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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 파이트클럽] 프란시스 은가누 효과...링과 옥타곤 경계가 사라진다

프로복싱 WBC 헤비급 챔피언 타이슨 퓨리(35·영국)와 종합격투기 UFC 전 헤비급 챔피언 프란시스 은가누(37·카메룬)의 복싱 대결이 일으킨 후폭풍은 어마어마하다.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퓨리가 판정승을 거뒀다. 심판전원일치가 아닌 2-1 스플릿 판정승이었다. 경기 전 누구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지구 최강 복서로 인정받았던 퓨리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은가누의 주먹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 퓨리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스스로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판정 결과가 나왔을 때 관중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은가누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SNS 상에서도 판정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종합격투기 선수와 관계자들은 복싱의 판정시스템을 대놓고 조롱했다. 반면 복싱 쪽에선 “제대로 망신당했다”는 자조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공식적인 결과와 상관없이 승자는 은가누와 종합격투기였다.이번 은가누의 복싱 도전은 복싱과 종합격투기의 콜라보를 가속화시키는 도화선이 될 전망이다. 링과 케이지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복싱과 격투기의 결합은 제법 오래된 얘기다. 그 시초는 1976년 전설의 헤비급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일본의 레전드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의 ‘이종(異種)격투기’ 경기였다. 이는 오늘날 종합격투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무술끼리 맞붙는 순수한 이종격투기였다.경기 내내 알리는 선 채로 이노키를 도발했고, 이노키는 드러누워 발차기만 거듭했다. 종합격투기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당시에는 지루하고 우스꽝스러운 대결이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는 다른 무술을 연마하지 않은 순수한 복서와 레슬러가 실전 싸움을 벌일 때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잘 보여준 교과서 같은 경기였다.일본 입식타격기 대회 K-1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1990~2000년대는 복서들의 도전이 잇따랐다. WBO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던 레이 머서와 섀넌 브릭스(이상 미국), IBF 헤비급 챔피언 프랑소와 보타(남아공) 등이 K-1에 진출해 킥복서들과 대결했다. 이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훨씬 지난 시점에서 K-1에 뛰어들었다. 큰 실패만 맛본 뒤 조용히 사라졌다. WBA 슈퍼페더급 챔피언 출신인 최용수도 K-1에서 일본 킥복서 마사토와 경기를 치러 무참히 졌다.최근에는 종합격투기 선수들의 복싱 도전이 줄을 잇고 있다. 그 시작은 UFC 최고의 흥행메이커 코너 맥그리거(아일랜드)였다. 2016년 8월에 열렸던 ‘무패 복싱 챔피언’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미국)와 가진 복싱 대결에서 맥그리거는 10라운드 TKO패를 당했다. 그 경기를 본 관계자와 팬들은 역시 ‘종합격투기 선수가 복싱으로 싸우는 것은 무리’라는 반응을 보였다.이후에도 UFC 전 웰터급 챔피언 타이슨 우들리(미국)와 UFC에서 맥그리거를 이겼던 네이트 디아즈(미국) 등이 복싱에 도전했지만 모두 패했다. 이들의 상대는 2000만 이상 구독자를 자랑하는 복싱 유튜버 제이크 폴이었다. 그는 전문복서이기는 하지만 정상급 실력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UFC에서 최정점을 찍었던 선수들이 하나같이 제이크 폴에게 당했다. 종합격투기와 복싱은 전혀 다른 영역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가누는 그런 고정관념을 무참히 깼다. 은가누의 선전은 종합격투기가 언젠가 복싱까지 집어삼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은가누는 석연찮은 판정패라는 결과와 상관없이 많은 것을 얻었다. 그동안 UFC에서 벌어들은 총 대전료의 몇 배에 달하는 1000만 달러(유료 TV 구매 수익은 별도)를 벌어들었다. 그전까지 은가누가 한 경기에서 받았던 가장 많은 개런티는 60만 달러였다. 퓨리와 경기를 마친 뒤 마우리시우 슐레이만 WBC 회장은 “은가누를 헤비급 랭킹 10위 안에 올리겠다”고 밝혔다.고국 카메룬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다가 프랑스로 이주해 27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격투기를 시작한 은가누는 프로복싱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지금 은가누의 명성이라면 종합격투기에서도 큰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프로복싱 빅매치는 흥행 레벨이 다르다. 막대한 돈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점만으로도 은가누는 진정한 승자다. 종합격투기 선수들이 복싱에 자꾸 눈을 돌리는 이유도 돈이 결정적이다. 최고의 무대라 할 수 있는 UFC에서 톱클래스로 인정받는 선수는 경기당 50만 달러에서 최대 300만 달러 정도의 파이트머니를 받는다. 반면 프로복싱은 빅매치의 경우 수백만 달러 대전료는 기본이다. 한 경기에 1000만 달러가 넘는 대전료가 오가기도 한다. 종합격투기 선수들이 복싱 무대에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복싱계도 종합격투기 선수들의 도전을 반기고 있다. 최근 복싱은 새로운 스타의 부재에 허덕이고 있다. 특히 미국 복싱 시장의 경우 좋은 자원들이 종합격투기 쪽으로 흘러가면서 주도권을 유럽에 빼앗겼다. 그나마 멕시코 등 중남미계 복싱 스타들이 흥행을 이끄는 실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UFC 등에서 이미 이름을 알린 스타 파이터들이 복싱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복싱계에서도 반가운 일이다.이데일리 기자 2023.11.03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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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의 파이트 클럽] 전설이 된 이노키, 격투스포츠의 혁명가

필자가 안토니오 이노키를 직접 본 것은 네 차례 정도 되는 것 같다. 두 번은 이노키가 방한했을 때고 두 번은 일본 격투기 대회 출장에서였다. 2006년 한국에서 이노키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몰랐다. 왕년의 유명했던 프로레슬링 선수로만 알았다. 다만 그와 악수를 나눴을때 엄청나게 큰 손과 떡 벌어진 어깨에 놀란 기억이 있다. 유독 발달한 그의 턱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왜 무하마드 알리가 이노키를 '펠리컨'이라 불렀고, 이노키가 "내 턱으로 네 주먹을 부숴버리겠다"고 큰소리쳤는지 이해가 됐다. 이노키는 격투스포츠 역사를 바꾼 혁명가였다.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의 도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격투스포츠는 아예 태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재일동포였던 그의 스승 역도산(일본명 리키도잔)은 프로레슬링을 철저히 ‘국뽕’으로 이용했다. 일본 전통 스포츠인 스모 선수 출신이었던 역도산은 일본식 당수 기술인 ‘가라데 촙’으로 반칙을 일삼는 미국 거인들을 쓰러뜨렸다. ‘천황 다음 역도산’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노키는 달랐다. 김일, 바바 쇼헤이(선수명 자이언트 바바)와 더불어 역도산의 3대 제자였던 이노키는 그 이상을 바라봤다. 그는 일본 프로레슬링을 대표하는 간판스타였지만,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1976년 6월 26일 빌본 도쿄의 부도칸(무도관)에서 열린 당시 복싱 헤비급 세계챔피언 알리(당시 34세)와 대결은 이노키가 어떤 마인드를 가진 사나이였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이야 종합격투기가 전 세계적인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지만, 그때는 서로 다른 투기 종목 선수가 ‘이종(異種) 대결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특히 알리라는 최고의 복서이자 셀럽이 그런 경기에 나선다는 건 더욱 그랬다. 이노키는 자신이 가진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 알리를 격투기 링으로 끌어들였다. 알리에게 대전료 600만 달러를 약속했다. 2년 전 아프리카 자이레의 킨샤사에서 열린 조지 포먼과 헤비급 타이틀매치에서 알리가 받은 대전료는 500만 달러. 그 금액은 당시 프로복싱 역사상 최고 대전료였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 무승부였다. 이노키는 알리의 강펀치를 피하기 위해 매트에 드러누워서 킥을 날렸다. 알리는 그런 이노키를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 ‘세기의 대결’로 전 세계의 큰 관심을 모았던 경기는 ‘세기의 졸전’으로 전락했다. 경기가 끝난 뒤 알리는 이노키를 향해 “누워서 돈을 버는 것은 매춘부나 하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이노키는 알리에게 “매춘부가 누워있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이라고 받아쳤다. 세월이 흘러 이 경기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복서인 알리는 알리대로, 레슬러인 이노키는이노키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싸웠다. 이 경기는 종합격투기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이 경기 아이디어를 발판삼아 일본에선 프라이드FC, 미국에선 UFC가 탄생했다. 심지어 알리는 서있고, 이노키는 드러누운 그 우스꽝스러웠던 자세는 ‘알리-이노키 포지션’이라는 이름으로 종합격투기에서 지금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알리와 대결을 통해 이노키는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거뒀다. 하지만 그에게 이 경기는 동시에 큰 시련이 됐다. 알리와 경기에 실망한 일본 프로레슬링 팬들은 이노키에게 등을 돌렸다. 티켓이 안팔려 예정된 대회가 줄줄이 취소되기까지 했다. 이노키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실전성을 강화한 프로레슬링’을 선언했다. 이른바 ‘스트롱 스타일’이었다. 그는 타 종목 선수와 여러차례 이종격투기 대결을 펼치면서 격투스포츠 대중화에 뛰어들었다. 1987년에는 간류섬이라는 무인도에서 마사 사이토라는 선수와 심판도, 관객도, 제한시간도 없는 격투기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저녁에 시작해 밤늦게 끝난 무인도 격투에서 이노키는 2시간 5분 14초 만에 슬리퍼 홀드로 TKO승을 거뒀다. 일본 팬들은 파격적인 경기에 다시 관심을 나타냈다. 그렇게 이노키는 재기에 성공했다. 이노키의 선수 인생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극적이었고, 반전의 연속이었다. 이노키의 파격은 멈출 줄 몰랐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 북한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이벤트 쇼‘인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린 건 이노키가 아니면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이노키는 1995년 4월 28~29일 능라도 경기장에서 ‘콜리전 인 코리아’라는 프로레슬링 대회를 개최했고, 직접 출전도 했다. 이노키를 비롯해 릭 플레어 등 세계적인 레슬러들이 북한에서 경기를 치렀다. 심지어 파킨슨병 투병 중이었던 알리도 북한에 동행했다. 이노키는 스승이었던 역도산의 고향을 방문한다는 의미와 스포츠가 세상을 평화롭게 바꿀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대회를 첫째 날 16만 명, 둘째 날 19만 명 등 이틀에 걸쳐 35만 명이 관람했다. 현재까지도 이는 역사상 최대의 레슬링 이벤트로 남아있다. 당시 북한에서 이노키와 경기를 치렀던 플레어는 “북한에서 이노키와 대결한 것은 매우 겁나는 경험이었다. 북한 당국이 미국 선수단을 사흘이나 더 붙잡아 두고 공개적으로 성명 발표를 요구해 매우 심란했다”고 회고했다. 물론 이노키의 인생이 늘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줄곧 야쿠자와 결탁설이 끊이지 않았다. 독단적인 기질 탓에 그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이노키가 생전에 남겼던 엄청난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노키는 한국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한국 국민에게 이노키는 김일의 영원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김일과 이노키는 역도산 문하에서 같은 방을 썼던 동료였다. 17세 이노키의 프로레슬링 공식 데뷔전(1960년) 상대도 김일이었다. 일본에선 김일이 악역, 한국에선 이노키가 악역을 맡으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그 라이벌전에 열광했다. 둘의 우정은 노년까지 이어졌다. 노환과 빈곤으로 고생하던 김일을 위해 이노키는 매년 한국을 찾았고, 치료비를 지원했다. 1995년에는 일본에서 김일의 은퇴식을 열어주기도 했다. 2000년 12월에는 성남 나눔의 집을 찾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등 ‘스승과 친구의 나라’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항상 강하고 자신감 넘쳤던 이노키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그는 2020년 7월 난치병인 ‘심장 아밀로이드증’ 투병 사실을 알렸다. TV와 유튜브 등을 농해 투병과정을 공개하면서 재활 의지를 밝혔다. 건장한 몸은 크게 야위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얼굴의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빨간색 목도리도 여전했다. 2022년 10월 1일 이노키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을 더는 들을 수 없지만, 그의 유산은 영원한 전설로 남을 것이다. 2022.10.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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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 시대 마지막 낭만파이터 '빨간팬티' 미노와맨

70년대 프로레슬링에서나 입었을 법한 '빨간 팬티'를 입는 파이터. 100전을 훌쩍 넘긴 백전노장. 거인 사냥꾼. 모든 수식어 종합격투기 로드 FC 선수 미노와 이쿠히사(41·일본)의 이야기다.'미노와맨'이라는 별명으로 국내 격투기팬들에게 유명한 이쿠히사는 유도 국가대표 출신 윤동식(45)와 23일 충북 충주세계무술축제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샤오미 로드 FC 042 대회 메인이벤트 미들급(84kg급) 경기를 치른다. 21일 김포공항 내 카페에서 만난 이쿠히사는 "이번 시합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최선을 다해서 승리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이쿠히사는 프로레슬링 마니아였다. 그는 중1 때 TV로 안토니오 이노키(74)의 경기를 보고 프로레슬링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프로레슬러처럼 살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곧장 동네 유도장을 달려간 그는 매일같이 훈련을 거듭하며 체력과 힘을 키웠다. 이쿠히사는 "고교생 시절 24시간 프로레슬링만 생각했다. 밥을 먹을 때도 팔에 아령을 달아 훈련이 되도록 했고 친구들이 인기 연예인들이 만들어낸 유행어를 따라할 때 나는 '할 수 있겠는가'처럼 당시 레슬러들처럼 박력있는 말투를 썼다"며 웃었다. 이런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20세에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쿠히사는 당대 최고 레슬러들 만큼 덩치가 크지 않았다. 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매일같이 농구를 하고 우유를 달고 살았지만 소용 없었다. 그는 신체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훈련에 매진했다. 이쿠히사는 "하루에 13시간 동안 웨이트트레이닝과 실전 훈련을 한 적도 있다. 그때는 잠을 자는 것도 훈련을 더 잘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레슬링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이쿠히사는 자연스럽게 격투기 선수로 전향했다. 레슬링에서 쓰는 화려한 필살기를 뒤로 하고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펀치와 관절꺾기를 익혔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바로 빨간 팬티다. 바지통이 큰 트렁크나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기능성 하의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이쿠히사는 21년째 빨간 팬티만 고집하고 있다. 그는 "한창 프로 데뷔를 준비하던 시절 롤모델이었던 선배가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서 나는 머리는 물론 바지까지 빨강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레슬러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계속 빨간색 하의를 입는다"고 덧붙였다. 이쿠히사는 4차원 파이터다. 그는 동물원에서 사자와 눈싸움을 비롯해 강물 속에서 발차기 연습, 나뭇가지로 나뭇가지 찌르기 등 독특한 훈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그는 격투기계의 기인으로 통한다. 그러나 정작 이쿠히사는 아무렇지 않다. 그는 "남들에게는 특이하게 보일 수 있지만 모두 격투기를 하는 데 도움이 돼 진지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고 했다.'거인 사냥꾼'은 그의 또 다른 발명이다. 키 175cm인 그는 자신보다 머리 2개나 더 큰 거구들과 싸워 이기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때문이다. 국내팬들에게는 2009년 최홍만(218cm)과 무제한급 매치를 벌여 승리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그는 강력한 관절꺾기로 2라운드 1분27초 만에 최홍만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가 수많은 기행에도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다. 격투기 통산 전적은 113전(63승42패8무)의 이쿠히사에게 불혹을 넘기도 링에 오르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다 웃었다."글쎄요. 그냥 멈출 수가 없어요. 영원히 계속 싸울테니 응원해주세요."김포공항=피주영 기자 2017.09.22 06:00
스포츠일반

평양에 간 이노키, 내일부터 국제프로레슬링 대회

안토니오 이노키(猪木) 일본 참의원 의원(차세대당)이 28일 북한 평양에 도착했다고 지지통신이 29일 보도했다.이노키 의원은 장웅 북한 국제무도경기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30∼31일 평양 류경 정주영체육관에서 국제 프로레슬링 대회를 공동 주최한다. 이날 장 위원장이 평양 공항에서 이노키 의원을 맞이했다. 이번 대회 관전을 위해 일본 팬 수십 명이 29일 평양을 방문한다고 뉴시스가 보도했다.이노키 의원이 북한에서 프로레슬링 대회를 여는 것은 지난 1995년 이후 두 번째며 북일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북한에 도항 자숙 요청을 해제한 이후 많은 일본인이 방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지지통신은 전했다.이번 대회에는 씨름선수 출신 격투기 선수 최홍만 등과의 대결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밥 샙을 비롯해 일본 이외 외국 선수들도 참가한다.이노키 의원은 다음달 2일까지 북한에 머물 예정이다. 지지통신은 조선중앙통신을 인용해 그가 28일 강석주 노동당 비서와 회담했다고 보도했다. 지지통신은 북한이 9월 둘째 주에 납치 문제 등의 재조사에 관한 최초의 보고를 일본 측에 전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번 스포츠 교류는 북일 친선 분위기를 높이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온라인 일간스포츠 2014.08.2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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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쓰지 히토나리 “윤동주에게 문학적 영향 받아”

소설 &#39냉정과 열정 사이&#39의 작가 쓰지 히토나리가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 &#39아카시아&#39의 한국 개봉을 기원했다. 신작 &#39좌안-마리 이야기&#39·&#39우안-큐 이야기&#39 출간 및 서울국제도서전에 맞춰 방한한 쓰지는 1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내가 만들고 있는 영화는 레슬러 출신의 안토니오 이노키가 주연하는 &#39아카시아&#39다. 부모가 없는 소년과 늙은 레슬러가 만나며, 이를 통해 소년이 성장한다는 이야기"라면서 "내년 초 개봉 예정이다. 한국에서도 꼭 개봉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39냉정과 열정 사이&#39 &#39사랑 후에 오는 것들&#39 &#39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39 등으로 한국에도 팬이 많은 쓰지는 이 날 에쿠니 가오리와 함께 기자회견에 등장해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 작가 쓰지 히토나리입니다"라고 한국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한국 시인 윤동주에게 문학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등 지한파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39냉정과 열정 사이&#39 이후 10년 만에 에쿠니와 공동 집필을 한 이번 작업에서 쓰지는 &#39우안-큐 이야기&#39를, 에쿠니는 &#39좌안-마리 이야기&#39를 맡았다. 쓰지는 "&#39냉정과 열정 사이&#39가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라면 이번 작품은 라이프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잘 모르고 살아간다"면서 "정말 다양한 인생이 있고,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그려나간다"고 말했다. &#39좌안-마리 이야기&#39·&#39우안-큐 이야기&#39는 유년 시절을 공유한 마리와 큐가 50살이 될 때까지 각자 다른 삶을 살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에쿠니는 "두 주인공은 인생이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간다. 돌아보면 (강 건너편에) 늘 그가, 혹은 그녀가 있다"면서 "시대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 작품을 흐르는 테마"라고 전했다. 장상용 기자 ▷‘비싼몸’ 전지현 3연패 굴욕, 탈출할까?▷전지현, 영화찍다 카메라사고 “아픔보다 서러움 때문에 울었다”▷신태라 감독 "&#397급공무원&#39 비결은 순수함"▷"한국영화배우 출연료, 객관적기준 부족해"▷구혜선 감독 데뷔작, 부천영화제 진출▷문성근-설경구, 칸 초청작 ‘여행자’ 카메오 출연 “이창동감독과 인연” 2009.05.14 09:51
경제

“김일은 한·일 우호 가교자 역”

지난 10월 26일 77세를 일기로 타계한 ‘박치기왕’ 김일 씨의 자서전이 일본에서 출간됐다. 일본의 유명출판사 고단샤(講談社)는 12일 ‘오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김씨의 일본이름) 자전 전설의 박치기왕’이라는 제목으로 김씨의 회고록을 출간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지난달 30일 일간스포츠(IS)가 ‘굿바이 김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일본서 출간된 이 자서전은 일간스포츠가 올해 4월 7일부터 9월 30일까지 100회에 걸쳐 연재한 ‘내 머리를 돌덩이로 만들어’를 김씨의 사진들과 함께 묶은 것으로. 레슬러 김씨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열정을 응축해 담은 것이다. ▲지난 9월25일 서울에서 고 김일 선생(왼쪽), 권태정 일간스포츠 부사장(가운데), 도모 일본 고단사 출판사 조인식 후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한 스포츠 영웅의 삶이 회고록 형식으로 한국과 일본서 동시 발간되기는 김씨가 유일하다. 일본에선 김씨의 회고록 출간을 계기로 보다 한차원 높은 한·일 스포츠 문화 교류는 물론 얼어붙은 한·일 외교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단샤측은 이 책의 추모 출판기념회 타이틀로 ‘한·일 우호 친선 추모 출판회’로 정하고. 일간스포츠 지원 하에 한국과 일본의 정·관계와 학계. 스포츠·문화·예술계 인사 500여명을 초청했다. 13일 오후 6시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개최되는 이번 한·일 추모 출판기념회에 한국에선 신중식 민주당 의원·나종일 주일대사·이철 철도공사 사장·임진출 전 한일의원연맹 문화 사회 분과위원장·정진 재일거류민단장·이시형 동경거류민단장·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이재만 변호사·김씨의 후계자 이왕표·삼중스님 등 50여명이 참석하며. 문희상 한일의원연맹회장이 한국측 발기인 대표로 참여했다. 또 70년대 김씨와 혈전을 벌였던 라이벌 압둘러 부처 WWA 회장도 참석한다. 부처는 지난 30일 한국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도 참석. 국경을 뛰어넘은 우정을 과시한 바 있다. 축하 화환과 한류스타들의 사인도 잇따르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화갑 민주당 대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한류 스타 배용준 등이 행사 당일 축하 화환을 보내고. 이병헌·이영애·박용하·이준기 등은 고단샤측에 자신들의 친필 사인을 보내 한류 원조 김씨의 추모 출판회를 축하해줬다. 일본에선 모리 요시히로 전 총리 내외 등 일본 정계 인물 100명과 김씨의 후배였던 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 역도산 마지막 제자 고크네. 역도산의 부인 다나카 게이코씨도 자리를 함께한다. 도모 고단샤 사장은 “김일씨는 한국과 일본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김씨의 자서전은 한국과 일본의 가교로서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95년 4월 일본 도쿄돔에서 거행된 은퇴식에서 “이젠 한국과 일본의 가교자 역할을 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김씨의 후원회장 임진출 전 의원은 “한국과 일본에서 발간된 김씨의 회고록은 김씨의 바람처럼 새로운 한·일 동반 관계의 돌파구 역을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도쿄=정병철 기자 ●도쿄스포츠 김일씨 2006년 프로레슬링 대상 선정도쿄스포츠 신문은 12일 김일씨를 2006년 프로레슬링 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도쿄스포츠는 “김씨는 생전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레슬링을 통해 한·일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던 영웅”이라면서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신문사 에바타 편집국장은 “김씨는 프로레슬링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동반 관계를 형성했다”면서 “김씨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선정했다”라고 말했다. 시상식은 25일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열린다. 2006.12.12 11:48
스포츠일반

‘김일 동영상’ 인터넷 열풍

박치기왕 김일이 영웅으로 재탄생하고 있다.김씨가 별세(10월26일)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국민적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동영상과 그의 회고록 (일간스포츠 간)이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동영상과 회고록을 본 네티즌들은 “김일씨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칭호에 걸맞은 삶이다” 등 찬사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포털 사이트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김씨의 동영상은 생전의 경기 장면과 한국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후 역도산 제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박치기왕 김일’이라는 제목의 이 동영상은 EBS의 교양 프로그램 에서 제작한 것으로 지난 20일부터 방송됐다. 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네 차례.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방송되는 5분 분량의 짧은 프로그램으로 내레이션 없이 영상과 음악·자막만으로 내용을 전달해. 시청자 들로부터 호평을 듣고 있는 프로다. 동영상은 28세 청년 김일이 1956년 일본의 영웅이자 재일 조선인 역도산을 만나기 위해 여수항에서 일본으로 밀항을 하는 내용부터 시작된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한 김일은 역도산을 만나기 위해 동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동경역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불법체류자로 잡혀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된다.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 삶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주소도 모르는 역도산에게 편지를 쓴다. 겉봉에는 ‘동경 역도산’이라고만 적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것을 역도산이 본 것이다. 그 후 김일은 역도산의 보증으로 석방이 되고. 꿈에 그리던 역도산의 제자가 된다. 역도산과 인연을 맺은 김일은 체육관 허드렛일을 하며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된다. 밥 짓기·빨래·청소 등을 하면서 내일의 세계챔피언을 꿈꿨다. 2부는 자이언트 바바·안토니오 이노키 등과 함께 역도산 문하의 3인방이 되면서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평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내주 방송될 3부는 1965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내용이다. 이외에도 김씨가 평생 라이벌이자 후배였던 일본의 영웅 안토니오 이노키와 피를 흘리며 펼쳤던 명장면의 동영상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같은 열기로 인해 10~20대 네티즌들 사이에선 ‘영웅의 발견’ ‘김일 바로 알기’ 등의 글을 올리며 김씨를 칭송하고 있다. ID ‘akrtl’의 네티즌은 “80년대생이라 60~70년대를 풍미했던 김일 옹의 실체를 잘 몰랐다. 젊은 시절 역동적인 삶을 산 것을 보니 존경스럽다”했고 또 다른 네티즌(ID 미미)은 “발디딜 틈 없는 경기장에서 이마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김일 옹을 보니 전율이 느껴진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정병철 기자 ▲김일 회고록 일본서도 큰 인기 김씨의 회고록 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 회고록은 김씨가 지난 4월 7일부터 9월 30일까지 일간스포츠 지면에 연재한 파란만장 인생 회고록 ‘머리를 돌덩이로 만들어’를 김일씨의 사진들과 함께 엮은 책이다. EBS의 교양 프로그램 에서 방영되는 김씨의 동영상도 이 회고록을 바탕으로 그리고 있다. 이 회고록이 네티즌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김씨가 작고하기 26일 전까지 자신의 삶을 생생히 증언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간스포츠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연재와 함께 회고록을 발간했다. 그의 회고록은 일본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유력 출판사인 고단샤는 김일씨의 회고록을 일본어판으로 출간하고 12월 13일(수)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대대적인 출판기념회를 열 예정이다. 이 출판기념회에는 일본의 정관계 및 문화 체육계 인사 등 5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일본의 언론들도 이 내용을 앞다퉈 보고 하고 있다. 최청락 건국대학교 스포츠경영학부 교수는 “박치기왕 김일은 작고했지만 김씨의 동영상과 회고록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그의 가치는 앞으로 더욱 높게 평가받고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2006.11.30 10:24
경제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9>

스승은 레슬링을 통해서 남북 통일에 기여하고 싶어했다. 실제로 스승은 레슬링을 통해 남북이 하나되는 프로젝트를 구상중이었다. 스승은 가끔 내게 "남과 북이 하나되고 화해를 하기 위해 남북한에서 레슬링을 개최하면 어때?"라고 의향을 묻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난 스승에게 "실현만 된다면 최고의 빅이벤트가 될 것입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 있다.  스승이 구상중인 것은 제자들을 데리고 남한에서 경기를 펼치고, 또 이북에서도 경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한의 챔피언과 북한의 챔피언이 남과 북에서 최종 승자를 가리는 것이다. 그 챔피언이 일본의 챔피언과도 맞붙는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스승은 남·북한에서 경기를 하기에 앞서 나에게 많은 것을 주문했다. "무조건 실력을 키워라. 그리고 세계를 제패하라." 난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죽어라고 연습했고, 링에 올랐다. 나의 프로레슬링은 1960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1961년 이후 연승행진은 끝이 없었다. 나의 트레이드 마크 박치기는 팬들에게 완전히 각인 시켰다.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결은 늘 흥미진진했는데 1962년 안토니오 이노키와 열 다섯차례 맞붙었지만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또 1963년에는 14차례 경기를 벌였지만 이 역시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사실 레슬링에서 승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이노키에게 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레슬링이 강했다는 것을 입증했고 많은 팬들을 확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일본서 나의 레슬링이 만개하면서 스승은 이제 일본을 뛰어 넘어 세계로 향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했다. 그리고 외국인 선수들을 불러 들여 주요 경기에 나를 출전시켰다. 난 처음 외국인 선수와 맞붙을 때 힘에서 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혹독한 훈련이 효과를 냈다. 외국인 선수와 맞붙는데도 밀리지 않고 압승을 거뒀다.  스승은 내가 빨리 국제적 레슬러로 성장해 주기를 바랐다. 앞서도 말했지만 스승은 남북한 프로레슬링 대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스승이 그런 말을 하면 할 수록 나도 흥분됐다. 속으로 이북이 고향인 스승과 남한이 고향인 내가 남북통일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을 하면 괜히 흥분되고 기분이 좋아졌다.  나아가 스승은 제자중 한명을 우선적으로 세계챔피언 벨트를 차게 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제자들도 이런 스승의 원대한 뜻을 알고 열심히 훈련했다. 스승이 강조하는 것은 실력이 없으면 결코 세계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승은 첫째도 실력, 둘째도 실력을 강조했다. 스승은 실력있는 제자에게 세계챔피언 도전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기회가 내게 먼저 찾아온 것 같다. 1963년 8월로 기억된다. 스승은 느닷없이 "너 외국에서 경기 한번 하고 올래"라고 물었다. 그때까지 난 일본서 링에 오르는 것도 행복했다. 외국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스승이 말한 외국은 미국이었다.  스승은 "자고로 레슬러는 미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떨쳐야 한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스승은 미국에 가면 일본의 챔피언도 우물안 개구리라고 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인정받으면 세계가 인정한다"라고 말했다.  난 스승이 그저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나를 불렀다. "너 오늘 저녁 나와 술 한잔 하자"라고 했다. 스승의 입에서 나와 단둘이 술 한잔하자고 말하는 것은 제자가 된 이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난 스승이 왜 술을 한잔 하자고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술잔이 이승의 마지막이었으니…. 2006.08.09 16:27
경제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2>

이제 방향을 돌려 야쿠자 얘기보다는 스승 역도산과 나와도 인연을 맺었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얘기다. 스승이 1961년 동경 시부야에 리키스포츠팰리스를 오픈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스승은 리키스포츠팰리스를 개관하면서 프로복싱 도장까지 만들었다. 복싱도 레슬링과 마찬가지로 사각의 링에서 경기를 펼치는 것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승은 리키복싱회장도 역임했다. 그때 3명의 재일 한국인이 스승의 제자로 들어왔다. 또 종목이 다른 한 명의 재일 한국인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첫 번째는 코트네다. 스승은 코트네를 복싱 선수로 키우기 위해 스카웃했다. 일본 교토 출신인 코트네는 딱 벌어진 어깨, 호쾌한 성격, 그리고 두둑한 배짱까지 갖춰 사실 복싱보다 레슬링 선수가 더 어울렸다.  지금도 안토니오 이노키와는 둘도 없는 친한 사이로 지내는 코트네는 1974년 중반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 제목은 로저 무어 주연의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로 일본인 스모 선수 역을 맡았는데 스모 선수 출신은 아니다.  코트네는 덩치가 좋아 사실은 헤비급 선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 복싱을 했던 선수 중 헤비급에 걸맞은 체중을 지닌 선수가 거의 없었던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체급을 낮췄다.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미들급 체중으로 낮춰 1962년 미들급 신인왕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코트네는 몇 년전 한국서 개봉됐던 영화 감수까지 했는데 올 3월 초 일본에 갔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내가 감수했던 내용과 다르게 영화가 제작됐다"며 흥분을 가리앉히지 못했다. 코트네는 지금도 한국 레슬링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후배들 육성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80년대 일본서 활동했던 한국인 레슬러들은 대부분 코트네의 손을 거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 명은 여건부다. 여건부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알밤까기다. 원래 복싱을 하기 위해 도장에 입문했다가 레슬링 선수로 전환했다. 몸집이 크지 않았지만 순발력과 민첩성만은 당대 최고였다. 늘 파이팅이 넘쳤다.   여건부는 요즘 젊은 층에서 말하는 뺀질이였다. 난 스승을 대신해 그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의 귀도 내 귀처럼 구부러져 있다. 내가 만든 것이다. 여건부는 나와 함께 다른 사람을 만나면 "김일 선배님이 내 귀를 이렇게 오므라들게 했다&#39면서 불평을 쏟곤 했다. 내가 워낙 강한 훈련을 시켜서인지 나 때문에 레슬링을 그만두겠다는 말도 했다.   스승의 도장에 또 한 명의 복싱 선수가 입문했다. 정식 제자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1962년 가을까지 스승 도장에서 운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66년 6월 25일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 프로복싱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가 바로 그다.   56년 중반 여수에서 씨름을 하면서 처음 만났던 김기수는 58년 5월 동경에서 한 번 조우했다. 당시 동경에선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 웰터급 한국 대표로 출전, 금메달을 땄다. 그때 내가 나를 찾아온 김기수를 스승에게 소개시켜 줬다. 스승과 같은 함경도가 고향인 김기수는 스승의 특별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스승뿐만 아니라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코트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코트네는 김기수의 스파링 파트너가 돼 주었다. 만약 코트네가 복싱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역시 세계 챔피언이 됐을지도 모른다.   스승 도장에 온 네 번째 한국인은 일본 프로야구 영웅 장훈이었다. 2006.07.26 13:41
경제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49>

나는 데뷔에서 은퇴까지 3000회를 넘게 경기를 치렀다. 한 경기당 박치기를 10회 정도씩 했으니 수치상으론 3만 회 이상 박치기를 한 셈이다. 난 박치기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지는 멀쩡하다. 사람들 중에는 내가 병마와 싸우다 보니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김일씨가 박치기를 하도 많이 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한다" 등. 심지어 치매 증상이 있지 않는가 묻기도 한다. 이런 질문들은 다 박치기로 인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난 괜찮다. 일간스포츠에 이렇게 나의 삶을 정리하고 있을 정도로 기억력도 생생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지난 과거들이 더 생생히 기억난다.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도 아픈 기억은 박치기 추억이다. 난 지금도 머리가 쑤신다. 벌이 머리에 들어간 듯 늘 휭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띵하고 속이 메스껍다. 이 같은 증상은 박치기로 인한 후유증이지만 아마도 원인은 머리뼈가 금이 간 까닭일 게다. 난 지금도 머리 만지는 것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 나의 머리를 만지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올 초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내가 피곤해 보였는지 누군가 나의 머리를 만지며 지압을 했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머리 아픈 것에 대한 극도의 민감함 때문이다. 난 머리에 그만큼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젊었을 땐 그 예민함도 모른 채 오직 팬들의 요구에 의해 무조건 받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케이블 텔레비젼 채널을 보면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를 종종 방송해 준다. 그 거구의 선수들 중에서 박치기하는 선수는 보지 못했다. 그들도 박치기가 훗날 사람을 골병 들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다. 난 1960년대 초반 이미 박치기 사형 선고를 받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 기절까지 했다. 박치기할 때는 몰랐지만 라커에 돌아오면 골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숙소에 왔는데도 그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머리에선 열도 나기 시작했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수건에 물을 젖힌 후 이마에 올려 주고 또 마사지를 해 주었다. 제대로 잠도 못 잤다. 머리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등과 다리까지 아팠다. 처음 박치기 훈련 했을 때와는 아픈 차원이 달랐다. 병원 가는 것을 스승 역도산이 알면 혼날 수도 있었지만 너무 아파 견디기조차 힘이 드니 혼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난 스승 몰래 병원엘 갔다. 나를 진찰한 의사는 혀를 찼다. "오오키 긴타로씨, 이 몸으로 박치기를 했어요? 당신 박치기 더하면 앞으로 식물인간됩니다. 당장 그만두셔야 합니다." 박치기를 그만두라면 레슬링을 하지 마라는 것과 같다. 그는 내가 왜 박치기를 하면 안되는지 설명해 줬다. 우선 목 뒤쪽 뼈에 금이 갔다고 설명해 줬다. 그것도 한 개가 금 간 것이 아니라 세 개나 금이 갔다는 것. 목뼈에 금이 갔는데도 박치기를 했다는 것은 의학계에서 보고될 만한 사례라고까지 이야기해 줬다. 의사는 "정말 아프지 않았습니까? 당신 정말 참을성이 강합니다"며 자신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유리가 깨지면서 금이 가듯 머리 가운데 뼈도 유리처럼 깨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머리가 쪼개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무조건 깁스를 해서 입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고 겁도 줬다. 그 의사의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현재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의료진은 나의 머리를 본다. 그리곤 "아니 머리 세 군데 뼈에 금이 가 있는데요"라며 깜짝 놀란다. 돌덩이 머리를 만든 대가가 이렇게 참혹할 줄은 몰랐다. 2006.07.04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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