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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대성불패' 14년 만에 해설위원으로 KBO리그 돌아온다

구대성(55)이 한화 이글스에서 유니폼을 벗은 뒤 14년 만에 해설위원으로 KBO리그에 돌아온다. 구대성은 2024년 SBS스포츠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새롭게 합류한다. 구대성은 KBO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출범 40주년 맞아 실시한 '레전드 40인' 투표에서 전체 8위에 선정됐다. 투수 기준으로는 선동열(1위)-최동원(2위)-송진우(5위)에 이어 4번째다. 1993년 빙그레(현 한화) 1차지명으로 입단한 구대성은 전천후 투수였다.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총 569경기에서 67승 71패 214세이브 18홀드 평균자책점 2.85를 기록했다. 1999년 한화 이글스의 우승 멤버이기도 하다. 다승왕 1회, 방어율왕 2회를 차지했다. 정규시즌(1996년)과 한국시리즈(1999년) 최우수선수(MVP)에도 한 차례씩 선정됐다. KBO리그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와 미국 메이저리그(MLB) 뉴욕 메츠에서 활약하며 한미일 야구를 모두 경험했다.특히 국제대회 활약이 눈부셨다. '일본 킬러'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완투승을 거뒀고, 4강 진출에 성공한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독특한 투구 폼도 구대성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야구를 향한 도전 정신과 열정이 강한 구대성은 호주로 건너가 감독 겸 선수로 활약했다. 지난해 1월 중순에는 호주프로야구리그(ABL) 질롱 코리아 소속으로 복귀전을 치러 1이닝 2탈삼진 무실점으로 역투했다. MLB닷컴은 구대성의 등판 소식을 전하며 "영원히 던질지도 모를 선수"라고 소개했다. 야구에 대한 애정으로 해설위원을 맡게 된 그는 "중계석에서 야구팬들을 만나게 돼 설레고 기쁘다"며 "선수였을 때도, 해설을 하게 된 지금도 같은 마음이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어느 위치에 있든지 최선을 다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멋진 해설자가 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한편 구대성과 함께 '최강야구'를 통해 입담을 선보인 이택근도 중계진에 합류했다. SBS 스포츠는 "두 해설위원의 영입으로 신선하고 다양한 색깔을 갖추게 됐다"며 "날카로운 사이다 입담을 자랑하는 베테랑 이순철 해설위원에, 뉴페이스 구대성과 이택근 해설위원의 합류로 3인 3색의 개성 있는 해설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이형석 기자 2024.01.25 10:11
프로야구

[인생2막] 야구에 미쳐 호주로 날아간 구대성, 한국서 '제3의 야구인생' 꿈꾼다

2010년, 현역 최고령 투수였던 구대성(53)은 'KBO리그에서 경쟁력을 갖춘 선수로는 더 이상 뛸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해 구대성은 7경기에 등판해서 평균자책점 9.64에 그쳤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호주였다. 이후 지금까지 14년째 호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구대성은 "내가 하고 싶은 야구를 계속하고 싶어서 이민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구대성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출범 40주년을 맞아 선정한 '레전드 40인' 투표에서 전체 8위에 뽑혔다. 투수로는 선동열·최동원·송진우에 이어 네 번째다. 1996년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하며 투수 4관왕에 올랐고,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와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KBO리그 최고의 투수가 된 그는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4년, 미국 메이저리그(MLB) 뉴욕 메츠에서 1년 활약했다. 국가대표로서 일본전에 특히 강했고, 후배들에게는 태극마크의 무게감을 심어줬다. 독특한 투구폼에서 비롯된 디셉션(투구 시 공을 숨기는 동작)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한화 시절 신인 류현진에게 서클 체인지업을 전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구. 한미일 야구를 모두 경험한 그는 2010년 가을, 호주로 날아갔다. 누구보다 선수 시절을 화려하게 보낸 '레전드'가 은퇴 후 해외에서 제2의 인생을 사는 것은 의외였다. 그로부터 벌써 14년이 흘렀다. 구대성은 "한국에서 야구 잘 되지 않았고, 선수로서 뛰기 더 힘든 것 같아 은퇴를 준비 중이었다. 그때 '호주 프로야구리그(ABL)가 창설한다'고 들었다. 마침 호주에 처제가 있어 직접 들러 둘러봤다. '선수로 계속 뛰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딸과 아들의 교육 핑계도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고 회상했다. 호주 야구대표팀은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을 8-7로 꺾었다. 그러나 리그 수준은 한국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된다. 구대성은 "호주의 야구 역사는 우리보다 길다. 한때 야구 인기도 엄청 좋았는데 어느 순간 확 식었다고 한다. 그래도 2010년 ABL 창설을 시작으로 야구의 경쟁력을 높이는 단계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시속 160㎞ 공을 던지는 등 수준 높은 투수들이 있었다. 다만 변화구에 약했다"고 돌아봤다. 구대성은 ABL 초대 구원왕에 오르며 한국 야구의 파워를 과시했다. 구대성을 시작으로 임경완과 고창성 등이 ABL에서 활약했다. 최근에는 각 구단의 신예 선수로 구성된 연합팀 질롱코리아가 ABL 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낯선 땅에 적응하기까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의 장벽이었다. 시드니 블루삭스의 홈 경기 때는 자원 봉사자 통역이 따라붙어 도움을 받았지만, 원정 경기를 다닐 때면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는 "손짓발짓 모든 것을 동원했다"고 떠올렸다. 때로는 자존심도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는 "호주 동료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밥을 사며 다가가려 했다. 선수들이 나에 대해 잘 몰라서 '메츠에서 1년간 뛰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와서 '굿 슬라이딩'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날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떠올렸다. 2005년 당시 메츠 루키 역사상 최고령(36세) 선수 빅리그에 데뷔한 구대성은 뉴욕 양키스 랜디 존스에게서 2루타를 때려낸 뒤 후속 타자의 번트 때 3루를 거쳐 홈까지 쇄도했다. 짜릿한 득점을 얻었지만 투수에게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은 치명타였다. 구대성은 이후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그 여파로 1년 만에 빅리그 도전을 마감했다.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도 견뎌야만 했다. 구대성은 "날 얕보거나 깔보면서 차별하는 선수들도 있다. 손바닥만 한 나방을 가리키며 그걸 주워 먹으라고 했다. 그래서 '네가 먹으면 내가 먹을게'라고 맞섰다. 숙일 때는 숙이되 강할 때는 강하게 싸웠다. 가끔 열 받으면 한국말로 욕했다"고 했다. 2015년까지 선수 생활을 한 구대성은 시드니 블루삭스 코치(2016~17), 질롱 코리아 감독 겸 선수(2018~19)로 활약했다. 요즘에는 무보수로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16세 이하 대표팀 선수를 지도하고, 지역 야구 꿈나무의 훈련을 돕고 있다. 구대성은 요즘도 일주일에 최소 하루는 100개 이상의 공을 던진다. 그는 "한 번도 야구가 힘들거나 지겹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야구는 늘 즐겁다"라고 했다. 구대성은 올해 질롱코리아 소속으로 3경기에 나서 2와 3분의 1피안타 0자책을 기록했다. MLB 공식 소셜미디어(SNS)도 "53세의 투수가 아직도 공을 던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구대성은 "직구 최고 시속이 130㎞(실제 최고 117㎞) 나올 거라 자신했는데 오버였다"고 웃었다. 구대성은 야구 사랑, 가족 사랑은 지극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현역 시절 휴대전화 번호를 주변에 좀처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과의 시간을 방해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선수 때는 가족들과 지낼 일이 거의 없었는데, 여기선 함께 있어서 정말 좋다"고 반겼다. 구대성은 한국 야구를 빼놓지 않고 챙겨보고 있다. 그는 "나도 '저기(한국) 서 있으면 어떨까' 생각도 한다. 아마추어든 어디든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 날아가 돕고 싶다"고 했다. 호주에서 인생 2막을 살고 있지만, 터전이 바뀌었을 뿐 그는 여전히 야구와 함께다. 구대성은 한국에서 '제3의 야구 인생'을 꿈꾸고 있다. 이형석 기자 2023.03.28 05:55
메이저리그

MLB도 주목한 '대성불패' 관록투..."53살인 KOO... 아직도 던지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도 마운드에 오른 '대성불패' 구대성(54)의 호투가 메이저리그(MLB)까지 닿았다.MLB 공식 소셜네트워크(SNS) 계정은 21일 구대성이 질롱코리아 소속으로 투구한 영상을 게시하면서 "(만)53세의 투수가 아직도 공을 던지고 있다"고 소개했다.영상 장면은 지난 19일 구대성이 호주프로야구리그(ABL) 질롱코리아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랐던 모습이다. 구대성은 당시 애들레이드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0-7로 지던 8회 말 등판해 3명의 타자를 삼자번퇴로 돌려세웠다.최고 구속은 시속 117㎞에 불과했지만, 날카로운 슬라이더와 자신있게 몸 쪽을 파고드는 자신감 있는 직구는 대성불패로 불릴 때와 그대로였다. 특히 세 번째 타자였던 라이언 재뉴어리를 상대로는 몸쪽 깊숙한 공으로 루킹 삼진까지 잡아냈다.MLB는 "53세 투수가 여전히 투구를 한다"며 "매우 놀랍다. 53세의 구대성은 여전히 타자들을 잡아내고 있다"고 치켜세웠다.1993년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했던 구대성은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이었다. 통산 569경기에서 67승71패 18홀드 214세이브, 평균자책점 2.85을 기록한 바 있다. 2001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스로 건너가 선발 투수로 변신했던 그는 2005년 뉴욕 메츠와 계약해 33경기 23이닝 평균자책점 3.91을 기록했다.화려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랜디 존슨을 상대로 투수 타석에 들어서 2루타와 희생 번트, 홈 질주까지 해냈다. 홈 득점 상황에서 부상을 입으며 MLB 커리어를 오래 잇지 못했지만, 당시 경기에서 활약으로 국내외 팬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3.01.21 18:40
프로야구

[KBO리그 40년 The moment] SK의 퍼펙트 KS 우승, '빅보이' 9G 연속 홈런

한국 프로야구가 올해로 출범 40주년을 맞이했다. 1969년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1982년 프로야구 태동을 현장에서 지켜본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프로야구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기록했다. 이 기간 여러 구단의 희비가 엇갈렸고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일간스포츠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KBO리그 역사를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① 퍼펙트 KS 우승한 SK SK가 삼성을 꺾고 2년 만이자 통산 세 번째 KS 왕좌에 올랐다. 마운드 힘과 타선 짜임새를 앞세워 시리즈 1~4차전에 모두 승리, 역대 여섯 번째 'KS 4전 전승 우승'을 달성했다. KS에서 타율 0.357(14타수 5안타) 1홈런 6타점을 기록한 박정권이 기자단 투표에서 유효 투표수 70표 중 38표를 얻어 팀 동료 박경완(32표)을 제치고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② 포수 첫 300홈런 4월 30일 인천 LG전에서 박경완(당시 SK)이 프로야구 사상 첫 포수 300홈런 금자탑을 쌓았다. 2009년 6월 21일 299홈런을 때려낸 뒤 313일 만에 손맛을 봤다. 2009시즌 왼발목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조기에 시즌을 마무리한 탓에 기록 달성이 미뤄졌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경완은 "부상 후 (기록 달성이) 오래 걸리겠다 싶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나왔다. 100호, 200호 때보다는 덜했지만, 많이 의식했다"고 말했다. ③ 9이닝 17K 잡은 괴물 류현진(당시 한화)은 5월 11일 청주 LG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9이닝 기준 역대 최다 삼진 17개를 잡아냈다. 1983년 최동원(당시 롯데 자이언츠) 1992년 선동열(당시 해태 타이거즈) 1998년 이대진(당시 해태)이 달성한 리그 기록 '9이닝 16탈삼진'을 넘어선 것. 이날 류현진은 투구 수 124개로 9이닝 5피안타 1실점 쾌투했다.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 및 매 이닝 탈삼진 기록도 함께 갈아치우며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다. ④ 1억명 돌파한 KBO리그 프로야구는 29번째 시즌, 1만3865경기 만에 누적 관중 1억명 시대를 열었다. KBO(한국야구위원회)는 1억 번째 관중을 실시간으로 집계하기 위해 입장권과 함께 바코드가 찍힌 용지를 따로 발권했다. 인천 갈산중학교 1학년생이 영예의 1억 번째 관중으로 선정, KBO로부터 전 구장 평생 입장권과 외식 상품권 등을 받았다.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첫 1억 관중 돌파로 높은 인기를 실감케 했다. ⑤ 9G 연속 홈런 빅보이 이대호(당시 롯데)가 세계 최초로 9경기 연속 홈런을 쏘아 올렸다. 8월 14일 광주 KIA에서 김희걸의 포크볼을 받아쳐 가운데 펜스를 넘겼다. 미국 메이저리그(MLB) 켄 그리피 주니어(시애틀 매리너스·1993년) 돈 매팅리(뉴욕 양키스·1987년) 대일 롱(피츠버그 파이리츠·1956년)이 기록한 '비공인 세계신기록' 8경기 연속 홈런을 넘어섰다. 이대호는 2010년 전인미답의 타격 7관왕에 올라 데뷔 10년 만에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다. ⑥ 준PO 역사 새로 쓴 두산 두산은 롯데를 상대한 준플레이오프(준PO)에서 1·2차전에 모두 패해 벼랑 끝에 몰렸다. 안방에서 당한 연패여서 충격이 더 컸다. 하지만 사직 원정에서 벌어진 3·4차전을 모두 승리해 분위기를 반전했다. 이어 5차전 승리로 리그 역사를 새롭게 썼다. 준PO에서 나온 사상 첫 리버스 스윕으로 4년 연속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롯데는 포스트시즌 홈구장 최다 11연패와 사직 구장 8연패로 고개를 숙였다. ⑦ 양준혁·구대성 은퇴 '양신' 양준혁과 ‘대성불패’ 구대성이 나란히 은퇴했다. 1993년 데뷔한 양준혁은 통산 2135경기에 출전, 타수(7332) 홈런(351) 안타(2318) 루타(3879) 2루타(458) 타점(1389) 득점(1299) 등에서 리그 최고 기록을 보유한 채 유니폼을 벗었다. 동갑내기 구대성도 1993년 데뷔해 '전설'의 길을 걸었다. 통산 성적은 67승 71패 214세이브 평균자책점 2.85. 일본 프로야구(NPB)와 MLB를 모두 경험한 최고의 '고무팔'이었다. ⑧ 광저우 AG 금메달 초호화 멤버를 자랑한 광저우 아시안게임(AG) 야구 대표팀은 5전 전승으로 2002년 부산 대회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MLB와 NPB에서 활약하던 추신수(당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김태균(당시 지바 롯데 말린스)을 비롯해 당대 최강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6년 도하 대회에서 난적 대만과 사회인야구 위주의 일본에 모두 패하며 동메달에 그친 수모를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⑨ '하늘의 별'이 된 임수혁 뇌사 상태로 10년 가까이 투병해 온 임수혁이 2월 7일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수혁은 2000년 4월 18일 잠실 LG전에서 경기 중 그라운드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한동안 뇌에 산소가 통하지 않아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다. 해마다 함께했던 선수들이 자선행사로 그를 도왔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⑩ 엔씨소프트 창단 의향서 제출 온라인 게임 전문기업인 엔씨소프트가 프로야구단 창단 의향서를 제출, 제9구단 논의가 가시화했다. KBO는 10월 창원시와 제9 구단 창단을 위한 협약식을 체결한 뒤 참여 기업을 물색했다. NC는 2011년 창단, 2013년부터 정규리그에 참여 중이다. 창단 9년 만인 2020년 첫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배중현 기자 사진=IS포토 2022.12.28 09:00
프로야구

KBO, 40주년 레전드 마지막 4인으로 '송진우·구대성·김용수·임창용' 발표

KBO(한국야구위원회)가 KBO리그 4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레전드 40인’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선발과 마무리를 넘나들며 활약한 송진우, 구대성, 김용수, 임창용이다. 송진우는 이글스에서 21시즌을 뛰면서 수많은 불멸의 기록을 작성한 명실상부한 레전드다. 1988년 빙그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1988 서울올림픽 출전을 위해 KBO 리그 진출을 미뤘을 정도로 대학 최고의 투수였다. 신인 시절부터 팀의 상황에 따라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던졌고, 1992시즌에는 19승과 25세이브 포인트(8구원승+17세이브)를 기록하며 KBO 리그 최초로 승리와 구원 부문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하는 역사를 썼다. 1994시즌까지 66승과 82세이브를 기록했던 송진우는 2005시즌까지 8번의 두 자릿수 승리 시즌을 기록했다. 특히 1999시즌에는 15승에 6세이브까지 거두며 한화의 첫 우승을 이끌었고, 이듬해인 2000시즌에는 해태를 상대로 3개의 사사구만을 허용하며 KBO 리그 10번째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당시 송진우의 나이는 34세 3개월 2일, 이는 아직까지 역대 최고령 노히트노런 기록으로 남아있다. 최고령 선발승, 구원승, 완투승, 완봉승, 홀드, 등판 등 투수 관련 각종 최고령 기록을 보유한 송진우는 KBO 리그에서 가장 많은 타자(12,708명)를 상대했고, 가장 많은 이닝(3,003이닝)을 투구했으며, 또 가장 많이 이기고 졌다(210승, 153패). 송진우는 전문가 투표에서 150표(76.92점), 팬 투표에서 441,630표(8.09점)를 얻어 총 점수 85.01로 레전드 5위에 자리했다. ‘대성불패’ 구대성은 선발과 마무리는 물론, 결정적 승부처 위주로 경기에 등판하는 전천후 투수로 활약했다.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 1996시즌에는 주로 마무리로 등판하면서도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88의 성적을 거둬 승리와 평균자책점, 승률 부문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믿기 어려운 시즌을 보내며 시즌 MVP(최우수선수)를 차지했다. 한화의 유일한 우승 시즌인 1999시즌에는 정규시즌에서 55경기에 등판, 8승 9패 26세이브를 거두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5경기에 모두 등판해 1승 1패 3세이브를 기록, 팀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로 남아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선발 등판한 구대성은 155구를 던지며 완투승을 기록했다. 한국 야구에 첫 올림픽 메달을 안겨준 이 경기는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투 중 하나로 꼽힌다. 구대성은 전문가 투표에서 141표(72.31점), 팬 투표에서 493,913표(9.04점)를 얻어 총 점수 81.35로 레전드 순위 8위에 자리했다. 김용수는 소나무처럼 한결같이 팀을 지켜온 모습으로 ‘노송’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LG 프랜차이즈 스타 투수다. KBO리그 최초 투수 500경기, 600경기 출장을 오로지 한 팀 유니폼만 입고 달성했다. 커리어 말미까지도 호투해 역대 최고령 다승왕을 달성했고 최고령 1,000탈삼진도 기록했다. 김용수의 커리어를 축약해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은 KBO 리그 역대 최초이자 단 둘뿐인 100승-200세이브다. 김용수는 LG가 우승을 차지한 1990시즌에는 선발투수로 2승, 1994시즌에는 마무리 투수로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LG의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 때 모두 MVP를 차지해 LG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로 남아있다. 김용수는 팀에 헌신한 노고를 인정받아 1999시즌 리그 최초로 현역 생활 중 영구결번 선수가 됐다. LG의 첫 영구결번 선수 김용수는 전문가 투표에서 116표(59.49점,) 팬 투표에서 537,467표(9.84점)를 획득, 총 점수 69.33을 기록해 16위에 올랐다. 임창용은 사이드암 투수로 시속 150km를 뛰어넘는 빠른 패스트볼을 앞세워 KBO 리그 통산 760경기에 출장해 130승 86패, 258세이브, 평균자책점 3.45를 기록했다. 임창용은 전문가 투표에서 112표(57.44점), 팬 투표 468,798표(8.58점), 총 점수 66.02로 21위에 자리했다. 임창용은 지난 7월 말 상습도박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레전드 40인 선정’과 관련,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이미 팬 투표와 전문가 평가가 완료된 이후였으며, 선수의 굴곡 또한 야구 역사의 일부이기에 순위와 평가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김용수에 대한 시상은 10월 3일 잠실 KIA와 LG의 경기에서 열릴 예정이며, 그 외 선수에 대한 시상 일정은 미정이다. KBO는 근소한 투표수 차이로 아깝게 레전드 40인에 선정되진 못했지만, KBO 리그에서 큰 활약을 펼치고 추억을 선사한 41위~50위 선수들도 추후 공개할 예정이다. 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2.09.19 15:37
야구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⑩] '끝판왕' 오승환

'뱀직구' 임창용도, '노송' 김용수도 아니었다. 일간스포츠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불펜 최다 득표 선수는 '돌부처' 오승환(40·삼성 라이온즈)이었다. 오승환은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32표를 받아 '대성불패' 구대성(19표)과 함께 최고 불펜으로 선정됐다. 현역 선수 중에서 40주년 올스타로 선정된 건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선발) 양의지(NC 다이노스·포수) 최정(SSG 랜더스·3루수) 그리고 오승환까지 4명뿐이다. 경기고 재학 시절에는 평범했다. 투수가 아닌 외야수였던 오승환은 부상에 발목이 잡혀 신인 드래프트에서 외면받았다. 단국대에 진학한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1학년 때 오른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토미존서저리)을 받았다. 힘겨운 재활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강해졌다. 투수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이때였다. 본격적으로 공을 던진 3학년 가을부터 가공할만한 강속구를 스피드건에 찍었다. 그 결과 2005년 드래프트에서 2차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오승환은 데뷔 첫해부터 기라성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즌 초반 불펜의 핵으로 활약하더니 7월에는 마무리 투수 자리까지 꿰찼다. 사이드암스로 권오준과 함께 이른바 'KO 펀치'로 불리며 삼성의 뒷문을 책임졌다. 그해 거둔 성적이 10승 1패 11홀드 16세이브 평균자책점 1.18.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에서 신인이 '10승-10홀드-10세이브'를 기록한 건 오승환이 처음이었다. 한국시리즈에선 3경기 등판, 7이닝 11탈삼진 무실점 쾌투로 스타 탄생을 알렸다. 최우수선수(MVP) 투표에서 손민한에 이은 2위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신인왕 투표에서 총투표 88표 가운데 85표의 몰표를 받았다. 프로 2년 차인 2006년엔 무려 47세이브를 따냈다. 진필중이 보유한 리그 한 시즌 최다 세이브(42개)와 일본 프로야구(NPB) 이와세 히토키(46개)가 가지고 있던 단일시즌 아시아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2007년에는 180경기 만에 통산 100세이브 고지를 밟아 리그 최단 경기 세 자릿수 세이브(종전 조용준·197경기)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007년과 2008년에도 각각 40세이브와 39세이브로 견고함이 대단했다.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09년 7월 어깨 근육 일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이 영향으로 두 시즌 동안 고전했다. 하지만 2011년 화려하게 비상했다. 47세이브 평균자책점 0.63으로 철옹성 그 자체였다. 한국시리즈에서도 3세이브 평균자책점 '0'으로 '끝판왕'의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KBO리그를 평정한 오승환은 2013년 11월 NPB 한신 타이거스와 계약했다. "과연 통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14년 7월 한·일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했고 그해 39세이브로 한국인 최다 세이브 기록(종전 1997년 선동열·38세이브)과 함께 센트럴리그 세이브왕에 올랐다. 이듬해에도 공동 세이브왕(41세이브)에 오르면서 일본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NPB 두 시즌 동안 거둔 성적이 80세이브 평균자책점 2.25였다. 오승환은 2016년 1월 새로운 도전을 선택, 미국 메이저리그(MLB)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유니폼을 입었다. 3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연속이었지만 4년 동안 세 팀에서 활약했다. MLB 통산 232경기에 등판, 45홀드 42세이브를 쌓았다. 2019년 8월 삼성 복귀를 선택한 그는 여전히 팀의 뒷문을 책임지고 있다. 지난 시즌에는 2013년 손승락(당시 넥센·만 31세)이 보유하고 있던 리그 최고령 40세이브 기록까지 갈이 치웠다. 4월에는 KBO리그 사상 첫 300세이브 고지를 정복, 개인 통산 6번째 세이브왕 타이틀을 가져갔다. 불혹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오히려 경험을 더해 롱런하고 있다. 허삼영 삼성 감독은 "오승환의 강점은 준비 과정이 아닐까 싶다. 마흔 살 나이에도 가장 빨리 (야구장에) 나와 운동하면서 루틴을 꾸준히 지킨다"며 "기복 없는 경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준비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 (훈련을) 빠지는 날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오승환을 향한 극찬은 선·후배를 가리지 않는다. 이동욱 NC 감독은 구대성과 함께 오승환을 "감독 입장에서 언제든 믿고 투입할 수 있는 투수"라고 했다. 최태원 삼성 코치는 "오승환이 마운드에 오르면 경기에 졌다고 어겼을 정도"라고 떠올렸다. 서용빈 KT 위즈 2군 감독은 "역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고 촌평했고 조원우 SSG 랜더스 코치도 "독보적인 마무리 투수"라고 설명했다. KBO리그 역사를 얘기할 때 오승환을 빠트릴 수 없다. KBO리그, NPB, MLB를 두루 경험한 마무리 투수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현역 레전드인 그가 40주년 올스타로 선정된 이유다. 키움 히어로즈 김혜성은 "(오승환 선배는) 각종 세이브 기록을 갈아치운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2.01.27 06:00
야구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⑨] '대성불패' 구대성

등판하면 지지 않는다. 이름 뒤에 불패(不敗)가 붙었던 선수, ‘대성불패’ 구대성(53)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불펜 투수 부문에 선정됐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오승환(32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총 19표를 얻었다. 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은 "언제든지 믿고 투입할 수 있는 투수"라고 했다. 이대진 SSG 랜더스 투수코치는 "불펜 투수는 10번 중 7~8번은 성공해야 한다. 구대성은 그에 가장 가까운 투수"라고 했다. NC 이용찬은 "구대성 선배님은 던지는게 참 시원시원했다"고 했다. KT 위즈 소형준은 "오승환 선배님 다음으로 임팩트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전했다. 구대성은 고교 시절부터 담대한 배짱으로 주목 받았다. 대전고 2학년 시절이던 1987년 연습 경기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선발로 올라왔던 그는 1회 초부터 3연속 볼넷으로 무사 만루를 허용했다. 이병기 당시 대전고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오자 그는 “절 테스트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결론은 3연속 탈삼진 무실점. 배짱 테스트는 성공이었다. 그해 대전고는 청룡기에서 창단 첫 전국대회 우승을 거뒀다. 한양대 진학 후 그는 1990년 국제야구연맹(IBA) 대회 최우수선수(MVP), 1991년 대륙간 컵대회 최고 투수상, 1992년 대통령배 최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구대성에게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는 계약금 1억 2000만원을 선사했다. 프로 시작부터 ‘불패’는 아니었다. 고교-대학 때 너무 많이 던져 어깨에 탈이 났다. 시속 140㎞대 후반을 기록했던 구속이 130㎞대까지 떨어졌다. 2년 차 때부터 꽃을 피웠다. 마무리를 맡으며 34경기(선발 9경기)에 등판해 7승 8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60으로 활약했다. 이듬해에도 47경기(선발 12경기) 4승 1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54를 기록했다. 완투도 6번이나 기록했지만, 승운이 따르지 않아 다패왕에 올랐다. 긴 이닝을 던지고 선발까지 겸하는 이른바 ‘중무리’였지만 묵묵히 맡은 바를 해냈다. 동시대를 뛰었던 조원우 SSG 코치는 "선발과 마무리를 전부 잘했다. 전성기 구위가 최고였다"고 전했다. 1996년, 드디어 불패의 수호신이 됐다. 55경기에 등판해 55경기 139이닝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88 탈삼진 183개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다승 공동 1위, 세이브 2위, 승률 1위, 탈삼진 3위를 기록했고, 규정 이닝을 채워 평균자책점 1위까지 독차지했다. 당시 수상 기준이던 세이브 포인트(구원승+세이브) 40개로 구원왕까지 오르며 4관왕에 올랐다. 정규시즌 MVP와 투수 골든글러브도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대성불패라는 별명도 탄생했다. 구대성을 불패의 투수로 만든 건 투구폼, 그리고 배짱이었다. 그는 타자에게 등을 보인 채 와인드업하는 토네이도 폼으로 타자와 주자를 위협했다. 등뒤에서 빠르게 공을 뿌려 구종을 숨기는 디셉션(Deception)의 달인이었다. 무엇보다 강한 멘털이 구대성의 최고 결정구였다. 강속구가 사라진 후에도 자신있게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었다. 김종국 KIA 타이거즈 감독은 "구대성 선배처럼 배짱 있는 투구를 하는 투수를 본 적 없다"고 했고, KT 위즈 박경수는 "구대성 선배님의 릴리스 포인트가 보이지 않았다. 우타자 몸쪽과 바깥쪽 제구도 자유자재로 하셨다. 너무 까다로웠다"고 떠올렸다. 구대성의 공은 큰 무대로 갈수록 빛났다. 한화의 첫 우승을 이끈 것도 구대성이었다. 1999년 한국시리즈 5경기에 모두 등판해 1승 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0.93으로 뒷문을 걸어 잠그고 시리즈 MVP가 됐다. 김인식 전 감독은 "리그뿐 아니라 국제대회에서 활약이 돋보였다"고 했다. 국제대회에서는 역사상 최강의 일본 킬러로 통했다. 대학 시절 1989년 대륙간 컵에서 후일 메이저리그(MLB) 123승에 빛나는 노모 히데오와 맞대결에서 18탈삼진 완투하며 명투수전을 펼쳤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3·4위전에서 마무리가 아닌 선발로 등판, 155구를 던지며 9이닝 5피안타 1실점 완투승으로 동메달을 한국에 안겼다. KBO리그를 평정한 구대성은 2001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스와 계약했다. 첫해 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7승 9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4.06을 기록했다. 이어 2년 차 5승 7패 평균자책점 2.52로 퍼시픽리그 평균자책점 2위로 활약했다. 2004년까지 오릭스에서 뛴 그는 2005년 도전의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MLB 뉴욕 메츠와 계약해 33경기 23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3.91 6홀드를 기록했다. 투수가 아닌 타자로 이야기를 남겼다. 5월 22일 뉴욕 양키스전 타석에 들어서 당대 최고 투수 랜디 존슨의 직구를 통타해 2루타를 쳤다. 공격적인 주루로 결승득점까지 기록했지만, 주루 때 어깨를 다쳤다. 결국 그해 9월 지명할당(DFA) 처리되어 미국 생활을 마무리했다. 2006년 귀국한 구대성은 한화의 수호신으로 복귀했다. 평균자책점 1.82 37세이브(리그 2위)를 거두며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이끌었다. 이어 2007년에도 26세이브를 기록했다. KBO리그 역대 최초로 7년 연속 20세이브, 최연소·최소 경기 200세이브를 남겼다. 그러나 영원히 불패는 아니었다. 2008년 마무리에서 물러나며 이후 커리어에서 단 1세이브에 그쳤다. 2010년 한화 유니폼을 벗었지만, 그의 야구가 끝난 건 아니었다. 그해 11월 호주 프로야구(ABL) 시드니 블루삭스와 계약했다. ABL 통산 6시즌을 뛰고 평균자책점 2.13, 구원왕 3번을 받고서야 24시즌, 4개국에 걸쳐 이어갔던 수호신의 역사를 마무리했다. 차승윤 기자 cha.seunyoon.joongang.co.kr 2022.01.25 07:36
생활/문화

네오위즈, 슬러거에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업데이트

네오위즈는 온라인 야구 게임 ‘슬러거’가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을 업데이트했다고 7일 밝혔다. 현재 빅리그에서 활동 중인 류현진이 슬러거 내 최고 등급인 ‘해외파’ 등급으로 출시됐다. 류현진의 월드 구질인 ‘R.커브’ 장착과 함께 기존 ‘R.체인지업’도 개선됐다. 류현진 업데이트와 함께 슬러거 겨울축제 ‘2020 피에스타’도 이어진다. 자신의 구단을 강화시킬 수 있는 ‘벌크업 V2’ 이벤트가 2월 9일까지 진행되며, 누적 경기 진행 수에 따라 ‘피에스타 티켓’을 포함 ‘레전드 드래프트권’, ‘500만 캣 교환권’ 등 구단 육성에 필요한 아이템들을 획득할 수 있다. 오는 22일부터는 설날 이벤트가 진행된다. 게임에 접속만 해도 ‘대성불패 드래프트권’, ‘코리아특급 드래프트권’ 등 보상이 주어지고, 2월 9일까지 경기를 진행하면 매일 다른 아이템이 추가 제공된다. 설 연휴기간에 맞춰 랜덤 아이템이 들어있는 복주머니를 증정하며, 선수 육성 경험치/포인트 교환소 3배 버프 타임도 진행된다. 슬러거 서비스 13주년을 맞아 기념 주화를 사용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이벤트도 내달 4일부터 진행된다. 권오용 기자 kwon.ohyong@joongang.co.kr 2020.01.07 16:46
야구

구대성, 9회초 깜짝 등판 "팬서비스 차원, 오랜만에 던져 힘들었다"

올해 만 50세인 '대성불패' 구대성이 실전에 깜짝 등판,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호주프로야구리그(ABL)의 한국인 팀 질롱 코리아의 감독 구대성은 지난 19일 호주 질롱 베이스볼센터에서 열린 2018~2019 ABL 브리즈번과 홈경기에서 2-9로 끌려가던 9회초 팀의 세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1이닝 동안 안타와 볼넷 1개씩을 줬지만, 점수를 주지 않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공 17개를 던져 10개를 스트라이크로 꽂았다.질롱 코리아는 2-9로 져 7승32패로 ABL 남서부 지구 최하위를 면치 못했지만,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 승패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구대성이 '지천명'에 이르러서도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질롱 코리아는 "구대성 감독이 9회초에 등판해 1이닝을 실점 없이 막았다"며 "특유의 투구 동작은 여전했고, 야구팬들은 구 감독의 이름을 연호했다"고 소개했다.이어 "구속은 예전만 못했지만 제구력은 완벽했고, 직구로만 타자들을 압도했다. 변화구는 3개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질롱 코리아가 유튜브에 올린 구대성의 영상을 보면, 구대성은 공수 교대 때 심판에게 투수 교체를 알리고 자신이 등판한다고 통보했다.감독으로 착용하던 보호 헬멧과 점퍼를 벗어던진 그는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운드에 오르던 '대성불패' 전성기로 돌아갔다.우리나라 팬들은 구대성의 이름을 딴 'DK(Daesung Koo)'를 연호했다.구대성은 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에 들어오면서 환하게 웃으며 "힘들다"를 연발했다. 스파이크를 벗으면서 선수들에게 "이제 더는 못 던지겠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한참 어린 후배들은 손뼉을 치며 노익장을 뽐낸 구 감독을 열렬히 응원했다.구대성은 질롱 코리아와 인터뷰에서 "오랜만에 (공을) 던져 힘들었다"며 "역시 나이를 먹어 던지면 안 된다는 점을 느꼈다"고 했다.그러면서 "팬서비스 차원이었고, 이제 더는 (실전에서 공을) 던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안희수 기자 2019.01.21 06:00
야구

한화 준PO 1·2차전, 1999년 우승 이끈 이희수 감독·구대성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한화가 영광 재현의 각오를 다지는 준플레이오프(준PO) 특별 시구를 마련했다.한화는 19~20일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열리는 넥센과의 준PO 1·2차전 시구자로 이희수 전 감독과 구대성을 각각 선정했다. 구단은 "11년 만에 진출한 포스트시즌에서 선전을 다짐하고, 과거 영광 재현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상징적인 인사들로 시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한화는 팀 역사상 딱 한 차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바로 1999년이다. 당시 사령탑이 이희수 감독이다. 한화는 1999년 강력한 선발과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이끌며 첫 우승을 경험했다. 구단은 "선수단은 당시를 회상할 때 최고의 벤치분위기였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이희수 전 감독은 격의 없는 리더십을 발휘한 바 있다"고 전했다.20일 시구자로는 한화의 영원한 레전드 ‘대성불패’ 구대성 호주 질롱코리아 감독이 나선다. 1993년 빙그레 1차지명으로 입단한 구대성은 해외 무대에서 뛴 시즌을 제외하고 KBO 리그에선 2010년까지 줄곧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MVP를 수상했다. 한화 소속으로 통산 569경기에서 67승71패 214세이브 18홀드 평균자책점 2.85를 기록했다.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와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 등 해외 경력은 물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국제대회에서의 활약으로 국민적 응원을 얻기도 했다.한화는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도 1999년 당시 보여줬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통해 경기장을 찾아주시는 팬들의 성원에 보답해 나갈 방침이다"고 밝혔다. 2018.10.1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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