님을 좋아했다. 선수시절 유격수로 활약하던 그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실 김재박 감독님이 현대 감독을 맡으셨을 때 잠깐 현대 유니콘스를 응원하기도 했다. 김재박 감독님이 LG 감독으로 오셨을 때도 좋았었고…”- 2014년 LG, 어떻게 될 것 같나. 오랜 팬으로써 전망을 해본다면.“나는 전문가가 아니라 뭐라 말하기 좀 그렇지만, 요즘 방송을 보면 9개 구단이 우열을 가리리기 힘들다고 하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LG는 작년에 잘했고, 그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한번 올라간 팀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작년 LG는 우연히 올라간게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떨어지지는 않을거라 본다.” - LG 선수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김기태 감독 최고’라고 말한다. 김기태 감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우선 젊은 감각을 갖고 계시고, 선수들과 소통을 잘하는 감독으로 알고 있다. 어릴 때는 감독의 역할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야구 뿐만 아니라 축구나 농구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는 선수가 뛰는 건데, 감독은 왜 있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볼수록 팀에서 감독이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큰 것 같다. 어떤 감독이냐에 따라 팀 분위기가 확 바뀐다. 그만큼 무겁고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30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신인 투수 임지섭이 잘 던졌다. 경기를 봤나.“봤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 어린 선수가 마운드에 있는데, 너무 떨릴 것 같아 보였다. 대선배들이 타자로 나서고, 처음 보는 외국인 타자들을 상대하는데 떨리지 않을 수 있겠냐. 아마 고교야구 봉황대기 결승전 같은 경기에서 던진 것보다 중압감이 더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여유가 넘쳐 보였다. 그걸 이겨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기대되는 선수다. LG팬들이 이전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운드가 탄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LG 마운드는 늘 불안했고, 걱정거리였다. 지금은 마운드에 안정감이 있다.”- 너무 야구 이야기만 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얼마 전까지 공연을 하다 며칠 있으면 신곡을 발표한다. 발라드라서 이따 5회 끝나고 하는 공연에는 신나는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 마지막으로 올 시즌 LG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작년하고 마찬가지로 가을 야구를 하고,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을 해준다면 좋겠다. 하지만 LG팬이라고 해서 다 LG 야구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야구팬들은 야구 자체를 좋아한다. 순위보다 매일매일 재미있는 야구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구나 애국가를 부를 때 승률은 어땠나.“작년에 두 번 시구했을 때 다 이겼다. 오늘도 이겨서 ‘LG 승리의 아이콘’이 됐으면 좋겠다.”김원 기자 raspos@joongang.co.kr 2014.04.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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