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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엔드게임] 아버지 어깨 위에서, 아버지보다 큰 꿈을 이룬 이정후

아들은 아버지보다 고집이 셌다.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의지를 좀처럼 꺾지 않았다.아들이 편한 삶을 살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그래도 반대했다. 야구가 아니라 골프 선수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졌다. 2007년 광주 서석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가는 아들에게 이버지는 딱 한 마디만 했다."왼손으로 쳐라." 이종범(53·전 LG 트윈스 코치)은 왼손잡이다. 밥 먹을 때도 사인을 할 때도 왼손을 쓴다. 단 하나, 야구만 오른손으로 했다. 유격수를 하려면 오른손을 써야 했다.그가 1993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 KBO리그를 뒤흔들자 “이종범이 왼손으로 쳤다면 한국 야구가 달라졌을 것”이란 말이 나왔다. 타격만 보면 좌타자가 유리하기 때문이다.이종범이 4할 타율에 도전했던 1994년 스즈키 이치로(50·오릭스 블루웨이브)도 일본에서 신기의 타격을 보여줬다. 배트 스피드와 콘택트가 초(超)아시아급이었던 이종범과 이치로는 자주 비교됐다. 그러나 당시 한일 야구 격차가 상당히 컸기에 미국 메이저리그(MLB)는 이치로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이종범과 반대로 이치로는 선천적인 오른손잡이다. 공도 오른손으로 던지지만, 타격만 왼손으로 한다. 우투수의 투구를 보기 유리하고, 타석에서 1루까지의 거리가 가까운 좌타자의 장점을 십분 활용했다.이치로는 2001년 MLB에 진출해 아메리칸리그 신인왕과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미·일 통산 4367안타를 때려낸 뒤 2019년 은퇴했다. 이종범은 1998년 한국인 야수 최초로 일본(주니치 드래건스)에 진출했으나 치명적인 오른 팔꿈치 부상을 입었다. 그때 태어난 아들이 이정후다. 이종범은 일본에서 3년을 뛰고 2001년 KBO리그로 돌아왔다. 빅리그의 꿈은 허공에 흩어졌다. 아버지는 아들이 야구 선수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재능이 있더라도 프로에서 성공하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다. '이종범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훈장보단 꼬리표가 될 거라 걱정도 했다. 그래도 '꼬마 이정후'의 눈이 너무나 반짝반짝 빛났다. 결국 아버지가 졌다. 대신 아들의 왼손에 방망이를 쥐여줬다.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가란 뜻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지나칠 만큼 잘 따랐다. 어려서부터 "내 롤모델은 이치로"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치로처럼 왼손으로 치고 오른손으로 던졌다. 이치로의 등 번호 51번도 달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능을 물려줬지만, 코치가 되지는 않았다. 스스로 깨닫고 이겨내기를 기다리고 응원했다. 아버지보다 큰 선수가 되고, 큰 꿈을 꾸라는 무언의 가르침이다.이정후는 이치로의 기능을 치밀하고 영리하게 받아들였다. 2017년 프로에 데뷔해 그가 보여준 강력한 허리 회전과 넓은 콘택트 존은 이치로와 비슷했다. KBO리그 7시즌 동안 타율이 0.340(통산 3000타석 이상 기록한 타자 중 역대 1위)에 이른다.2019년 이종범은 한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에게 이치로 책을 3권 사줬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친 타자도 4타수 무안타에 그친 날 집에 와서 4~5시간을 더 훈련한다고 하더라. 아빠는 선수 시절에 술도 먹고 했잖냐. 아빠 말고 이치로를 닮아라."이건 방송용 코멘트다. 이정후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아버지보다 키가 한 뼘 더 커버린 이정후는 이미 '이종범의 아들'이 아니었다. 이종범이 '이정후의 아버지'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종범과 달리 이정후는 서울 휘문고 졸업 후 프로에 직행했다. 방위로 복무했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병역 특례를 받았다. 1994년 정규시즌 MVP였던 아버지처럼 아들은 2022년 MVP에 올랐다. 아버지가, 아버지 세대가 이룬 반석 위에서 한국 최고의 타자로 성장했다. 그의 나이 불과 25세다.이정후는 13일(한국시간) 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6년 총액 1억1300만 달러(1483억원)에 계약했다. 한국 선수 최초로 1억 달러 이상의 빅딜을 끌어냈다. 일본에서 멈춰 선 아버지와 달리 곧바로 태평양을 건넜다.이정후가 2017년 데뷔하자마자 1군 선수로 활약하자 이종범은 “정후는 잡초처럼 자란 게 아니라 좋은 환경에서 곱게 컸다. 힘든 프로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내 아들이라는 게 부담이 될까 봐 정후가 어릴 때 야구하는 걸 반대했다”고 떠올렸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들은 아버지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생각보다 아들은 더 강했다. 아들의 꿈이 더 컸다. 고집 센 아들은 아버지의 어깨에 올랐다가 세계 최고의 무대로 도약했다.스포츠1팀장 2023.12.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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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올스타] KBO 40주년 올스타 TOP4 발표...선동열, 별 중의 별로 선정

KBO리그의 역사를 대표하는 40주년 올스타 최고의 4인이 발표됐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16일 리그 4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레전드 40인 중 TOP 4, 최다 득표 레전드 4명을 올스타전 경기 전 공식행사를 통해 발표했다. 선정위원회에서 추천한 177명의 후보 가운데 전문가 투표(80%)와 팬 투표(20%) 결과를 합산해 선정한 40인의 레전드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은 4명의 레전드는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최동원(롯데 자이언츠), 이종범(KIA 타이거즈), 이승엽(삼성 라이온즈)이다(이상 득표 순). 최다 득표 1위를 차지한 선동열은 현역시절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가졌던 명실상부한 국보급 투수다. 1985시즌 해태에서 데뷔한 이래, 1996시즌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기 전까지 해태에서만 11시즌을 보내면서 해태 왕조 건설의 선봉에 섰다. 이 기간 동안 해태는 여섯번(86~89, 91, 93)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커리어 막판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면서 100승과 100세이브를 돌파했고, KBO 리그에서 1,000이닝 이상을 투구한 투수를 기준으로 통산 평균자책점(1.20), 완봉(29), WHIP(0.80)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선동열은 전문가 투표 156표 중에서 155표(79.49점), 팬 투표 1,092,432표 중 631,489표(11.56점)를 받아 총점 91.05로 1위의 영광을 차지하게 됐다. 선동열은 2011년 선정한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10에도 선정된 바 있다. 최다 득표 2위에 오른 최동원은 ‘무쇠팔’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팬들에게는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으로 각인된다. 별명에 걸맞게 통산 완투 2위(81개), 최다 연속 시즌 200이닝 이상 투구 공동 1위(5시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통산 평균자책점은 선동열에 이어 2위(2.46), 통산 WHIP는 3위(1.15)에 올라있다.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던 1984시즌이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해당 시즌에 기록한 27승은 역대 단일 시즌 최다 승리 2위, 223탈삼진은 최다 탈삼진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 시즌 최동원은 정규시즌 MVP와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았다. 최동원은 전문가 투표에서 156명 전원(80.00점)에게 표를 얻었으며 팬 투표에서 545,431표(9.99점)를 확보, 총점 89.99를 얻었다. ‘야구천재’ 이종범은 별명에 걸맞게 공수주에서 빠지는 것 없는 하나 없는 만능 플레이어였다. 명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90년대 4번의 골든글러브(93, 94, 96, 97) 타이틀을 차지했고 일본에서 복귀해서는 외야수로 활약하며 두 차례(02, 03)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던 1994년이 이종범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시즌 막판까지 4할에 육박하는 타율을 오가며 원년 백인천 이후 첫 4할 타자 탄생을 기대하게 했다. 최종 성적은 타율 0.393으로 역대 단일 시즌 최고 타율 2위에 해당하는 기록. KBO 리그 최초의 200안타 달성도 노렸으나 196안타로 시즌을 마감했고 이는 역대 단일 시즌 최다 안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또 다른 별명답게 통산 도루 2위(510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94시즌 기록한 84도루는 현재도 깨지지 않는 역대 단일 시즌 최다 도루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종범은 전문가 투표에서 149표(76.41점), 팬 투표에서 595,140표(10.90점)를 얻어 총점 87.31로 최다 득표 3위에 자리했다. ‘라이언 킹’ 이승엽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 홈런 타자’로, KBO 리그의 대부분의 홈런 관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산 홈런 1위(467개), 역대 단일 시즌 최다 홈런 1위(56개 – 03년)를 비롯해 최연소 100홈런(22세 8개월 17일), 최연소·최소경기 200홈런(24세 10개월 3일, 816경기), 최연소·최소경기 300홈런(26세 10개월 4일, 1,075경기), 7시즌 연속 시즌 30홈런 등의 다양한 홈런 관련 기록을 갖고 있다. 이 외에도 이승엽은 통산 타점, 득점, 루타, 장타율, OPS 부문에서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고 골든글러브를 10회(97~03, 12, 14, 15), 정규시즌 MVP를 5회(97,99, 01~03) 각각 수상해 이 부문 최다 수상 타이틀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승엽은 전문가 투표에서 149표(76.41점), 팬 투표에서 553,741표(10.14점)을 획득, 총점 86.55를 얻어 이종범에 이어 근소한 차이로 4위에 올랐다. 한편 이 날 KBO 허구연 총재는 최다 득표 레전드 4명에게 트로피를 수여했다. KBO는 후반기 동안 남은 레전드 36명의 명단을 순차적으로 발표해 나갈 예정이다. 40명 레전드와 관련된 특별한 스토리는 KBO의 공식 발표에 맞춰 네이버 스포츠의 KBO 40주년 특집 페이지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잠실=차승윤 기자 chasy9(@edaily.co.kr 2022.07.16 19:21
야구

[창간특집]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두산그룹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로 리그에 참여했다. 당초 OB 베어스는 서울 연고를 원했지만, MBC에 밀려 대전 연고로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대전행을 받아들인 조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3년 후 서울 연고 이전'을 보장받았다. 실제 1985년부터 대전을 떠나 서울로 연고를 옮겼다. 더 중요한 건 선수 구성이었다. MBC의 연고 지역인 서울 출신 선수를 나눠 영입하는 2대1 드래프트를 원년 개막에 앞서 진행했다. 당시에는 출신 고등학교 연고 지역 구단에 입단해야 했는데 대전 지역 고등학교 전력이 약해 서울 팜을 공유했다. MBC가 먼저 2명을 선택하면 1명을 선택하는 방법이었는데 이를 통해 박철순(배명고), 조범현(충암고), 구천서(신일고) 등을 영입할 수 있었다.윤동균(71) 현 일구회 회장도 드래프트에 따라 OB 유니폼을 입었다. 서울 동대문상고를 졸업해 MBC 입단도 가능했지만 불발돼 OB 베어스와 인연이 닿았다. 실업야구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야구 원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3월 28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와의 구단 역사상 첫 번째 경기에 3번 우익수로 선발 출전해 5회 팀 1호 결승타를 때려냈다. 그해 77경기에 출전해 타율 0.342(284타수 97안타), 8홈런, 47타점을 기록했다. 백인천(MBC·0.412)에 이은 리그 타격 2위. 신경식, 김우열과 함께 중심 타자로 맹타를 휘둘러 OB 베어스를 원년 한국시리즈(KS) 우승으로 이끈 주역이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개막보다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게 남달랐다. 당시 내 나이가 서른넷이었다. 서른넷이면 노장 중의 노장이었다. 실업야구 포항제철에서 코치 겸 선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많아서 프로를 간다는 게 참 애매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더라. 운동을 관두지 않고 오래 한 걸 잘했구나 싶었다. 프로에서 뛴다는 게 영광스럽기도 하고 감회가 새로웠다."-프로야구 원년 선수대표로 선서까지 했는데."그걸 6개 구단에서 서로 하려고 했다. (웃음) 다들 하길 원하니 선뜻 결정이 났겠나. 그러다가 6개 구단 대표가 모여 '나이가 가장 많은 선수가 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당시 나하고 김우열의 나이가 가장 많았는데 내가 1949년 7월생이고 김우열이 9월생이다. 개막전이 열린 곳이 동대문야구장인데 떨리거나 그런 건 없었다. 영광스러울 뿐이었다."-당시 OB가 아닌 MBC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는데.“선수 드래프트 마감 하루 전까지 윤동균과 김우열을 뽑겠다는 구단이 없더라. 서울 연고인 MBC에선 '둘 다 필요 없다'고 영입을 포기했었다. OB에선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이광환 코치가 셋이 모여 고심하다가 '이 멤버로 가면 꼴찌다. 늙었어도 영입하면 1, 2년은 충분히 써먹을 수 있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던 거 같다. 특히 이광환 코치가 강력하게 뽑아야 한다고 얘길 했다더라. 아마추어에선 윤동균과 김우열이 수위 타자도 차지하고 소위 날아다녔다. 결과가 어땠나. 프로야구 원년 OB가 우승할 때 윤동균과 김우열이 3, 4번 타순에서 다 했지. (웃음)” -당시 OB의 연고는 대전이었는데."어쩔 수 없었다. 어느 기업이든지 잠실과 지방 중에 택하라면 100이면 100 서울을 선택하지 않겠나. 서로 대전을 안 가려고 하니까 (구단주 회의에서) MBC에 먼저 서울 연고 조건을 준 거고 OB에는 '대전에서 3년을 보내면 서울로 연고를 옮겨주겠다'는 얘기를 한 거다. 그때는 드래프트에서 선수를 학교 연고로 뽑았다. 광주상고나 광주일고를 나왔으면 무조건 해태로 가야 했다. 다만 광주 출신인데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했으면 해태를 못 갔다. 난 동대문상고를 나와 무조건 서울이었다." -원년 전지훈련을 마산에서 보냈는데."말이 전지훈련이지 제대로 된 운동장이 있었겠나. 프로도 아니었지. 당시 마산고나 마산상고 운동장을 빌려 연습했는데 김성근 감독이 마산상고 감독을 오래 하셔서 마산하고 인연이 있었다. 원년에는 전지훈련을 마산에서만 한 40일 정도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호텔에서 묵지 않고 '한진여관'이라는 곳에서 잠을 잤다. 당시 '한진여관' 사장이 윤상원 KBO 심판위원의 아버지였다. 그때 체중이 94㎏ 정도였는데 10㎏을 빼고 올라왔다. 체중을 줄일 방법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가면 숙소에서 운동장까지 뛰어다녔다. 왕복 5㎞ 정도 거리였는데…나중에 밥 먹을 때 수저들 힘이 없더라. (웃음) 그렇게 체중 조절을 했으니 개막전 때 얼마나 몸이 가벼웠겠나."-박용곤 구단주의 야구 사랑도 대단했는데."구단 창단 후에 당시 박용곤 구단주가 선수단 미팅을 하는데 '우리가 삼성을 이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라. 그런 뒤 '여러분들이 삼성에 이길 건 하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야구입니다. 저는 사람 좋은 것보다 야구 잘하는 사람을 원합니다'라고 강조하셨다. 구단 창단해서 선수단에 처음 한 말이었는 데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원년에 유독 삼미(16전 전승)에 강한 이유가 있었나."삼미가 워낙 약했다. 당시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OB를 삼미 다음으로 꼽았다. 삼미가 꼴찌 후보였고 'OB는 잘해야 5등 한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다른 구단 이기기 힘들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우승을 했으니 얼마나 큰 이변이었나. 그때 멤버가 꽤 탄탄했다. 1번 타순에 구천서와 양세종이 번갈아가면서 들어갔고 3번은 내가 쳤다. 4번은 김우열, 5번은 김유동과 신경식, 하위 타순을 이홍범·이근식·유지훤이 맡았다. 포수는 조범현과 김경문이었다. 개막하기 전까지 다른 팀에서 신경식이나 구천서 같은 선수를 몰랐을 거다. 두 선수는 실업야구 상업은행에서 뛴 경력이 있어서 난 실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멤버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특히 OB는 타선이 강했는데."백인천(당시 MBC) 감독이 규정타석을 채워 타격왕(0.412)에 올랐지만, 타격 10걸에 OB 선수(4명)가 꽤 있었다. 내가 백인천 감독과 경쟁하다가 마지막에 밀려 2위(0.342)였다. 신경식(0.334), 김우열(0.310), 구천서(0.308)까지 쟁쟁했다. 타격보다 투수가 약했다. 투수진이 은근히 괜찮았지만, 유명한 투수가 부족했다. 삼성과 비교하는 게 어려웠다. 우린 박철순 하나였는데 삼성은 그때 황규봉·권영호·이선희까지 국가대표 투수가 즐비했다. 그런 삼성을 우리가 한국시리즈에서 박살 냈다. (웃음)" -당시 룸메이트는 누구였나."내 룸메이트는 나이가 가장 어린 김진홍이었다. 그때는 고참과 막내가 함께 썼는데 김우열은 항상 김광수를 데리고 다녔다. 같은 선린상고 출신이라는 게 이유였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는."역시 백인천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굉장히 인상 깊었다. 일본에서 프로생활을 했다는 걸 야구장에서 실감할 정도였다. '일본 프로야구 벽이 높구나'하는 생각도 들더라. 일본에는 잘하는 선수가 더 많지 않았겠나. 한국에 와서 이 정도 활약하니까 일본 야구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상대하기 어려웠던 '천적'이 있었나."삼성의 이선희 투수였다. 왼손 투수인데 유독 이선희만 만나면 힘들었다. 아무래도 잘 던지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도 많이 약했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당연히 한국시리즈 우승 아니겠나. 1차전을 대전에서 하고 2차전을 대구에서 하는 일정이었다. 3차전부터 7차전까지는 모두 서울에서 하는 데 대전 첫 경기가 무승부(현장 15회 3-3)였다. 2차전은 대구에서 완전 박살(0-9)이 났다. 콜드게임으로 끝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삼성에는 어렵다는 걸 실감했다. 2차전을 크게 지고 난 뒤 부담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당시 박용민 단장이 '내일 아침에 서울 가면 무조건 숙소생활이다'고 하더라. 당시에는 경기 끝나면 술을 자주 먹던 시절인데 단체로 묶어놓을 생각이었던 거 같다. 그런데 이광환 코치가 '안 됩니다, 합숙시키면 안 되고 풀어줘야 한다'고 얘길 했다. 그렇게 해서 대구에서 단체로 술을 먹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숙소도 들어가지 않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웃음)" -분위기가 확 달라졌나."3차전부터 4연승을 해 우승한 거 아닌가. 7차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대구에서 술을 먹으면서 패한 걸 다 잊고 서울에 올라온 게 컸던 거 같다. 이광환 코치는 당시에 지면 관두겠다며 사표를 들고 다녔다고 하더라. 서울에 오자마자 4연승을 했으니 기적 아닌가. OB는 당시 우승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했으니 난리가 났다."-개막전 때 부정배트 논란도 있었는데."그때 방망이는 내가 봐도 어느 정도는 알루미늄배트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박용민 단장이 기자 생활도 오래 하면서 일본 특파원을 했었다. 야구를 좋아하니까 일본에서 배트를 수입했는데 아마 사용 정지된 배트를 사 온 게 아닌가 싶다. 선수들은 구단에서 나눠준 배트를 썼다. 포항제철에선 알루미늄 배트를 쓰다가 프로에 오면서 나무 배트를 썼다. 당시엔 압축배트나 이런 거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절이다." -좀 더 빨리 프로야구가 출범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없었나."프로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절이다. 프로야구 출범할 때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의 공이 크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그분이 야구를 참 좋아해 노력도 많이 했다더라." -최근 프로야구에서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종범이 아들(키움 이정후)이다. 대단한 선수더라. 아비보다 낫다고 본다. (웃음) 이종범은 체격이 크진 않지만 야무지게 생겼는데 이종범 아들은 어떻게 보면 약해 보일 수 있더라. 그런데 1년 사이에 몸도 더 좋아진 거 같고 요즘엔 홈런도 잘 치지 않나. ‘야구천재’라고 본다. 팀 공헌도는 다른 선수들보다 더 좋은 거 같다. 발 빠르고 타격 잘하고 수비도 좋고 뭐 하나 아쉬운 게 있나. 이젠 파워까지 겸비했다. 이정후에게 도전할 만한 타자는 강백호(KT)인데 둘을 놓고 감독으로서 선택하라면 이정후다.“-일간스포츠에 대한 추억이 있나."1983년인가 일간스포츠에 가서 한국시리즈 해설도 하고 관전평도 쓰고 그랬다. 당시 한국시리즈(해태-MBC)가 광주에서 열렸는데 현역 선수다 보니까 광주를 못 가고 일간스포츠에서 TV 켜놓고 경기를 봤던 기억이 있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0.09.2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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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IS] '뭉쳐야 찬다' 이종범, '바람의 아들' 수식어 입증한 활약

이종범이 '바람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축구장에서도 입증했다. 온몸을 날리는 헌신적인 수비로 풀타임을 소화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예나 지금이나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22일 방송된 JTBC '뭉쳐야 찬다'에는 야구선수 출신 김병현이 어쩌다FC 정식 멤버로 합류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간 스케줄이 맞지 않아 늦게 합류하게 됐다고 전했다. 김병현에 이어 이날의 새로운 용병이 소개됐다. 바로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었다. 자타공인 야구천재 이종범은 축구 실력 역시 뛰어나기로 유명해 '뭉쳐야 찬다' 시청자 게시판에 이종범을 출연시켜달라는 글이 쇄도했던 상황. 양준혁과는 1993년 프로야구 입단 동기로 선수 시절 함께했다. 이종범은 "코치를 그만뒀다. 유학을 준비 중이다. 편안하게 나왔다. 출연하게 돼 영광이다. 오늘은 승리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양준혁과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 웃음을 전했다. 양준혁과 이종범의 타석 대결이 벌어졌다. 피지컬 테스트를 위함이었다. 1개 차이로 이종범이 승기를 잡았다. 이후 훈련에 돌입했다. 양준혁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훈련에 참여했고 이종범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활약을 기대케 했다. 어쩌다FC의 열네 번째 공식전은 강서구 경찰서 축구팀 강서FC였다. 강력계부터 경찰 특공대까지 모인 막강한 팀을 상대로 이종범은 수비를 담당했다. 몸을 날려 슬라이딩으로 상대를 막아냈다. 열정적인 플레이에 허벅지와 무릎 부상을 당했지만 이종범의 열정은 경기 후에도 식지 않았다. "난 용병이다. 용병은 돈을 주고 사온 거니까 용병 값을 해야 하는 거 아니겠나"라고 너스레를 떨던 이종범. 이 말을 마지막까지 지켜내며 활약했다. 강서FC와의 경기는 아쉽게 2대 4로 패했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19.12.23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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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뭉쳐야찬다' 출격…어제(23일) 녹화 양준혁과 만남성사

이종범이 '뭉쳐야 찬다' 녹화에 합류해 양준혁과 만났다. 23일 진행된 JTBC '뭉쳐야 찬다' 녹화 현장에는 야구계의 또 다른 레전드 이종범이 새로운 용병으로 등장해 양준혁은 물론 전설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종범은 '바람의 아들', '야구천재', '종범신' 등 범상치 않은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주름 잡은 톱클래스 플레이어다. 그가 숨은 축구 실력자임이 알려지면서 시청자들의 출연 요청이 쇄도했던 만큼 어쩌다FC에 전력을 더할 수 있을지 기대가 모아진다. 특히 이종범과 양준혁이 야구가 아닌 축구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야구계의 두 신이 또 어떤 신경전을 벌였을지, 마운드가 아닌 축구 필드 위에서는 색다른 팀워크를 이뤘을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오늘(24일) 오후 9시에 방송되는 '뭉쳐야 찬다'에서는 수영선수 박태환이 새로운 용병으로 출격해 치열한 열두 번째 공식전을 치른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19.11.2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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