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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독일 무명 수비수 고젠스, 자신을 모욕한 호날두 지워버렸다

‘전차 군단’ 독일이 ‘디펜딩 챔피언’ 포르투갈을 꺾고 2020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20)에서 첫 승을 거뒀다. 독일은 독일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유로2020 F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포르투갈을 4-2로 물리쳤다. 1차전에서 프랑스에 0-1로 진 독일(승점 3)은 조 2위로 올라섰다. 포르투갈은 독일과 승점이 같지만, 대회 규정인 승자 승 원칙에 따라 3위로 밀렸다. 경기 초반은 포르투갈의 수퍼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6·유벤투스) 독무대였다. 호날두는 전반 15분 역습 상황에서 디오구 조타(25·리버풀)의 패스를 받아 왼발 슈팅으로 선제골을 터뜨렸다. 포르투갈 골문에서 상대 페널티박스까지 불과 12초 만에 주파한 호날두의 스피드가 돋보였다. 대회 3호 골. 호날두는 자신의 이 대회 통산 최다 골 기록을 12골로 늘렸다. 국가대표 경기(A매치) 개인 통산 107호 골로 역대 최다 골 기록 보유자인 이란의 알리 다에이(109골)에 두 골 차로 따라붙었다. 호날두의 ‘독일 징크스’도 깨질 것 같았다. 호날두는 메이저 대회에서 독일을 네 차례 만나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경기 전날 호날두는 세계 최초로 인스타그램 팔로워 3억명을 돌파했다. 만약 이날 이겼다면 호날두 인생에서 여러 가지로 기억될 만한 날이었다. 호날두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든 건 독일의 신예 수비수 로빈 고젠스(26·아탈란타)였다. 고젠스는 독일이 0-1로 뒤진 전반 35분 상대 자책골을 유도했다. 그는 페널티박스로 쇄도하던 동료 카이하베르츠(22·첼시)를 향해 왼발로 강하게 공을 패스했다. 공은 포르투갈 후벵 디아스(24·맨체스터시티) 발에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패스가 워낙 빨라 디아스가 어찌할 수 없었다. 포르투갈 수비진은 당황했다. 결국 4분 뒤 포르투갈 하파엘 게헤이루(28·도르트문트)가 또 자책골을 기록했다. 고젠스는 독일이 2-1로 앞선 후반 6분 대회 첫 도움을 기록했다. 왼쪽에서 크로스를 올렸는데, 골 지역으로 쇄도하던 하베르츠가 오른발을 갖다 대 골망을 흔들었다. 3-1로 앞선 후반 15분 고젠스는 요슈아 키미히(26·바이에른 뮌헨)가 크로스한 공을 헤딩슛으로 마무리해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독일의 4골 중 3골에 관여한 고젠스는 후반 27분 교체돼 유유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고젠스는 스타 군단 독일 대표팀에서도 낯선 이름이다. 지난해 처음 국가대표가 됐고, 이번 대회 전까지 A매치 출전이 7경기뿐이다. 자국 팬도 별로 듣지 못했던 이름이다. 하지만 고젠스는 2020~21시즌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32경기에 출전해 11골·6도움을 기록할 만큼 공격을 잘하는 수비수다. 전문 스트라이커를 뽑지 않은 요아힘 뢰브(61) 독일 감독은 그를 과감하게 뽑았다. 경기가 끝난 뒤 독일 언론은 고젠스를 소개하기 바빴다. 빌트는 “고젠스는 누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성장 과정을 자세히 다뤘다. 슈포르트1은 “독일의 새로운 영웅”이라고 집중 조명했다. 사실 고젠스는 과거 호날두로부터 굴욕을 당한 일이 있다. 고젠스 소속팀 아탈란타는 2018~19시즌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호날두의 유벤투스와 맞붙었다. 아탈란타가 3-0으로 이겼다. 경기가 끝난 뒤 고젠스는 자신의 롤 모델로 생각했던 호날두에게 유니폼 교환을 요청했다. 하지만 호날두는 단칼에 “노(No)”라고 거절했다. 고젠스는 자서전에서 “호날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져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자서전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팀 동료들은 호날두 유니폼을 주문해 고젠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고젠스는 “이번에는 호날두에게 유니폼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온전히 승리의 기쁨을 즐겼다”고 말했다. 독일 빌트는 “고젠스가 호날두를 그라운드에서 지웠다”고 썼다. 뢰브 감독은 “고젠스는 공격 본능이 뛰어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2021.06.21 08:08
스포츠일반

[창간 50 특별기획]한국스포츠 50년, 슈퍼스타 50인, 환희의 50신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 <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89~1999 :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 희망을 안긴 영웅>19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실의와 고통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안긴 스포츠 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가 곧 희망이자 위로였다. -박찬호(야구)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는 IMF 위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긴 영웅이었다.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7년 1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1998년 15승을 수확하며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2000년 18승을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아시아 최다승이다. 또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동메달 등을 이끌며 야구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세리(골프)IMF 위기의 시절 국민들을 위로했던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박세리다.미국 LPGA 개척자.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들었고, 데뷔 4개월 만에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US오픈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특히 US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한 장면은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박세리의 모습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LPGA 25승으로 한국인 최다 우승자 역시 박세리다. -황영조(마라톤)'몬주익의 영웅'의 등장으로 한국 육상은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다.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뒤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힘차게 들고 골인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육상 첫 올림픽 금메달.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금메달 이후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이후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다시 한 번 포효했고, 1994년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인 2분8초09를 기록했다. -심권호(레슬링)심권호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다.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건 뒤 1995년 프라하세계선수권,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48kg급이 폐지되자 54kg급으로 체중을 늘려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1998년 예블레세계선수권·1998년 방콕아시안게임·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금메달을 일궈냈다. 하계올림픽 최초 올림픽 2연패,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두 체급 석권 그리고 세계 레승링 최초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기영(유도)한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는 유도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전기영이다.유도 천재, 업어치기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가한 1993년 해밀턴세계선수권 78kg급에서 우승했다. 한국 역대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는 86kg급에 도전해 금메달을 차지, 두 체급을 석권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1회전을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이기며 정상에 섰다. 1997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도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박주봉(배드민턴)배드민턴의 교과서 박주봉.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전설이었다.1980년 17세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고, 1982년 덴마크오픈에서 이근구와 한 조로 역대 최연소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19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 우승·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19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 금메달·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1991년 코펜하겐세계선수권 1위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년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했다. -전이경(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유일한 선수, 전이경이다. 그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1988년 1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어 1995년 요빅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1996년 헤이그, 1997년 나가노까지 개인종합 3연패를 일궈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도 1000m와 3000m 계주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최초로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품었다. -허재(농구)농구대통령이 당선됐다. 농구 9단이라 불리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 허재다.중앙대 1학년 시절 농구대잔치에 나서 평균 24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자 기아 왕조가 구축됐다. 기아의 에이스로 농구대잔치 5연패 등 7회 우승을 일궈냈다. 3번 MVP를 수상했고, 베스트 5에 6회 포함됐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세계선수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넣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홍명보(축구)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그는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품었다. 이후 일본 J리그에서 진출하며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한국 대표팀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홍명보는 A매치 136경기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씨름)이만기를 1인자에서 내려앉히고 새로운 1인자로 등극한 괴물, 강호동이다.이만기의 은퇴는 곧 강호동이라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과 연결된다. 1989년 일양약품에 입단한 20세 강호동은 첫 백두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4강에서 이만기와 첫 공식전에서 맞붙어 2-0으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990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천하장사에 올라섰다. 이후 백두장사 7회, 천하장사 5회를 차지했다. 최단기간 천하장하 5회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이 은퇴하자 씨름의 황금기도 끝났다. <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2009~2019 : 동계스포츠의 비상 그리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과거 한국의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종목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연아(피겨)한국 동계스포츠의 역사는 김연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김연아가 나온 건 기적이다.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피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하이라이트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김연아는 쇼트 78.50점, 프리 150.06점 총합 228.56점으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 선수권·그랑프리 파이널 등을 모두 제패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기록됐다. 11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상화(스피드스케이팅)'빙속여제' 이상화를 빼놓고 한국 동계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2010년 밴쿠버올림픽 여자 500m에서 76초09로 우승, 한국 여자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74초70, 올림픽 신기록으로 2연패에 성공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메달을 딴 선수로 남았다.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나온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성빈(스켈레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딴 주인공, 윤성빈이다.한국 스켈레톤의 간판인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1∼4차 레이스에서 무려 3차례나 트랙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1∼4차 합계 3분20초55로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과 아시아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켈레톤 불모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윤성빈. 그의 헬멧에 그려진 아이언맨처럼 그는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 -양학선(체조)한국 체조의 새로운 역사, 도마의 신이 창조했다. 양학선이다.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양학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구에서 단 한 명만 할 수 있는 최고난위도 기술 '양학선'을 앞세워 도마 금메달을 차지했다. 16.533점. 압도적 우승이었다. 한국 체조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2013년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황경선(태권도)태권도 종주국 한국. 수많은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섰다. 그중 가장 많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는 '태권여제' 황경선이다.18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67kg에 나서 동메달을 차지한 그는 2005년 마드리드세계선수권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그리고 2007년 베이징세계선수권까지 재패한다. 남은 건 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진출을 일궈냈다. -박인비(골프)미국 LPGA에는 한국 여성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 최선봉에 자리를 잡은 스타, 박인비다.골프 여제의 2008년 US오픈 우승.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US오픈 총 2회 우승 등 메이저대회에서 7회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고 기록이다. LPGA 통산 19승으로 박세리에 이은 2위다. 56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고, 4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아시아 최초로 달성하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인비 품에 안겼다. -정현(테니스)2018년 1월, 한국에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정현이 일으켰다.정현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2018년 호주오픈 1~3라운드에서 미샤 즈베레프·다닐 메드베데프·알렉산더 즈베레프를 연이어 꺾으며 기대를 받았다. 16강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노박 조코비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 한국에 정현 신드롬이 일어났다.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마저 넘으며 4강에 올라섰다. 4강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김연경(배구)한국 여자배구에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는 없었다. 김연경이다.흥국생명에 입단한 2005년. 득점상·공격상·서브상·신인왕·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한다.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인 지 알 수 있는 기록. 이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2009년 일본 JT마베라스 유니폼을 입은 뒤 2011년 터키 페네르바체로 이적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다. 가는 팀마다 우승으로 이끌면서 가치는 올라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배구대표팀에서도 기둥이었다. -류현진(야구)21세기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류현진이다.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자마자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한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가 됐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한 첫해 14승 올리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후 꾸준함을 보이다 2019년 평균자책점 전체 1위를 기록,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등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야구대표팀 역사와도 함께 했다. -손흥민(축구)지금 한국 축구는 '손흥민의 시대'다.2010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레버쿠젠을 지나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세계 톱클래스 공격수로 거듭났다. 특히 2018~20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우승후보 맨체스터 시티를 침몰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손흥민을 앞세운 토트넘은 최초로 결승에 올랐다. 축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주인공.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2019.09.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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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민, 아시안컵서 벤투의 비밀무기 도전

-문선민은 올해 초만 해도 K리그 2년 차의 무명 선수... -문선민은 도 처음 A대표팀에 발탁돼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이후엔 소속팀 인천의 간판 공격수로 뛰면서 K리그의 국내 선수 중 가장 많은 14골을 터뜨렸음-감스트 세리머니를 펼치는가 하면, 저동적인 스피드 넘치는 플레이로 팬들 매료-아시안컵 출전이 목표인 그는 이번 전지훈련에서 벤투 감독의 마음을 훔칠 예정"아시안컵에서 골을 넣는다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세리머니 펼칠 겁니다." 축구대표팀 측면 공격수 문선민(인천)은 지난달 20일 3-0으로 앞선 우즈베키스탄과의 호주 원정 평가전 후반 24분, 바깥에서 안쪽으로 휘어들가는 환상적인 왼발 슈팅으로 오른쪽 골망을 갈랐다. 팬들은 비현실적인 궤적을 그리며 득점이 됐다고 해서 '미확인비행물체(UFO) 골'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작 그는 골을 넣고도 놀란 나머지 제대로 기뻐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안들어가는 줄 알았다"며 세리머니를 잊은 이유를 밝혔다. 13일 울산종합운동장에서 만난 문선민은 "아시안컵에서 득점을 하면 K리그 홍보대사인 BJ 감스트와 약속한대로 '관제탑(팔짱을 낀 채 바닥을 뛰며 팔을 뻗쳤다 오므리는 동작) 댄스' 세리머니를 하겠다. 잊지 않고 무조건 하겠다"라며 웃었다. 파울루 벤투(포르투갈)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11일부터 울산에서 아시아 리그 선수 위주로 소집해 내년 1월 아랍에미리트(UAE) 아시안컵을 준비 중이다. 문선민은 2018년 한국 축구의 '깜짝 스타'다. 올해 초만 해도 K리그 2년 차의 무명 선수였던 그는 지난 5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첫 A매치 온두라스전에서 데뷔골까지 넣은 데 이어 러시아월드컵에 출전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고 약점도 극복했다. 러시아월드컵 당시 멕시코와 2차전, 독일과 3차전에 출전한 문선민은 당시 상대 수비수를 제치는 드리블을 하다 슛 타이밍을 번번이 놓쳐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런 지적을 받아들이고 노력한 그는 소속팀 복귀 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문선민은 인천의 간판 공격수로 뛰면서 K리그의 국내 선수 중 가장 많은 14골(6도움)을 터뜨렸다. 지난 1일 전남 드래곤즈와 리그 최종전에서는 인천의 1부리그 잔류를 확정 짓는 골까지 넣었다. 2018.12.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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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 조커’ 문선민, 아시안컵서 벤투의 비밀무기 도전

-문선민은 올해 초만 해도 K리그 2년 차의 무명 선수-문선민은 도 처음 A대표팀에 발탁돼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이후엔 소속팀 인천의 간판 공격수로 뛰면서 K리그의 국내 선수 중 가장 많은 14골을 터뜨렸음-감스트 세리머니를 펼치는가 하면, 저동적인 스피드 넘치는 플레이로 팬들 매료-아시안컵 출전이 목표인 그는 이번 전지훈련에서 벤투 감독의 마음을 훔칠 예정"아시안컵에서 골을 넣는다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세리머니 펼칠 겁니다."축구대표팀 측면 공격수 문선민(인천)은 지난달 20일 3-0으로 앞선 우즈베키스탄과의 호주 원정 평가전 후반 24분, 바깥에서 안쪽으로 휘어들가는 환상적인 왼발 슈팅으로 오른쪽 골망을 갈랐다. 팬들은 비현실적인 궤적을 그리며 득점이 됐다고 해서 '미확인비행물체(UFO) 골'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작 그는 골을 넣고도 놀란 나머지 제대로 기뻐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안들어가는 줄 알았다"며 세리머니를 잊은 이유를 밝혔다. 13일 울산종합운동장에서 만난 문선민은 "아시안컵에서 득점을 하면 K리그 홍보대사인 BJ 감스트와 약속한대로 '관제탑(팔짱을 낀 채 바닥을 뛰며 팔을 뻗쳤다 오므리는 동작) 댄스' 세리머니를 하겠다. 잊지 않고 무조건 하겠다"라며 웃었다. 파울루 벤투(포르투갈)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11일부터 울산에서 아시아 리그 선수 위주로 소집해 내년 1월 아랍에미리트(UAE) 아시안컵을 준비 중이다. 문선민은 2018년 한국 축구의 '깜짝 스타'다. 올해 초만 해도 K리그 2년 차의 무명 선수였던 그는 지난 5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첫 A매치 온두라스전에서 데뷔골까지 넣은 데 이어 러시아월드컵에 출전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고 약점도 극복했다. 러시아월드컵 당시 멕시코와 2차전, 독일과 3차전에 출전한 문선민은 당시 상대 수비수를 제치는 드리블을 하다 슛 타이밍을 번번이 놓쳐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런 지적을 받아들이고 노력한 그는 소속팀 복귀 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문선민은 인천의 간판 공격수로 뛰면서 K리그의 국내 선수 중 가장 많은 14골(6도움)을 터뜨렸다. 지난 1일 전남 드래곤즈와 리그 최종전에서는 인천의 1부리그 잔류를 확정 짓는 골까지 넣었다. 2018.12.1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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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민, “아시안컵서 ‘관제탑’ 세리머니 잊지 않겠다”

지난 9월 문선민이 국가대표 친선 칠레전 훈련을 앞두고 기자회견에 응하고 있다."아시안컵에서 골을 넣는다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세리머니 펼칠 겁니다."축구대표팀 측면 공격수 문선민(인천)은 지난달 20일 3-0으로 앞선 우즈베키스탄과의 호주 원정 평가전 후반 24분, 바깥에서 안쪽으로 휘어들가는 환상적인 왼발 슈팅으로 오른쪽 골망을 갈랐다. 팬들은 비현실적인 궤적을 그리며 득점이 됐다고 해서 '미확인비행물체(UFO) 골'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작 그는 골을 넣고도 놀란 나머지 제대로 기뻐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안들어가는 줄 알았다"며 세리머니를 잊은 이유를 밝혔다. 13일 울산종합운동장에서 만난 문선민은 "아시안컵에서 득점을 하면 K리그 홍보대사인 BJ 감스트와 약속한대로 '관제탑(팔짱을 낀 채 바닥을 뛰며 팔을 뻗쳤다 오므리는 동작) 댄스' 세리머니를 하겠다. 잊지 않고 무조건 하겠다"라며 웃었다. 파울루 벤투(포르투갈)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11일부터 울산에서 아시아 리그 선수 위주로 소집해 내년 1월 아랍에미리트(UAE) 아시안컵을 준비 중이다. 문선민은 2018년 한국 축구의 '깜짝 스타'다. 올해 초만 해도 K리그 2년 차의 무명 선수였던 그는 지난 5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첫 A매치 온두라스전에서 데뷔골까지 넣은 데 이어 러시아월드컵에 출전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고 약점도 극복했다. 러시아월드컵 당시 멕시코와 2차전, 독일과 3차전에 출전한 문선민은 당시 상대 수비수를 제치는 드리블을 하다 슛 타이밍을 번번이 놓쳐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런 지적을 받아들이고 노력한 그는 소속팀 복귀 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문선민은 인천의 간판 공격수로 뛰면서 K리그의 국내 선수 중 가장 많은 14골(6도움)을 터뜨렸다. 지난 1일 전남 드래곤즈와 리그 최종전에서는 인천의 1부리그 잔류를 확정 짓는 골까지 넣었다. 문선민은 벤투호의 '특급 조커'를 굳혔다. 그는 벤투 감독이 부임한 지난 9월 이후 치른 6차례 A매치에서 5차례(선발 1회)나 조커로 출전했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주무기로 한 측면 돌파가 공격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평가다. 우즈벡전에선 득점까지 성공하며 벤투 감독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문선민은 "벤투 감독님은 내가 리그에서 골을 넣을 때 보여준 빠른 발을 앞세운 침투 등을 주문하신다"라면서 "득점에 대한 것보다 조금 더 공격 성향을 보여달라고 말씀 하신다. 나도 최대한 많이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아시안컵 엔트리 경쟁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문선민은 "저돌적인 드리블과 스피드는 다른 경쟁자보다 자신있게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자부했다.그러면서 "팀에 도움이 되고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라면서 "대표팀에서 대결하는 상대는 최고의 선수만 모인다. 수비에서 조금 더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울산=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2018.12.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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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에브라 "아이슬란드, 존경스럽다"

프랑스 축구대표팀의 간판 수비수 파트리스 에브라(35)가 이번 유로2016 돌풍의 중심 아이슬란드를 칭찬했다.프랑스는 4일(한국시간) 파리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아이슬란드와의 유로 2016 8강전에서 5-2로 승리, 준결승에 진출했다. 올리비에 지루가 2골 1도움, 앙투안 그리즈만이 1골 2도움을 올렸고, 디미트리 파예가 1골 1도움, 폴 포그바가 1골로 힘을 보탰다.아이슬란드는 이번 대회에 가장 뜨거운 팀 중 하나였다. 간신히 대회에 참가한 무명의 팀이었으나 조 2위로 16강에 올랐다. 이어 축구종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2-1 승리를 챙겼다. 프랑스와 대결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었다.프랑스 선수들에게도 무척 감동스러운 장면. 에브라는 이날 경기 직후 영국 ITV와 인터뷰에서 "아이슬란드가 존경스럽다. 좋은 경기를 했다"고 말했다. 한편 프랑스는 8일 독일과 대회 준결승전을 치른다. 에브라는 "엄청난 경기다. 이번 경기는 정말 중요하다. 복수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서지영 기자 2016.07.0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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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투 브라질] 편견 깬 칠레, 한국에 주는 교훈은?

국가대표 감독은 19살 때 은퇴한 무명 축구선수다. 중앙 수비수의 키는 172cm도 안 된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합이다. 편견을 깬 칠레에서는 가능했다. 이들이 뭉친 칠레는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피치에서 엄청난 열정을 뿜어냈다. 칠레는 29일(한국시간)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열린 2014년 월드컵 16강에서 개최국 브라질을 만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결국 2-3으로 패해 탈락했다. 브라질 팬에게도 박수를 받을 정도로 뜨거운 경기였다.경기 전날 호르헤 삼파올리 감독의 공식 기자회견에 들어갔다. 작은 키에 머리를 빡빡 민 삼파올리 감독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다음날 개최국 브라질을 상대하는 감독이 맞는지 싶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마라카냥의 비극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64년 전 우루과이도 했던 일이다. 우리라고 못할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전술 철학도 뚜렷했다. 그는 "공을 점유하는 것보다 공간을 파고드는 축구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어떤 선수가 나오는지, 못 나오는지 물어보면 가감 없이 말했다. 16강을 앞두고 전술을 숨기거나, 미리 패배에 변명거리를 찾는 말 따위는 없었다. 정말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아 놀랐다.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브라질은 개최국에 백전 노장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66)감독이 이끌고 있고, 네이마르(22·바르셀로나)라는 걸출한 스타도 있다. 반면 칠레는 알렉시스 산체스(27·바르셀로나)와 아르투로 비달(27·유벤투스)가 있긴 하지만 이름 값에서는 브라질에 밀린다. 이를 접전으로 끌고 간 것도 대단하다고 박수가 나왔다. 그런데 패한 뒤 삼파올리 감독의 표정은 더 놀라웠다. 패한 칠레 기자들도 "축하한다"고 했지만, 삼파울리 감독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눈이 풀려 허공을 쳐다보던 그는 "정신 승리는 의미 없다. 브라질을 상대로 잘했지만 패한 것은 패한 것이다"며 "새로운 역사를 쓰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삼파올리. 유럽축구에 익숙한 한국에서는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감독이다. 자료를 보니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19세에 축구를 그만뒀다. 정강이뼈 부상으로 뉴웰스올드보이스의 유망주였던 그는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젊었던 그는 아르헨티나의 한 아마추어 팀에서 감독생활을 시작했고, 페루를 거쳐 칠레로 왔다. 밑바닥에서 한 나라의 축구 대표팀을 맡기까지 이 승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올라온 것이다. 칠레 축구협회는 2012년 그를 선임했는데 편견이 없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삼파올리 감독의 페르소나는 가리 메델(27·카디프 시티)이다. 메델의 키는 삼파올리 감독과 똑같은 172cm. 현역시절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삼파올리 감독은 그를 중앙 수비수로 내렸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우승으로 이끈 파비오 칸나바로(41·은퇴)보다 4cm나 작다. 키가 작은 선수는 중앙수비수를 볼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대회 돌풍의 중심인 공격적 스리백(3-Back)의 중심엔 메델이 있었다. 브라질의 장신 공격수 프레드(31·플루미넨세)와 몸싸움도 밀리지 않았다. 프레드의 키는 185cm였지만, 메델의 영리한 수비에 고전하다 조(27·미네이루)와 교체돼 나갔다. 공격으로 전환할 때는 미드필더답게 공을 앞으로 보내는 빌드업(Build up)도 뛰어났다. 편견을 깬 삼파올리의 기용이 브라질을 끝까지 괴롭힌 것이다. 2014 브라질에서 칠레의 도전은 끝났다. 그러나 삼파올리 감독은 "우리의 축구는 끝나지 않았다. 내년에 칠레에서 열리는 코파아메리카에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했다. 칠레의 축구는 삼파올리의 말처럼 이제 시작이다. 벨루오리존치=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 2014.06.2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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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안컵 해설’ 유상철-신태용 “명보형, 냉철하지만 승부욕 대단”

유상철(42)과 신태용(43)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현역 시절 멀티 플레이어였고, K리그 득점왕 출신이다. 또 홍명보(44) 축구대표팀 감독의 절친한 후배다. 유 감독은 현역 시절 홍 감독과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함께 이뤄냈고, 일본 가시와에서 1년간 한솥밥을 먹었다. 신 감독은 홍 감독과 대표팀 룸메이트였고, 요즘도 맥주 한 잔하는 사이다. 홍 감독은 2013년 동아시안컵(20~28일)에서 A대표팀 사령탑 데뷔전을 치른다. K리그 팀을 이끌다가 재충전 중인 유상철과 신태용은 JTBC 해설위원으로 동아시안컵 중계를 한다. 유 위원은 남자부, 신 위원은 여자부 경기를 맡는다. 18일 두 사람을 만났다.-두사람은 인연이 있나.유상철(이하 유) "1990년 청소년 대표 시절 진해선수촌에서 올림픽대표 태용이 형을 처음 봤다. 강의 들을 때 옆자리였다. 한 살 차이지만 대선배라 아는 척도 못 했다." 신태용(이하 신) "난 몰랐다. 너 나보다 한 살 적냐? 너도 많이 늙었구나. 하하."-서로의 현역 시절을 평가한다면. 유: "중원에서 다른 선수보다 수가 많았다. 뭘해도 당해내기 힘들었다."신: "상철이는 어느 포지션이든 똑같은 능력을 발휘했다. 앞으로도 상철이를 넘어서는 멀티 플레이어는 안 나올거다."-원조 멀티 플레이어는 송종국 아닌가.유: "난 공격수와 미드필더, 수비수로 K리그 베스트11에 모두 선정됐다."신: "나도 교체카드를 다 써서 골키퍼를 본 적도 있고, 1996년 득점왕도 차지했다. 상철이도 1998년에 득점왕이었다. 비슷한 점이 많네. 국가대표 경력 빼고."유: "형은 K리그에서는 날라다녔는데 국가대표만 오면 부진했다."-해설위원은 잘 맞나.유: "2006년 3월 은퇴해 6월에 KBS 해설위원으로 독일월드컵에 갔다. 마음은 현역이라 말보다 몸이 앞서는 해설이었다. 스위스전 오프사이드 판정 논란 때 너무 화가 나 10분간 아무 말도 안했다. 캐스터가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손짓을 하는데 엑스자를 그렸다. 대회 중 한인 식당에 갔는데 차범근 MBC 해설위원, 황선홍 SBS 해설위원이 다 모였다. KBS가 시청률 2위였는데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져 다신 안 한다고 했는데,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또 마이크를 잡았다. 한 번 하고 나니 훨씬 편했다."신: "지난 5월 JTBC에서 중계한 툴롱컵(U-20 대표팀 출전)에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나중에 내 모습이 나온 화면을 보니 완전히 얼이 나간 사람 같더라."-해설 고충은.유: "동어 반복이 가장 힘들다. 난 '때문에~'를 수십번 했다. 고치려해도 딱히 다른 단어 생각이 안났다."신: "나도 '~라고 생각합니다'를 무한 반복했다. 다음 경기에 크게 써놓고 빨간펜으로 엑스표 쳐놨다. 경북 사투리를 자제하려다 보니 억양이 이상해 북한말 같다고 하더라."-홍명보 감독은 어떤 사람인가.유: "명보 형은 밖에서 무서운 이미지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우리끼리 있으면 농담도 잘한다. 근데 좀 썰렁한 편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가 있다."신: "명보 형이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 하는 편이지. 하하. 그래도 명보 형이 보통이 아니다."-어떤 점 때문에 그런가. 유 "2001년 가시와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느꼈다. 명보 형은 지고는 못 산다. 겉으로는 냉철하지만 승부욕이 대단하다. 상대 선수에게 한 방 먹으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돌아왔다. 나도 승부욕이 있지만 티나게 해서 일본에서 퇴장을 자주 당했다."신 "명보 형은 경기장 밖에서는 순해서 별명이 '흥부'였다. 안에서는 180도 달라졌다."-홍 감독이 장차 감독을 할 것으로 예상했나.유 "현역 시절 저 사람은 감독하면 잘할 수 있겠구나하는 사람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명보 형이다."신 "명보형이 처음에 행정가를 한다고 미국에 가지 않았나. 그 때도 다시 돌아와 감독을 할거라고 확신했다."-이번 대표팀은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 없이 K리거와 일본 J리거 위주로 구성됐다.유 "K리거와 J리거들은 '어차피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밀리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히딩크 감독은 2002 월드컵 당시 유명 선수와 무명 선수를 절반씩 뽑았다. 송종국과 박지성도 무명 선수 아니었나.K리거들은 땜빵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신 "이번 대회가 팀에 맞는 선수를 찾는 대회다. K리거들은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을 밀어내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뛰어야 한다."-홍 감독이 보여주겠다는 '한국형 축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신: "명보 형은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이끌 당시 포백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전방위 압박 속에 볼 점유율을 높이는 한국식 압박 축구를 보여줬다. 런던올림픽 진화형이 한국형 축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유: "일반적으로 한국형 축구는 보통 빠른 속도와 투지를 강조한다. 히딩크 감독이 한일월드컵에서 보여준 축구에 명보 형만의 색깔이 더해질 것이다."-28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남자부 한일전이 열린다. 유 "한일전을 앞두고 선배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걸 처음 봤다. 살기가 느껴졌다. 근데 요즘 후배들은 한일전에 임하는 각오가 좀 약해진 것 같아 아쉽다."신 "한일전은 조용히 칼을 갈고 준비하는 경기다. 나도 상철이도, 명보 형도 선수 때 그랬다." 박린·김환 기자 rpark7@joongang.co.kr 2013.07.19 07:24
스포츠일반

韓 고교생, 유럽 최고 아이스하키 리그 깜짝 진출

"축구로 따지면 독일 분데스리가 구단이 한국 고교생을 선발한 것이다."대한아이스하키협회의 김정민 홍보팀장도 놀란 눈치였다. 선덕고 2학년 생인 이총현(17)이 유럽 아이스하키 최고 리그인 KHL 신인 드래프트에서 블라디보스톡 구단에 지명됐다. 신생팀으로 2013~14 시즌부터 KHL에 참가할 블라디보스톡은 2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서 열린 2013 신인 드래프트 2라운드 28순위에서 이총현을 지명했다. 한국 아이스하키 사상 국내 선수가 해외 리그의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은 것은 처음이다. KHL은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에 필적하는 수준과 규모를 지닌 유럽 최고 리그로 지난 2008년 러시아를 주축으로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팀들이 참가해 출범했다. KHL은 NHL의 아성에 도전한다는 목표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유능한 지도자와 스타 플레이어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NHL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KHL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국의 무명 선수가 지명됐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광운초등학교에서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이총현은 182cm 76kg의 신체 조건을 지닌 공격수로 광성중을 거쳐 선덕고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왕년의 농구스타 최경희씨의 2남으로 형 이총재(연세대), 동생 이총민(경희중)도 아이스하키 선수다. 지난 4월 폴란드 티히에서 열린 2013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주니어 세계선수권(18세 이하) 디비전 1 A그룹 대회에 출전해 5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총현은 당시 유망주 스카우트를 위해 파견된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지명된 것으로 보인다. 주니어 대표팀을 이끌었던 신현대 보성고 감독은 "폴란드 성인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유럽 리그에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이총현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폴란드 성인 대표팀은 이고르 자하르킨 감독 등 러시아 출신 지도자들이 이끌고 있다. 국내 지도자들은 이총현을 '미완의 대기'로 평가하고 있다. 한욱 선덕고 감독은 "체격 조건이 좋고 체력도 뛰어나다. 잠재적인 가치가 큰 선수다. 해외리그에 진출해서 잘 갈고 닦는다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현대 감독도 "현재로서는 빅리그에 진입할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잠재력은 충분하다. 좋은 시스템에서 성장한다면 훌륭한 선수가 될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블라디보스톡이 이총현을 스카우트한 배경에는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전략적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 현지 언론 '모스크바 뉴스'에 따르면 막심 카트코프 블라디보스톡 수석 스카우트는 "아시아 시장은 성장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 선수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톡은 이총현에 앞서 1라운드 35순위에서는 일본 주니어 대표팀 공격수 소마 이즈미(17)를 지명했다. 2013 KHL 신인 드래프트는 국적에 상관 없이 1996년생 선수를 대상으로 했고 5라운드에 걸쳐 총 209명의 선수가 지명을 받았다. 전체 1순위에는 189cm의 대형 수비수 디미트리 오시포프(17. 러시아)가 아무르 하바롭스크의 지명을 받았다. 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 2013.05.30 13:15
축구

14년차 캐스터 조민호 “중계전엔 선수처럼 움직여”

조민호(42) SBS ESPN 캐스터는 14년차 베테랑이다. 축구 중계만 2500경기 정도 했을 정도니 축구 보는 눈은 전문해설위원 못지 않다. K-리그 16개팀은 물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개팀 주전 선수들을 얼굴만 보고도 구분할 수 있다.조 캐스터는 올 시즌 '공중에는 심우연'이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주목을 받았다. 헤딩력이 뛰어난 전북 현대 수비수 심우연(196㎝)을 설명하는 단어다. 심우연은 전북 팬들로부터 '공중에는 심우연'이라는 다소 긴 별명을 얻었다. 승부조작이라는 암울한 분위기 속에 태어난 유쾌한 유행어다. 그는 "의도한 건 절대 아니다. 시청자들이 즐거워 했으면 다행이다"며 웃었다.-'공중에는 심우연'이라는 단어를 만든 주인공이다."하하. 우연하게 나온 말이다. 팬들이 유행어라고 불러주시면 고마울 따름이다."-어떻게 만들어진 단어인가."지난 10월 20일 열린 전북과 알 이티하드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원정 경기를 중계하다가 처음 말했다. 심우연이 후반 교체투입됐다. 알 이티하드가 세 차례 연속 크로스를 올렸는데 심우연이 머리로 다 걷어내더라. '심우연 선수는 키가 커서 헤딩을 잘합니다'라고 말하기에는 화면이 너무 빨리 지나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공중에는 심우연'이라는 짧은 단어가 나왔다. 진짜 공중에 심우연만 보였으니까(웃음)."-심우연의 공식 별명이 됐다. 직접 지어준 셈이 됐는데."유행을 시키려고 한 건 아닌데 좋은 별명이 돼서 다행이다. 그 뒤로 '공중에는 비디치'와 '공중에는 정성훈' 등을 써봤는데 욕만 먹었다. '왜 자꾸 남발하나'라는 내용의 글이 내 트위터에 올라오더라. 그때부터 자제하기 시작했다. '공중'이라는 단어는 심우연과 잘 맞는 것 같다.하하."-심우연 선수와 만나봤나."만나지는 못했지만 전북 관계자가 '심우연 선수가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다'고 하더라. 심우연 선수에게 연락을 해서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싶다. 조만간 만나자."-다른 유행어도 있나."2년 전 중계 때 나온 장면이다. 크로스가 두 선수의 머리를 연속해서 맞고 골망을 흔들었다. 이 모습을 보고 '딩동댕'이라는 표현을 썼다. 크로스-헤딩-헤딩으로 이어지는 모습과 잘 맞아서다. 몇 번 써봤는데 아무도 따라하지 않더라. 완전히 묻혔다(웃음)."-캐스터에게 유행어는 어떤 의미인가."유행어가 생기면 기분은 좋다. 그러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캐스터는 해설자를 도와주는 입장이기 때문에 튀어서는 안 된다. 최대한 유행어는 자제하고 경기에 집중하도록 노력한다."-축구 중계 경력만 14년이다. 그동안 몇 경기 정도 중계했나."회사 후배들 말에 따르면 축구만 2500경기 정도 중계를 했단다. 1년에 150경기~200경기 정도 중계를 한다. K-리그부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이탈리아 세리에A·독일 분데스리가까지 세계 주요 리그는 다 중계를 해봤다."-그만큼 축구에 대한 애착이 강할 것 같다."축구 외에도 격투기·배구·유도·육상 등 다양한 종목을 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종목은 축구다. 중계할 때 가장 흥이 나는 종목이다."-올 시즌 K-리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캐스터 입장에서는 어떤 느낌인가."안타깝다. 승부조작 사건 이후 말을 더 조심하게 됐다. 경기 중에도 어쩔 수 없이 '승부조작'이라는 걸 짚어주고 넘어 가야하는 게 캐스터의 역할이다. 하지만 입에 담기 싫었던 게 사실이다."-올 시즌 기억에 남는 중계는"7월 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C 서울과 상주 상무의 경기다. 상주 골키퍼들이 승부조작과 경고누적 등으로 다 빠졌다. 어쩔 수 없이 무명의 수비수 이윤의 선수가 골키퍼 장갑을 꼈다. 감동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픈 부분을 찌를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이윤의 선수를 설명하려면 승부조작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중계하다 보면 응원하는 팀도 생기지 않나."그러면 큰일난다. 특별하게 선호하는 팀은 없다. 물론 좋아하는 선수는 있지만 노코멘트다. 항상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중계하기 전에 특별한 버릇이 있나."선수처럼 움직인다. 경기 3시간 전에 미리 경기장에 온다. 그리고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 중계 도중 생리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3년 전에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중계 도중 배가 아파 큰일을 저지를 뻔한 경험이 있어 그 뒤로 조심한다. 경기장 도착 후 가장 먼저 하는 게 화장실 동선 파악이다(웃음)."▶공중에는 심우연?K-리그에서는 '공중에는 심우연'이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조민호 SBS ESPN 캐스터가 중계 도중 무심코 뱉은 말이 인터넷 축구 사이트를 통해 퍼졌다. 전북 수비수 심우연은 "칭찬이라 쑥스럽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TV중계의 위력은 대단하다. 선수 한 명의 이미지와 별명을 바꿀 수 있다. 중계가 더 많아져야 K-리그 인기도 올라갈 수 있다. 김환 기자 hwan2@joongang.co.kr 2011.12.1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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