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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은의 질문 있습니다] 변화 택한 '82년생 김강민', "실패 두렵다면 발전도 없다"

"너 해봤잖아. 너 지금까지 이만큼 야구 잘해온 선수잖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도, 넌 남들보다 더 빨리 해낼 수 있어. 지금까지 쌓인 게 있으니까. 그러니 일단 시도해 봐." SK 베테랑 외야수 김강민(38)은 한동안 2군에 머물러야 했던 2017년의 어느 날, 당시 SK 단장이던 염경엽 현 감독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2006년 주전으로 도약한 뒤 국내 최고의 중견수로서 늘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그가 처음으로 '내리막길'이라는 필연적 시련을 실감하고 있던 시기다. 김강민은 "그전의 나는 변화를 두려워했다"며 "발이 느려질까봐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불리는 걸 무서워했고, '지금보다 더 잘하자'가 아니라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안주했다"고 탈어 놓았다. 지금의 김강민은 그렇지 않다. 비록 그때보다 나이를 몇 살 더 먹었을지언정, 몸과 마음은 모두 더 강해지고 단단해졌다. 불혹을 앞둔 나이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면서 "성공한다면 좋고, 행여 실패하더라도 훗날 나의 자산이 될 것이다. 반면 가만히 앉아서 똑같은 것만 반복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며 "그때 2군에서 보낸 3개월이 내게 3년이라는 시간을 더 선물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SK 왕조를 관통한 뒤, 새로운 후배들로 가득찬 팀에서 여전히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김강민. 일간스포츠가 그를 만나 '자기 계발서'를 방불케하는 값진 경험담을 들었다. 그는 "올해도, 그리고 혹시 내년에도 계속 야구를 할 수 있다면 다음 시즌에도, 나는 그냥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선수였으면 좋겠다"며 웃어 보였다. -1+1년 FA 계약 후 첫 시즌을 앞두고 있다. 조금씩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있나. "원래 야구를 더 하는 게 목표였지, 팀을 떠날 생각은 없었으니 별다른 느낌은 없다. 다만 계약을 앞두고 '내가 조금 더 잘했다면 좀더 좋은 대우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들었다.(웃음) 선수 생활의 마지막은 항상 생각하고 있다. 언제든 내 기량이 떨어지면 당연히 야구를 그만둬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지금은 선수로 남아 있는 동안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또 어떤 것을 더 해야 여기서 더 잘할 수 있는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다. 끝까지, 그만둘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특히 그렇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는 건 당연하고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최대한 기량이 떨어진 부분을 보완하는 게 전부다. 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서 운동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쌓은 노하우는 내 머릿속에 남아있고,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요즘은 은퇴 시기를 미리 정해놓고 뛰는 선수들도 많다. "나 역시 명확하게 정해놓지는 않더라도 '이때쯤이면 은퇴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은 내심 품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다. 지난 시즌에도 '올해가 끝나면 야구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생각은 많이 했고, 올 시즌도 마찬가지다. 팀이나 팬이나 내가 원하는 성적을 못 내면 당연히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한다. (손차훈) 단장님께서는 늘 '조금 더 해도 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선수 생활을 더) 하라'는 얘기를 해주시더라. 나 역시 그냥 이번 시즌에 어떻게 하고, 뭘 준비하고, 이쯤에서 무엇을 해줘야 하고, 이런 부분만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올시즌이 끝난 뒤, 스스로 '여기서 좀더 해도 되겠다'고 자신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어느 정도 될까. "성적으로 나타난 수치보다 내가 무엇을 보여줬으냐에 달렸을 것 같다. 아무래도 올해는 팀에 큰 이변이 없는 한 지난해보다 내 출전 경기 수가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난해에는 (후배들의 부상이라는) 변수가 있어서 내가 이전 시즌보다 많은 경기를 나갔지만, 지금은 팀에 주전 선수들이 다 있으니까. 물론 나도 최선을 다해 같이 뛰겠지만, 기존 주전 선수들이 부상 없이 모두 잘하고 있다면 나이 많은 내가 밀리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나 역시 144경기를 모두 뛸 수 있는 체력은 안되지 않겠나.(웃음) 물론 나 자신은 (그런 체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떄 안되는 것도 분명히 있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니 어느 정도 목표 경기 수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 내가 보여줄 수 이는 퍼포먼스를 다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게 최선이다." -큰 틀에서 잡아놓은 목표인 것 같다. 베테랑의 역할이 그런 것 같다. "그렇다. 올해 딱 하나 목표를 세운 게 있다면, 타격에서 분명히 이전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주된 다짐으로 삼고 지금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수비는 지금까지 해온 것에서 더 내려가는 길밖에 없지 않겠나. 반대로 타격은 나아질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서 올해는 그쪽으로 많이 준비했다. 또 팀에 왼손 타자들이 많아서 외야수 중에는 오른손 타자가 정의윤 한 명 밖에 없으니, 왼손 투수가 상대 선발로 나왔을 때 출전할 수 있게 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 부분은 감독님께서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내가 준비해야 하는 부분이니까. 그리고 팀이 가을 야구를 할 때 내가 나서게 된다면 또 있는 힘껏, 몸에 있는 모든 걸 다 짜내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싶다." -지금까지 십수년간 비시즌과 스프링캠프에서 쌓아 온 훈련 루틴이 있을 텐데. 늘 유지하나, 변화를 주나. "나는 매년 조금씩 바꾼다. 사람들 생각이 다 다르고, 내가 해왔던 야구가 다 다르니 '이게 더 좋아 보인다'라고 생각하면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바꾼다. 올해는 팀에 이지풍 트레이닝 코치가 새로 와서 함께 해보니 더 재미있다. 사실 이제 기술적인 성장은 더 이상 없다고 봐야 하는 시기이지 않나. 이 나이에 기술적으로 더 성장하면 이건 뭐, 내가 천재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니까.(웃음) 다만 마인드를 많이 바꿨다. 타격 코치인 이진영 코치님과 박재상 코치님 얘기도 많이 듣는다. 이 코치님은 본인이 그동안 해왔던 것들도 있으니까 그런 노하우들을 많이 듣는 편이고, 박 코치는 오랜 기간 내 옆에서 항상 나를 봐오면서 나에 대해 잘 아니까 필요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 새로 온 이지풍 코치님은 타격에 필요한 파워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내 나이에는 신체적인 기능이 떨어지지 않고 트레이닝을 통해 잘 유지하기만 해도 좋은데,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트레이닝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번 시즌을 앞두고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비롯핸 이런저런 새로운 운동을 많이 했다. 타격을 잘하기 위해 이것저것 노력과 시도도 해봤다. 초점이 온통 타격 쪽에 맞춰져 있던 것 같다." -자체 청백전과 연습경기에 나가보니 웨이트 트레이닝 효과가 느껴지나. "확실히 그렇다. 연습경기에서 홈런도 나오고, 타구 스피드도 빨라지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봤다. 그러다 보니 더 믿음도 가고 더 많이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결과를 내 몸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좋은 것 같다. 지금은 더 어릴 때부터 이렇게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반대로 더 늦기 전에 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은퇴하고 난 다음엔 내가 정말 하고 싶어도 아무 것도 해볼 수 없지 않나. 앞으로 야구를 그만두고 지도자가 되거나 관련된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동안 내가 줄곧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프로그램도 해봐야 다양한 사람들을 대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소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게 재미있기도 하다. 만약 올 시즌에 잘 해서 내년에도 선수 생활을 더 하게 된다면, 올해와 똑같이 또 해볼 거다." -그렇다면 올 시즌은 끝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새출발이 될 수도 있겠다. 많은 것을 바꿨으니 지난해보다 좋은 성적을 기대해봐도 좋을까. "물론 기대는 하고 있다.(웃음) 솔직히 나이 먹고도 계속 하던 것만 그대로 하면 너무 무료하다. 성적은 어느 정도 나오고, 그러면서 그냥 하던 대로 흘러가 버리면 그것만큼 지루한 게 없다. 발전도 없고. 그런데 새로운 걸 해보면서 좋다고 느끼면 재미를 느끼게 되고, 혹은 실패하더라도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난 뒤에 또 소중한 자신이 될 거니까 후회는 없다. 앞으로도 그런, 좋은 변화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도전을 해보고 실패라도 하는 게 낫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렇다. 나도 야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에는 고참이 됐으니 트레이닝 때도 '작년에 하던 만큼 유지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면, 지금은 '나이를 먹었으니 오히려 더 많이, 힘들게 해야 해야 체력을 유지라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그러면서 지금 (그런 방식이) 야구하는 데 이점이 많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나도 힘들었다. 당연히 하던 거 하는 게 편하지 않겠나. 하지만 새로운 것도 꾸준하게 하니까 지루하지도 않고, 스케줄도 어렵지 않더라. 다만 식단 조절은 엄격하게 못했다. 너무 한꺼번에 다 바꾸지는 못하겠더라.(웃음) 그래도 다 재미있다. 특히 원래는 나 혼자 서른아홉이었는데, (동갑인) 채태인이 들어와서 정말 좋다. 정말 밝고 분위기 메이커인 친구라 (팀이) 잘 데리고 온 것 같다. 밝은 에너지를 갖고 있는 선수를 찾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채태인은 야구쪽으로도 갖고 있는 게 많은, 워낙 재능이 출중한 선수라서 후배들에게도 좋은 일인 것 같다." -현재 모습이 스스로 어릴 때 생각했던 미래의 모습과 비슷한가. "아니다. 그때는 지금 이 나이까지 야구를 계속 할 줄 몰랐다.(웃음) 좀더 일찍 그만두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내 경우엔 트레이 힐만 감독님이 계시던 서른 여섯, 서른 일곱 정도가 어떤 계기였던 것 같다. 그때 기량이 한참 떨어지고 2군에 오래 머물면서 마인드가 많이 달라졌다. 그전에는 '이만하면 됐다' 했던 것 같다. 그게 내 패착이었다. 그 전에, 한참 잘하고 있을 때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했다면 지금 더 잘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점이 가장 아쉽다." -오랜 기간 국내 최정상 중견수로 꼽혔다. "바로 그때가 더 (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했어야 할 시기다. 하지만 계속 안주하면서 '다치지만 않으면 돼'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계속 다치면서 야구가 잘 안 풀리더라. 좋았을 때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공격 쪽으로 좀더 발전을 꾀했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이 자꾸 들더라. 그래도 역시 더 늦지 않게, 야구를 그만두고 난 뒤가 아니라 그 시기에라도 깨닫게 된 게 여기까지 온 비결이다. 그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다시 해보자' 했던 마음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그때 그 마음의 영향인가. "그때 그렇게 느끼면서 지금 새로운 것, 좋은 것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주저 없이 해보겠다고 할 수 있는 자세가 만들어진 것 같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그렇다. 그전에는 사실 몸무게를 올리는 걸 굉장히 무서워했다. 발이 느려진다는 두려움이 있어서다. 또 체중이 조금 늘어났을 때도 이지풍 코치님은 '더 많이 늘어도 된다'고 하시는데도 내 마음은 조금 불안했다. 그때 이 코치님이 '불안해하지 말고 해봐라'라고, '해보고 안 좋다고 느끼면 그때 다시 빼면 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다시 열심히 했는데, 지금 몸 상태가 굉장히 좋은 걸 보니 잘한 것 같다. 불편한 느낌도 전혀 없고, 오히려 힘이 있으니 타격할 때 더 편한 게 많다. 긍정적인 부분이 많아져서 좋다." -마음을 고쳐 먹게 된 결정적 사건이 있었나. "바닥을 찍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엄청난 계기였다. 나이가 딱 야구를 그만두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으니까. 그때 만약 2군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냥 그렇게 흐지부지 은퇴하고 끝내야 했을 거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올라가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이든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그때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 박재상 코치와 트레이닝 코치님들께 다 얘기를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신체적 기능이 떨어지고, 경기에 나가서 움직임이 둔해진 것 같으면 곧바로 내게 기탄없이 말을 해달라'고. '그러면 나도 미련 없이 포기하겠다'고. 그런데 다들 진심을 담아 '아직은 아니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격려가 돼 더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2군에서 보낸 그 '3개월'이 내게는 그 후 '3년'의 시간을 벌어준 거라고 본다." -3개월이 만든 3년. 정말 중요한 시기였던 듯하다. "그렇다. 그 3개월이 진짜 큰 전환점이다. 염경엽 현 감독님이 단장으로 계실 때인데, 한번은 2군에 오셨다가 날 보고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시다가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강민아, 너 지금까지 이만큼 야구 해봤잖아. 잘하는 선수잖아. 지금부터 바꾸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도, 그동안 해온 게 있어서 넌 남들보다 더 빨리 될 거야. 분명히 돼. 그러니까 시도해 봐.'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그런가? 그래, 그럼 해보지 뭐' 하는 마음이 들더라.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기본부터 다시 열심히 준비했다. 그랬더니 정말 어느 순간 되더라." -김강민 야구 인생 3기의 시작인 듯하다. 2군에서 무명 시절을 보내던 1기, 국내 최고 중견수로 이름을 날리던 2기, 슬럼프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반등해 다시 실력을 보여준 3기. 그렇다면 올 시즌은 4기의 시작이 될까.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만약 지금보다 확 올라가면 4기가 되는 거고, 아니면 그냥 3기가 연장되는 거다.(폭소) 물론 작년, 재작년보다 훨씬 잘하게 된다면 정말 좋은 일이다. 나도 좋고, 팀도 좋고, 모두가 다 좋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금 나이에 성적이 확 올라가기는 어렵지 않겠나. 이제는 큰 욕심이 없다. 아주 잘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선수, 그런 존재가 되려고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 배영은 기자 사진=정시종 기자 2020.03.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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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은의 질문 있습니다] 김하성·이정후의 이구동성, "나도 내가 이렇게 잘될지 몰랐다"

"언젠가 메이저리그 같은 팀에서 함께 뛴다면? 정말 최고죠!" 2020년 새해 첫 달이 절반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늦은 오후. 한 프랜차이즈 커피숍 구석 자리에 갓 스물다섯과 스물둘이 된 청년 두 명이 나란히 앉았다. 키움 내야수 김하성(25)과 외야수 이정후(22). 각각 올해 연봉 5억5000만원과 3억9000만원을 받게 돼 역대 KBO 리그 7년 차와4년 차 최고 몸값 기록을 경신한 '천재 듀오'다. 고액 연봉 선수들이 삼삼오오 따뜻한 해외로 떠나 올 시즌 준비에 한창인 시기. 하지만 아직 20대 초중반에 불과한 이들은 국내에 남아 착실하게 다음 시즌을 위한 개인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운동 스케줄은 서로 다르지만, "올해 우리가 더 잘해서 꼭 지난해 못한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을 확실하게 공유하고 있다. 둘은 유독 서로 의지를 많이 하는 선후배 사이다. 유독 팀워크가 끈끈한 키움에서 3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김하성의 룸메이트였던 김민성(LG)과 이정후의 룸메이트였던 고종욱(SK)이 다른 팀으로 이적한 뒤로는 원정 경기 때 방도 같이 쓴다. 공통점도 많다. 입단한 지 얼마 안 돼 1군 센터라인 주전 한 자리를 꿰찼고, 이제는 팀을 넘어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축 멤버로 자리 잡았다. 나란히 2018년과 지난해 유격수(김하성)와 외야수(이정후) 부문 골든글러브를 2년 연속 수상한 데다 올해는 각자 자신의 연차 최고 연봉 기록을 다시 썼다. 지난해 11월 열린 2019 프리미어 12에 함께 출전했다가 한국 선수 가운데선 둘만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마치 운명 공동체와도 같은 둘은 서로의 장점을 흡수하며 점점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올해 역시 서로를 다독이고 격려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다. 김하성은 "정후는 정말 천재다. 나는 우리 팀 선배들이 키웠다면, 정후는 본인 실력으로 혼자 컸다"며 후배 칭찬에 여념이 없었고, 이정후는 "우리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하성이 형이 1년 뒤 해외로 바로 떠나버릴까 봐 벌써 걱정"이라며 짐짓 울상을 지었다. -김하성은 7년 차, 이정후는 4년 차 역대 최고 연봉 기록을 각각 경신했다. 축하한다. 김하성(이하 김)=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연봉이 선수의 가치니까 당연히 중요하긴 한데, 그런 부분을 구단이 늘 먼저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팀에 대한 애정도 더 생기고, 올 시즌 더 잘해야 한다는 동기 부여도 되는 것 같다. 이정후(이하 이)=나도 마찬가지다. 신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팀에서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뿐이다. 책임감도 생기고, 앞으로 더 잘해야 할 것 같다. -팀에 함께 있다는 게 서로에게 큰 힘이 될 것 같다. 김하성에게 이정후는 어떤 후배인가. 그리고 이정후에게 김하성은 어떤 선배인가. 김=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동생이다. 정후는 워낙 혼자 스스로 잘한다. 나도 어린 연차 때부터 1군에 있긴 했지만, 나와는 또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난 사실 형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 컸다. 가장 좋아하는 김민성(LG) 선배와 5년간 룸메이트를 하면서 많이 배웠고, 박병호 선배와 서건창 선배를 비롯한 다른 선배들도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 정후는 나와 달리 진짜 자기 실력으로 컸다. 이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하고, 지금도 나보다 나은 것 같다. 이=아니다. 나야말로 정말 형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하성이 형이 윗 선배들에게 받은 걸 똑같이 나한테 해주신 거다. 정말 팀에 좋은 선배들이 많다. 올해는 하성이 형과 둘이 방을 같이 쓰게 되면서 야구가 잘 안 될 때 좋은 얘기도 많이 해줬다. 평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신다. -서로가 보는 서로의 가장 큰 장점은 뭔가. 김=정후는타고났다. 그냥 천재다. (이정후가 쑥스러워 고개를 푹 숙이자) 타격 쪽에서는 진짜 그렇다. 공 던지는 건 아직 잘 모르겠는데…. 외야에서 송구할 때는 한 번씩 좀 '똑바로 던지라'고 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일동 폭소) 박병호 선배님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실 거다. (웃음) 이런 농담도 사실 다 좋아해서 하는 거다. 진짜 너무 잘 치니까. 이=형은 야구를 모든 면에서 잘하는 것 같아서 단점이 없다. 아, 무엇보다 성격이 정말 좋다. 경기 중에 실수하더라도 전혀 기죽지 않고 빠르게 다음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정말 좋아 보인다. 항상 자신감을 많이 가진 점도 부러운데, 그걸 또 야구장에서 결과로 바로 보여주기 때문에 더 멋있는 것 같다. -이정후는 고교 시절 유격수였고, 내야수로 입단했다. 천하의 김하성도 긴장할 수 있었을 텐데. 김=아, 그런데 수비하는 걸 보고 나니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다시 폭소) 정후의 첫 캠프 때 나는 근처에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 팀 캠프에 갔다가 내야 수비하는 영상을 보고 '아, 이 친구는 곧 외야로 전향하겠구나' 싶어서 걱정이 없어졌다. (웃음) 만약 정후가 유격수 수비까지 잘했다면 나는 아마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지 않았을까." -둘 다 팀을 잘 만난 게 1군에서 빠르게 자리 잡은 비결인 것 같다. 김=나도, 정후도 정말 그렇다. 감독님도 잘 만났고, 선배들도 잘 만났다. 그래서 감사하다. 팀에 좋은 선수가 많으면 서로 조금씩 더 발전하게 되는 것 같다. 또 우리 팀은 나이가 어려도 잘하면 기회를 많이 주는 팀이다. 신인급 선수들도 무작정 '1군에서 뛰고 싶다'는 희망만 품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도 저 선배처럼 저렇게 해봐야지' 하는 목표의식을 심는 환경이니까. 나 역시 목표는 당장 해내야 하는 거니까 현실성 있게 잡되 꿈은 정말 '꿈'이니까 최대한 크게 가지려고 한다."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때 상상했던 모습과 현재의 모습에 어떤 차이가 있나. 김=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잘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건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때 처음 야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는 당연히 조금만 잘해도 메이저리그에 갈 줄 알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그랬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돼 보니 당장 프로의 벽만으로도 너무 높은 거다. 심지어 고2 때까지는 키도 작고 체격도 작아서 힘이 없었고, 그래서 방망이도 잘 못 쳤다. 그냥 '일단 프로만 가자'는 생각만 했다. 그러다 3학년 때 갑자기 성장하면서 1년을 반짝 잘해서 프로 지명을 받게 됐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성장하리라는 예상은 하지도 못했다. 정후처럼 계속 야구를 잘한 선수랑은 완전히 다른 케이스다. 지금 이 모든 게 무척 감사하다. 이=나도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때는 일단 야구만 하면 그냥 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다 스타플레이어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니까 진짜 많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때 김하성이 장난스럽게 "너는 야구가 점점 더 쉬워졌지? 고1 때부터 '난 무조건 프로 가겠네' 한 거 아니야?"라고 놀리자 손사래를 치며) 진짜 아니다! 정말 어려웠다. 학생 때는 주위에서 아무리 '너희 아빠가 야구를 정말 잘했다'고 얘기해도 나에게는 그냥 레전드가 아닌 '우리 아빠'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한 학년씩 올라갈수록 야구가 힘들어지고, 어렸을 때 그냥 즐겁게 같이 야구하던 친구들이 도중에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가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새삼 '아, 아빠가 정말 대단했구나'라고 느끼게 됐다. 처음에 아빠가 왜 야구를 하지 말라고 했는지도 조금 알겠더라. -아버지가 원래는 야구가 골프를 시킬까 하셨다고 들었다. 이=그렇다. 골프, 축구에 쇼트트랙까지 다 해봤는데 결국 야구를 하게 됐다. 골프는 너무 정적이라 내 성격과 잘 안 맞았다. 나도 하성이 형처럼 '프로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이렇게 빨리 자리 잡을 줄은 몰랐다. 원래 목표는 딱 지금 내 나이, 프로 4년 차 정도가 됐을 때는 1군에서 뛰고 싶다는 정도였다. 어렸을 때 빨리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1군 진입을 노릴 계획이었다. 내야수로 들어왔을 때는 정말 가망이 안 보였는데(웃음), 다행히 감독님이 빨리 외야수로 바꿔 주셔서 수비 부담을 덜고 방망이도 잘 맞고 해서 운 좋게 빨리 잘 풀렸다." -옆에서 지켜봤을 때, 이정후처럼 같은 분야의 대가인 아버지를 둔 상황이 어떻게 보이나. 부러운가, 아니면 부담이 클 것 같은가. 김=장단점이 다 있을 거다. 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분이셔서 비교는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정후가 외야수라 다행이다. 아버지가 유격수로 정점을 찍은 선수셨으니 포지션도 같은 유격수였으면 더 자주 비교를 당해서 힘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정후가 그런 부담감을 다 잘 이겨내고 성공한 덕에 정후 아버님과 정후에게 '윈윈'이 된 것 같다. 아버님은 은퇴하셨지만 정후를 통해 계속 재조명되실 수 있고, 정후 역시 아버지 덕에 더 유명해지고 주목도 많이 받을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닌가. 이 모든 게 다 정후가 그런 무게감을 잘 극복하고 성공했기에 가능해졌다. -둘 다 야구팬들이 훗날 메이저리그에서의 활약을 보고 싶어하는 선수다. 김하성은 올 시즌이 끝난 뒤 해외 진출을 할 수도 있다고 예고도 했다. 김=이번에도 꿈을 크게 가진 것이다. 일단 구단에서 미리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어쨌든 (해외에 나가려면) 내가 잘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팀 성적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조급한 마음은 없다. 올해가 안 되면 내년 시즌 이후까지 시간을 길게 보고 생각하려 한다. 더 성장해서 경쟁력이 생기고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기면 해외에 나갈 것이다. 무조건 올해가 끝나고 가겠다는 건 아니다. 이=나는 아직 (해외진출 가능 자격을 얻으려면) 네 시즌이 더 남아서 아무 생각이 없다. 김=나도 정후 나이 때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한참 더 남아서 아무 생각이 없다'고. 그런데 정후야, 시간 진짜 금방 간다. (일동 폭소) 이=하성이 형 나이가 됐을 때 생각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성이 형도 나 같은 과정을 밟고 지금 자리까지 올라왔으니 나도 차근차근 그 뒤를 따라가면서 생각해보겠다. -나중에 메이저리그 같은 팀에서 뛰게 되면 좋을 것 같지 않나. 김=그렇게 되면 최고다! (웃음) 결국 다른 리그에서 잘하려면 적응력이 관건이니까 둘이 같이 있으면 정말 좋다. 우리 둘 다 학생 때는 저학년 때부터, 프로에 와서는 저연차 때부터 경기에 뛰어서 그런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장점은 있는 것 같다. 뭐든 부딪혀 봐야 알지 않나.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니까 '도전'이라고 표현하는 거 아닐까. 해외 진출은 진짜 '도전'이다. -지난 프리미어 12에서 둘만 나란히 대회 '베스트 11'에 뽑혔는데. 김=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나가는 것 자체가 좋다. 대표팀에 뽑히는 것 자체가 영광이니까. 가면 아무래도 실력이 많이 늘게 된다. 좋은 선수들을 옆에서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자신감도 생기고 또 자극도 된다. 그런 부분이 가장 좋다. 이=나도 국제대회에 나갈 때마다 계속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경험을 해봤으니 이번 도쿄 올림픽 대표팀에 뽑힌다면 이번엔 꼭 성적, 결과로 보여드리고 싶다. -서로에게 올해 어떤 모습을 기대하나. 김=정후는 아쉬울 게 없는 선수다. 국내 선수 가운데 200안타는 우리 팀 서건창 선배만 치지 않았나. 128경기 때 나왔으니 진짜 대단한 기록이다. 그 뒤를 팀 후배 정후가 잇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정후가 그 기록에 가장 가까운 선수라고도 생각한다. 작년에 최다안타 1위를 내줬던 경쟁자(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두산)가 재계약도 하지 않았나. 올해는 정후가 이겼으면 좋겠다. 정후가 안타 250개 정도만 쳐 주면 우리 팀이 우승하지 않을까. (웃음) 이=200안타? 포스트시즌에 치는 것까지 다 합쳐야겠다. (웃음) 하성이 형은 그냥 항상 잘해서 내가 더 기대할 게 없다. 만약 형이 올해 너무 잘해서 시즌 끝나고 바로 해외로 가버리면 좀 슬플 수 있으니까, 그냥 올해도 형이 하던 대로만 했으면 좋겠다. 내년까지 보고 좀 적당히. -잘하라는 얘긴지, 못하라는 얘긴지 아리송하다. 이=당연히 잘하길 바라는 것은 맞다. 다만 본인이 확신해야 해외에 나간다고 했으니까, '누가 봐도 잘한' 성적인데 형 자신의 기준에만 성에 안 차는 정도의 성적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1년 더 같이 뛸 테니. (웃음) 우리 후배들은 지금 다 형이 하는 걸 보면서 배우고 있으니 계속 하성이 형과 함께하고 싶다. 안 다치고 계속 지금처럼만 잘하셨으면 좋겠다. 김=아무래도 내가 다른 후배들보다 정후한테 잘해주니까 이러는 것 같다. (웃음)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다른 선수들이 나를 롤 모델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야구를 잘하는 게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나중에 은퇴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만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선수로 뛰는 동안에는 만족하는 일 없이 계속 더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올해도 3년 연속 동반 골든글러브 수상을 기대하나. 김=2년 연속 받으니 정말 좋더라. 앞으로도 받을 수 있는 한 계속 받고 싶다. 이=하성이 형은 계속 받을 것 같다. 나만 잘하면 될 것 같다. 배영은 기자사진=김민규 기자 2020.01.15 06:00
야구

[배영은의 질문 있습니다]윤성환은 어떻게 7년간 1038이닝을 던졌나

2011년 이후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진 KBO 리그 투수는 누구일까.7년째 두산 유니폼을 입고 최고 외국인 투수 자리를 지키는 더스틴 니퍼트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니퍼트도 1000이닝을 훌쩍 넘기면서 엄청난 내구성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마운드를 지킨 투수가 딱 한 명 더 있다. 삼성 윤성환(36)이다.윤성환은 2011년부터 2017년 6월 13일까지 총 1038이닝을 소화했다. 이 기간 동안 규정이닝을 채운 선발 투수는 KBO 리그를 통틀어 다섯 명밖에 없고, 그 가운데 1000이닝을 넘게 던진 투수는 윤성환과 니퍼트뿐이다. 승리(78승)와 평균자책점(3.78)도 윤성환이 국내 투수들 가운데 1위다. 167경기에서 1038이닝을 던지는 동안 볼넷을 220개만 내줬다. 니퍼트(329개)와 비교해도 엄청나게 적은 수치. 그만큼 꾸준했고, 강했다.그동안 쌓아올린 기록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윤성환의 묵묵한 노력은 더 많은 박수를 받을 필요가 있다. 이 인터뷰는 오로지 '선발 투수' 윤성환의 가치와 노하우에 초점을 맞췄다. 최근 7년 사이 1군 마운드에서 공 1만6480개를 던지면서 축적된 베테랑 투수의 비법이 담겨 있다.-올 시즌 팀 성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팀 성적이 많이 떨어지니 초반에는 아무래도 위축되고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지난해에도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다른 팀들이 쉽게 보지는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선수들도 그런 부분을 느끼고 화가 나기도 했다.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 그래도 이게 현실이니까 어쨌든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 조금씩 이겨가다 보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삼성 선발 투수 5명이 모두 10승을 하던 시즌이 불과 2년 전이다. 지금 삼성 선발진은 윤성환에 대한 의존도가 더 커졌다. 어깨가 무겁나."나나 우규민이나 외국인 투수가 나갈 때 팀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 같다. 우리가 승리 투수가 돼야 한다는 게 아니라 팀이 승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전에야 선발 투수 다섯 명이 다 좋았으니 내가 오늘 못 해도 다음 날 팀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나가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오히려 그 부분이 게임에 영향을 미칠 때도 있더라."-부담감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렇다. 자신감은 항상 있지만, 시즌 초반에 나 스스로에게 놀란 적이 있다. 선취점을 딱 주는 순간, '오늘도 지는구나'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생기는 거다. 원래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경기 상황이 어떻든 내가 할 부분은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나조차 쉽게 포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걸 깨닫고 스스로 '아차' 싶어서 마음을 고쳐 먹는 계기가 됐다. 솔직히 예전에는 팀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 투수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냥 팀이 이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올해 부임한 김한수 감독님이 늘 선수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시는데, 고참 선수로서 면목이 없어서 한동안은 감독님 얼굴도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였다."-팀에 대한 책임감이 훨씬 커진 것 같다."아무래도 이제 고참이 됐고, 팀에 중간급 투수들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사실 나는 원래 '내 할 일만 확실히 하자'는 주의였다. 프로 선수니까 각자 알아서 잘 하는 게 맞고, 코치님도 계시니 나는 내 운동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코치님의 역할이 있다면 고참이 해야 할 역할도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처음 선발 투수를 해보는 후배들이 질문을 던질 때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해주려고 한다."-가장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가. "선발 투수는 힘든 보직이다. 완급조절이 특히 어렵다. 중간 투수가 선발로 전환했을 때, 원래 하던 대로 힘으로만 던지면 5회를 넘기기가 어렵다. 그건 사실 본인이 스스로 깨닫는 게 가장 좋다. 나도 던져 보면서 깨달았으니까. 그래도 경험자로서 그런 부분을 얘기해줄 수는 있다. 긴 이닝을 안 던져본 선수들은 처음에는 사실 그 벽을 깨기가 어렵다. 처음으로 6이닝 던지고 다음 날 힘들어서 '공 못 던지겠다'고 하는 투수들도 많다. 그래서 더 관리를 잘 하고 힘 조절을 해야 한다. 완급조절은 정말 가장 중요하다." 2004년 삼성에 입단한 윤성환은 2008년 처음으로 선발 투수라는 보직을 맡았다. 스스로 "첫 해에 10승을 하긴 했지만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5이닝을 넘기는 것도 벅차게 느껴졌고, 10경기 넘게 던진 후에야 조금씩 완급조절의 중요성을 깨달아갔다.그런 그가 다른 차원의 투수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은 선발 전환 4년째인 2011년이었다. 오치아이 에이지 투수코치를 만나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는 "한창 스피드가 떨어져서 고민이었을 때, 코치님이 '너는 공 빠른 투수들보다 볼이 훨씬 좋고 회전력도 좋아서 전혀 문제될 게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네 공을 던지라'고 해주셨다"며 "그때부터 기술적으로나 멘탈적으로나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고 했다.그 후 윤성환은 단 한 경기도 허투루 던진 적이 없다. 매 경기를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준비했다. 수행자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자신과 싸웠다. 이제 3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투수가 여전히 서른 살 투수 못지 않은 체력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비결이다.-2011년 이후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진 투수다. 어떤 노하우가 있나."진짜 노하우는 '운동'이다.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나는 사실 선발 등판하는 날이 가장 편하다. 오히려 등판 사이에 준비하는 4~5일이 더 힘들다. 등판 다음날 러닝을 하고, 그 다음에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또 러닝, 또 웨이트트레이닝, 또 러닝, 그리고 보강 운동까지 반복되는 스케줄 자체가 너무 힘들다. 당연히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그 과정을 한 시즌 동안 반복하고, 또 그걸 매년 반복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운동에 쏟았는지 셀 수도 없다. 그 과정은 에너지를 얻기 위한 나와의 싸움이다. 등판일을 위해 등판하지 않는 날 에너지를 채워야 하는데, 그걸 하기 싫어서 소홀히 하다 보면 부상이 오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꾸준히 그 과정을 잘 준비하면 경기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그런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 운동의 효과는 성적으로 충분히 증명했다. "정말 하루하루를 누가 더 '재미없게' 보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 같다. 지난 번에 양현종(KIA) 인터뷰 기사를 보니 여름을 대비한 몸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더라. 나 역시 공감을 했다. 더워질수록 몸이 처지고 힘드니까 운동도 하기 싫어진다. 그런데 그런 시기를 잘 이겨냈을 때 항상 결과가 좋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다. '역시 현종이도 오랫동안 잘 하는 이유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양현종은 윤성환과 함께 2011시즌부터 현재까지 규정이닝을 소화한 유일한 국내 투수다. 윤성환과 양현종을 제외한 나머지 세 투수는 모두 외국인이다.) 선발 등판을 준비하면서 늘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시간이 내가 꾸준히 던질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본인만의 특별한 루틴이 있나. "한 가지 운동만 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병행한다. 예를 들어 하체 운동을 해도 이번 주에 스쿼트를 했다면 다음 주에는 다른 걸 해보는 식이다. 1년 간 같은 운동은 도저히 지루해서 못 하기 때문에 계속 종목을 바꿔 준다. 최근에도 트레이닝 코치님과 새로운 운동을 시도했는데, 정말 숨이 턱까지 찼다. (웃음)"-투수에게는 '롱런'도 재능일까. "사실 프로 1군에서 뛰는 투수들은 실력차가 그리 크지 않다. 1년간 부상 당하지 않고 1군에서 풀타임을 뛸 수 있다면 성적은 어느 정도 분명히 나온다. 그러나 구위가 떨어지거나 부상 같은 문제가 생기면 계속 버티면서 던질 수가 없다. 꼭 내 얘기가 아니라도, 롱런하는 투수들을 보면 분명히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자신만의 루틴과 의지가 있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상대방하고 싸우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길 수 있다." 윤성환은 2015시즌을 앞두고 삼성과 4년 80억원에 FA(프리에이전트) 계약을 했다. 올해가 계약 세 번째 시즌. 지난 2년간 몸값 그 이상의 역할을 했고, 대표적인 '모범 FA'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올해도, 내년도 마찬가지다. 그는 계속 자신을 향한 신뢰를 굳건히 지켜 나갈 생각이다. 백 마디 말보다 마운드에서의 활약이 결국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남긴다는 것을 잘 알아서다.화려한 상패나 떠들썩한 인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힘이 닿는 데까지 '좋은 선발 투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싶어 한다. 14년간 프로 선수로 살아오면서 꾸준히 찾아낸 해답이 자신감의 원천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하면 야구를 잘 할 수 있을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 답을 내가 계속 따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모든 게 좌우된다"고 했다. 윤성환은 마운드에서 공을 잘 컨트롤하는 투수지만,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데 더 능하다. 그게 진짜 성공 비결이다.-지금은 윤성환의 야구 인생에서 어떤 지점인가."야구 인생을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눈다면 이제 중반은 넘어선 것 같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매번 느끼는 건 '야구가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잘 하기는 더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동이 정말 힘들다. 진짜로. (웃음)"-삼성의 젊은 투수들에게 롤모델일 텐데. "젊은 투수들이 볼 때는 지금의 내가 커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들 모두 충분히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결국은 그 친구들이 팀을 이끌어 갈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는 있을 수밖에 없다. 아직 어리지 않나. 입단하자마자 한 번에 잘 할 수 있는 투수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나. 올 시즌 초반에 팀이 많이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더 자신 있게 경기에 임했으면 좋겠다. 야구는 올해만 하는 게 아니다. 내년에는 분명히 더 좋아질 것이고, 내후년에는 그보다 더 좋아질 것이다. 계속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히 (기량이) 좋아진다."-앞으로 몇 년의 선수생활이 더 남았을까."지금 같아서는 마흔 넘어서까지 할 자신은 있다. 이렇게 계속 몸 관리를 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얘기할 부분이 아니다. 동료들이, 코칭스태프가, 그리고 팀이 '윤성환은 몇 년 더 잘 할 수 있다'고 판단해줘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믿음을 심어주는 게 선수로서 중요하다. 말로만 '몇 년 더 하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운동과 기록으로 보여주고 싶다. 결국은 또 모든 게 자기 관리에 달린 셈이다."배영은 기자사진=삼성 제공 2017.06.15 06:00
야구

[배영은의 질문 있습니다] 돌아온 김원석, "내 인생에 '탄탄대로'는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저에게 '탄탄대로'는 없습니다."이제는 조금 편한 길을 걷고 싶을 만도 한데, 한화 외야수 김원석(28)은 고개부터 저었다. 요즘 한창 유행했던 '꽃길'이라는 단어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는 노력한 만큼 결실을 얻는, 그런 인생을 꿈꾼다. 노력하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다.독립 야구단 출신의 무명 선수. 굽이굽이 너무 많은 길을 돌아왔다. 그런 그가 올 시즌 개막 직후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개막전에 한화 1번 타자로 전격 선발 출장해 1회 첫 타석부터 안타를 쳤다. 그것도 지난해 22승 투수인 더스틴 니퍼트(두산)의 시즌 첫 공을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 냈다. 그 다음 날엔 안타를 무려 네 개나 쳤다. 연장 11회 결승타도 날려 승리의 주역이 됐다. 새로운 인간 승리의 드라마에 야구계가 주목하고 환호했다.그 순간, 다 끝난 듯했던 시련이 한 번 더 찾아왔다. 개막 닷새 만에 왼쪽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전열을 이탈했다. 하늘이 무심하고 야속했다. 그는 "왜 하필 '지금'인가, 왜 또 나인가 싶었다"며 애써 웃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야구선수 김원석의 주무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극복'이다.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났다. 길고도 짧았던 한 달이 흘렀다.어느새 김원석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대전구장 더그아웃에 서 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이 얼마나 감사한 자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새삼 그의 지난 인생과 지금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두서 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제 막 묵은 한을 풀어 버리려던 시기에 부상이 찾아왔다."시즌 준비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그렇게 빨리 부상이 올 줄은 몰랐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햄스트링 통증은 처음 느껴봤다.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회복하려고 애썼다. 지금도 웜업 때 누구보다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고 있다. 아프면 무조건 내 손해니까."-다치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나."가장 먼저 '왜 하필 지금'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왜 내가 또 이렇게 되나, 나는 또 여기까지인가.' 그런데 조금 지나니 다른 마음이 들었다. '지금'만 생각하면 아쉬운 게 맞다. 하지만 내가 다쳐서 재활을 한다고 해도 한화 유니폼을 입은 야구 선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유니폼조차 입지 못했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조차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군에서 경기에 나서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 것은 내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인 거다. 그래서 열심히 재활을 했다. 다시는 아프지 않기 위해서."-그렇게 한 달 만에 돌아왔다."다시 1군에 와 있지만, 여기가 내 자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자리에 오고 싶어하는 선수들이 너무나 많은데, 내가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 라인업에 계속 들어가려면, '열심히'는 물론이고 '잘' 해야 한다."-왜 야구 선수가 됐나."원래 운동을 좋아했다. 처음엔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몸싸움 없는 야구를 하는 게 낫겠다고 하셨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와 병행하면서 취미처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그때 야구로 진로를 정했다."-왜 야구였나."그냥 야구하면서 뛰어 다니는 게 좋았다. 사실 야구를 잘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키가 153㎝밖에 안 됐다. 우리 학교도 잘하는 팀이 아니었다. 사직중 3학년 때 1년 동안 1승 전패를 했다. 부산공고에 갔더니 1학년 때 또 1승 1무 전패를 했다. 이기는 기쁨을 거의 못 느껴봤다. (웃음) 그래도 우리끼리 똘똘 뭉쳐 열심히 했더니 3학년 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에 들었다. 선수가 16명뿐이라 내가 투수·3루수·중견수를 다 할 정도였는데, 선수 60명이 넘었던 천안 북일고도 이겼다. 지금도 어쩌다 모교에 가보면 후배들이 부산고나 경남고에 지는 걸 당연하다고 여길 때가 있더라. 그럴 때면 우리가 청룡기 4강에 갔던 얘기를 하면서 '너희도 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김원석은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신이 난다. 고교와 대학(동의대) 선배인 LG 윤지웅에게 여전히 가끔 청룡기 얘기를 하며 어깨를 으쓱할 정도다. 마냥 즐겁기만 했던 열여덟 까까머리 고교생은 지금 벌써 20대 후반이 돼 있다. 그 사이 그 청년에게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동의대에 진학한 뒤 매일 새벽까지 훈련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그러나 2012년 한화에 투수로 입단하자마자 타자 전향을 권유받았다. 결국 5개월 만에 배트를 쥐고 새 출발을 했지만,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2년 만에 방출됐다.군 복무는 그때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곧바로 현역으로 입대했다.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가 열리던 2013년 10월, 이등병 김원석은 TV 화면으로 동기생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쓸쓸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그의 손에는 낡아빠진 걸레가 쥐어져 있었다. 이제 막 첫 실패를 맛본 젊은 야구 선수의 마음 속에는 그 순간이 아프게 새겨졌다. -그때 TV 속에서 누가 뛰고 있었나."두산 윤명준, 삼성 우동균과 동기생이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학창시절부터 잘 하던 선수들로 유명해서 알고 있었다. TV로 한국시리즈를 보고 있는데, 윤명준이 계속 등판해서 너무 잘 던지는 거다. 속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잘 하더니, 지금도 역시 잘 하네'라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였다. 누가 옆에서 툭 치더니 '걸레 빨러 안 가느냐'고 했다. 시간을 보니 청소할 시간이 다 됐더라."-벌떡 일어나야 했겠다."군대 걸레는 (대전구장 더그아웃의 잿빛 바닥을 가리키며) 딱 이런 색이다. 처음엔 파란색이나 초록색이지만, 나중에는 너무 더러워져서 빨아도 빨아도 그냥 계속 회색이다. (웃음) 그런 걸레를 빨아서 물기를 퍽퍽 털다가 문득 화장실 거울 속 내 얼굴을 봤다. 안 그래도 스물 다섯에 군대를 갔으니 남들보다 늦은 편이었다. 그 순간 '저 친구는 지금 프로에서 저렇게 잘 던지고 있는데, 나는 지금 몸에 걸레 빤 물이나 튀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다시 새롭게 의지를 다졌나."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전역하고 곧바로 연천미라클을 찾아갔다."-독립구단의 현실은 프로와 많이 다르다. 선수들에게 회비를 받아야 운영할 수 있다고 들었다."그렇다. 많이 어렵다. 선수들이 회비 70만원씩을 내도 운영비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그 회비를 감당하기 위해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선수들도 있다. 다행히 나는 감사하게도 아버지가 도와주셨다. '네 뒷바라지 하는 게 내 행복이다. 넌 야구나 열심히 하라'면서 매달 회비를 내주셨다.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하게 됐다."-그렇게 다시 한화로 왔다."이렇게 일찍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인생에서 '서른'의 의미를 아주 크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이 서른에도 별다른 가망 없이 2군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면, 나 스스로 야구를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딱 서른까지 후회나 미련 없이 노력할 만큼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하루 빨리 다른 인생을 선택할 준비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그럼 이제 다른 인생은 당분간 찾지 않아도 되겠다."살짝 보류가 됐다. (웃음) 그렇다고 앞으로도 달라질 건 없다. 내가 1군에 계속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계속 1군에서 살아 남기 위해 매 순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딴 생각이 끼어들 틈 없이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계획은 보류하는 것이다. 급하게 생각하거나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차근차근 야구를 더 잘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 김원석의 부모는 고향 부산에 산다. 아버지는 김명균(62)씨, 어머니는 남경순(58) 씨다. 그는 부모님의 이름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스레 발음했다. 신문에 부모의 이름이 처음으로 실리게 됐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프로야구 선수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웠던 부모다. 이제는 TV로 아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가장 큰 기쁨이다.아들 역시 부모의 자랑거리가 됐다는 게 행복하다. 몸 관리를 위해 금주를 하고 있지만, 아버지와 식사할 때는 유일하게 술을 입에 댄다. 그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만 맥주를 조금 마신다. 최근에는 대전으로 모셔서 한우를 대접했다"며 씩 웃었다. -꿈에 그리던 1군이다. 뛰어 보니 가장 좋은 점은 뭔가."아무래도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것이다. 두 분은 항상 내게 '거만해지지 말고 더 겸손해야 한다. 늘 차분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정작 어머님이 더 들뜨신 것 같다. (웃음) 사실 처음 프로에 지명돼 축하 인사를 받았을 때를 제외하면, 내가 야구 선수라는 것을 부모님도 실감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아무 것도 한 게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TV 중계에도 나오고 주위에서 인사도 받으시니까 어머니가 많이 좋아하신다."-햄스트링 부상이 그래서 더 안타까웠을 듯하다."아무래도 그렇다. 부모님은 그냥 전화로 '괜찮냐'고만 물으시고 별 말씀 안 하셨다. 그래도 통화를 하면 내 기분을 살피시는 게 느껴지니 또 마음이 안 좋다. 괜히 내가 다치는 바람에 또 걱정만 시키는 아들이 돼버렸다. 그럴 때면 '한 달 안에 꼭 다 나아서 어버이날에는 1군에 올라가자. 그때 잘 해서 선물을 드리자'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결국 어버이날 전에 올라왔다."다행히 4일자로 1군 엔트리에 복귀했고, 어린이날 경기에서는 안타도 쳤다. 정작 어버이날에는 경기가 없었지만, 다시 내가 뛰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만족했다."-그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 왔다. 앞으로 남은 선수 생활은 어떻게 이어가고 싶나."이제 겨우 한 발 나갔을 뿐이다. 아무래도 '탄탄대로'는 못 걸을 것 같다. 인생도 그렇고, 야구도 그렇다. 대충대충 했는데도 운이 좋아 잘 풀리고 어려움 없이 나아가는, 그런 건 내 인생이 아닌 것 같다. 내가 100을 준비했을 때, 60~70 정도는 받을 수 있는 인생이라면 좋겠다. 그렇다면 80~90을 받기 위해 120~130을 준비하면 되는 거니까. 그만큼 내가 더 많이 노력해서라도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다."-노력의 보답을 받는 성취감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인가."운동이 그런 것 같다. 내가 하는 만큼 돌아온다. 나도 딱 그만큼만 받고 싶다. 내가 준비하는 만큼, 열심히 하는 만큼, 생각하는 만큼. 그라운드에 나와서 내가 생각한 플레이가 나오고, 안타를 치고, 홈런을 치는 것으로 돌려 받았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보람이 가장 크다. 그 성취감을 계속 느끼고 싶다." 대전=배영은 기자사진=한화 제공 2017.05.12 06:00
야구

[배영은의 질문 있습니다] 김태룡 두산 단장, "화수분 야구는 내 공이 아니다"

"저 친구는 분명히 크게 될 거야."지난 2일 일본 미야자키 소켄구장. 김태룡(58) 두산 단장은 한화와의 연습 경기를 지켜보면서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새 선수가 등장할 때마다 칭찬과 감탄사를 쏟아내느라 입에 침이 말랐다. 주위에서 "어찌 나오는 선수마다 다 '물건'이라고 하느냐"고 핀잔을 줘도 굴하지 않았다. "저 친구는 미래의 4번타자 감이다", "저 선수는 애초에 차세대 주전 유격수로 뽑았다", "마운드에서 저렇게 여유 넘치는 신인 선수는 찾아 보기 힘들다"고 거듭 강조를 하고 또 했다. KBO리그 최강팀의 단장다운 자부심이 듬뿍 묻어났다.김 단장은 야구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대학 시절 부상으로 꿈을 접었던 비운의 야구 선수 출신. 그러나 은퇴 후 프런트 말단부터 시작해 프로야구 단장 자리까지 올랐다. 지난해에는 전무이사로 승진했고, 두산이 한국시리즈를 2연패하면서 성과가 더 빛났다. 김 단장의 성공 신화는 올해 프로야구에 과반이 넘는 선수 출신 단장들이 등장하는 밑바탕이 됐다.김 단장은 인터뷰 요청에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일하고 싶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냥 물러서기에는 김 단장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결국 두산 선수단의 미야자키 숙소 로비에서 김 단장과 마주 앉았다. 사복 재킷 차림이던 김 단장은 사진을 찍겠다는 말에 급히 두산 구단 점퍼를 찾았다. "야구단 단장으로서 구단 옷을 입고 있는 게 맞다"고 했다. '김태룡'이라는 사람보다 '두산'이라는 팀 이름이 앞서야 한다는 의미였다. - 한국시리즈 2연패 후 첫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기대 반, 걱정 반이다. 지난해 통합 우승까지 해서 모두 3연패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다행히 지난 겨울 외국인 선수 재계약과 FA 선수 계약을 순조롭게 잘 마무리했다. 통합 우승 멤버를 그대로 잘 지켜주는 게 프런트의 일이다. 다만 아무래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선수를 8명이나 보낸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국가대표 선수들과 남아 있는 선수들이 호흡을 맞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선수들이 한국시리즈를 2연패하면서 많이 성장했고, 자신감도 많이 붙었다. 현장에서 잘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선수 출신 단장의 표본이 됐다."여기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난 프로도 아닌 아마 선수 출신이다. '내가 프런트로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늘 있었다. 그때마다 그냥 내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만 했다. 직접 야구를 해봤으니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팀, 강한 팀이 될까' 하는 고민을 꾸준히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조금씩 인정도 해주고, 도움도 많이 주기 시작했다."- 고비도 있었을 것이다."1994년 OB(두산의 전신)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 때였다. 당시 내가 1군 매니저였다. 전주에서 쌍방울전이 끝나고 선수들이 다같이 항명에 나섰다. 설득하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상황을 수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매니저로서 사태에 책임을 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구단이 반려했다. 또 운영부장까지 올라오고 몇 년이 지났을 때도 '이제 내가 후배들을 위해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고민이 생겼다. 2009년 쯤이었다. 그 시기에 구단에서 이사라는 직함을 주면서 팀을 계속 관리하게 해줬다. 그리고 2년 뒤 단장이 됐다. 지금까지도 그 부분에 감사하고 있다." - 그동안 팬들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비난도 많이 받았다."속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잘못을 하면 욕은 당연히 먹어야 한다. 야구단 단장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다. 전임 감독들을 교체하면서 '성적이 안 좋으면 단장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던 것도, 우리 팀을 더 잘 만들어 나가겠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쭉 현장에서만 있었고, 누구보다 우리 선수들 구성이나 팀 내부 상황을 잘 안다. 언젠가는 이 멤버로 우승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은 계속 갖고 있었다."- 그 기대를 확신으로 바꾼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베테랑 FA 선수들을 여러 명 다른 팀으로 떠나 보내면서 김승영 사장님과 얘기를 했다. '아프지만, 이 시간을 계기로 팀 세대 교체를 제대로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사장님과 일치했다. 그 결심을 하고 1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 팀을 재편성한 책임자로서 사장님도, 나도 뿌듯함을 많이 느꼈다. 1990년 7월 두산에 입사해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았지만, 한 팀을 최고의 전력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팀이 우승을 하니 소원을 성취한 기분이었다."- 매니저, 운영팀장, 그리고 단장으로서 네 번의 우승을 했다. 어떤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나."아무래도 2015년에 경험한 21년 만의 우승이다. 앞선 우승들도 무척 기뻤지만, 그때는 내가 그 기쁨을 만끽할 경황이 없었다. 2015년은 1년 간격으로 감독을 교체하는 아픔을 이겨내야 했고, 장원준이라는 거물 FA 투수를 보강하면서 확실한 목표를 향해 달려갔던 시즌이다. 단장은 팀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라서 그런 과정 끝에 나온 결과에 더 큰 보람을 느낀 것 같다." 김 단장은 학창 시절 촉망 받던 야구선수였다. 부산 동성중 시절 김경문 NC 감독, 양상문 LG 감독과 함께 야구를 했다. 부산고 3학년 때인 1978년에는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타격왕에도 올랐다. 그러나 동아대 2학년 때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다 어깨를 크게 다쳐 야구를 그만뒀다. 1983년부터 7년간 롯데 스카우트로 일했고, 1991년부터 두산의 전신 OB에서 선수단 매니저 일을 시작했다. 운영팀에서 차근차근 일을 배우고 역량을 쌓았다. 지금 김 단장의 직위는 전무이사. 2011년 8월 단장 선임 이후 현장 경험과 소통 능력을 앞세워 성공적으로 팀 운영을 지휘했다. 지난해 말 사퇴한 민경삼 전 SK 단장과 함께 장수하면서 선수 출신 단장의 모범 사례를 보여줬다. 김 단장의 재임 기간 동안 두산 야구의 '화수분'은 마르지 않고 열렸다.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2016년 통합 우승은 그간의 노력을 총망라한 성과였다. 그래도 김 단장은 거듭 "내 공이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 올해 선수 출신 단장 수가 6명으로 늘었다. 김 단장과 민 전 단장의 공이 크다는 게 야구계 평가다."우리보다 야구 역사가 깊은 일본에선 그동안 감독 출신 인사를 단장으로 올린 팀이 종종 나왔다. 성공 사례도 있고 실패 사례도 있었지만, 나는 늘 '한국도 프로야구 감독 출신이 단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민 전 단장과도 초기에 '다른 야구인도 앞으로 단장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우리가 좋은 밑거름이 되어 보자'는 얘기도 해봤다. 선수를 했다고 꼭 야구만 하라는 법은 없다. 선수 출신 단장도 충분히 팀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런 분위기는 현장에서도 환영할 것이다."- 후발 주자들에게 조언할 부분이 있나."나라고 해서 많은 일이 하루 아침에 잘 된 게 아니다. 숱한 실패나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조언'보다는 '응원'을 하고 싶다. 야구인들은 그야말로 '야구 기술자'들 아닌가. 아무래도 선수를 보는 눈이 더 나을 것이고, 선수단의 전체적인 맥도 빨리 짚을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부분이 장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임 기간 동안 '화수분 야구'의 기틀이 잡혔다."그건 내 공이 아니다. 2군 전용 훈련장인 경기도 이천 베어스파크가 화수분의 원천이다. 처음으로 2군 전용 훈련장을 만든 게 바로 우리였다. 박정원 구단주께서 (이전 2군 훈련장인) 베어스필드를 보러 오셨다가 '선수들이 더 편안하게 운동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주자'며 베어스파크를 짓게 하셨다. 2014년 7월에 문을 연 뒤 2015년과 2016년에 2년 연속 우승을 했다. 그만큼 '환경'이 중요하다. 베어스파크는 일본 구단에서도 견학을 올 정도로 시설이 잘 돼 있다. 지난해만 해도 한신, 요코하마, 소프트뱅크에서 다녀갔다. '화수분'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선수들이 편안하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게 먼저다. 그 위에 코칭스태프와 프런트의 노력이 뒷받침됐다."- 8월이면 단장이 된지 만 6년이 된다."한 팀에서 25년을 보냈다. 팀의 역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항상 머리에 넣고 살아온 것 같다. 사람이니까 100% 성공은 하지 못했다. 실수도 하게 된다. 대신 실패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었다.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하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가고 싶었다. 1년 간격으로 감독이 바뀌는 아픈 시기를 지나 지금 김태형이라는 감독을 모시게 됐다.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자 경험이라고 여기고 싶다."-앞으로의 포부가 있나."매니저로 일할 때부터 늘 '어떻게 하면 우리 선수들이 큰 사고 없이,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야구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대한민국 서울을 연고로 하는 팀으로서, 정말 '명문'이 됐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다. 앞으로는 그동안 나왔던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사고가 다시는 없길 바라고 있다. 구단도 선수들에게 철저하게 교육을 시킬 것이고, 선수들도 점점 높아지는 몸값에 걸맞게 진짜 프로가 됐으면 좋겠다. 야구 잘하는 구단을 넘어 모든 면에서 명문 구단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는 아마추어야구 선수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밑바닥부터 위로 올라간 경험을 비롯해 프로야구단에 수십 년 몸 담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조언도 해주고 싶다."- 올해는 두산에게 어떤 시즌이 될까."한 마디로 '타이틀 방어'에 나선다. 나머지 9개 구단의 도전을 받는 챔피언 팀의 입장에서 지금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단장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고 싶다. 무엇보다 팬들에게도 꼭 최고의 팀이 됐으면 좋겠다. 2연패를 하면서 우리 팬들의 열정과 가치를 다시 한 번 깊이 느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선수단 지원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드리고 싶다." 배영은 기자 2017.03.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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