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9건
연예일반

박기용 영화진흥위원장 퇴임…직무대행 체제 돌입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 오는 31일 퇴임한다. 영화진흥위원회는 당분간 직무 대행 체제로 운영된다.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는 박기용 위원장이 2년간의 위원회 활동을 마무리하고 취임 전 몸담았던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영화학과 교수로 복직한다고 29일 밝혔다.박기용 위원장은 29일 열린 퇴임식에서 “코로나19 여파로 한국 영화계에 닥친 최대 위기 극복을 위해 지난 2년간 영화계, 국회,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영진위 직원들과 함께 애썼는데 한국 영화가 재도약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게 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이제 영화인으로 돌아가 K무비가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박기용 위원장은 지난 2022년 1월 취임해 코로나19 기간 영화산업 진흥에 노력해왔다. 코로나19 여파로 영화발전기금이 급감한 지난해 800억 원의 영화발전기금 전입을 유도했으며 올해 체육기금 300억 원, 복권기금 54억 원도 전입시켰다.이외에도 ‘한국영화위기극복을 위한 협의회’를 구성해 홀드백(극장 개봉작의 일정 기간 기타 매체 상영 금지), 객단가 문제 개선 등을 논의했다.한편 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 영화와 영화산업 지원 활동을 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이다. 박기용 위원장의 퇴임으로 당분간 김선아 부위원장이 위원장 직무대행을 하게 됐다.이세빈 기자 sebi0525@edaily.co.kr 2024.01.29 11:39
무비위크

강한섭 전 영화진흥위원장, 지병으로 별세…향년 63세

강한섭 전 영화진흥위원장이 지병으로 별세했다. 서울예술대학교는 강한섭 영상학부 교수가 지난 10일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유족은 11일부터 조문을 받기로 했다.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경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제2대학 대학원에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다, 2008년에 영화진흥위원장으로 선임돼 1년간 영화진흥위원회를 이끌었다. 1994년 공연윤리심의위원회 영화 분야 수입심의위원을 지냈고 같은 해부터 서울예대 교수직을 맡았다. 이외에도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서울예대 산학협력단 대표이사도 역임했다. 황지영기자 hwang.jeeyoung@joongang.co.kr 2021.12.11 14:46
무비위크

"큰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역사 속 영면한 故신성일[종합]

배우 고(故) 신성일이 한국영화사의 영원한 별이 됐다. 6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고 신성일의 영결식과 발인식이 엄수됐다. 부인 엄앵란을 비롯한 가족들과 70여명의 영화계 인사들, 소식을 듣고 먼길까지 찾아온 팬들까지 많은 이들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조사에 나선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를 다음과 같은 말로 바꾸고자 한다. 큰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육신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고인은 한국영화계의 역사이자 전설로 남았다. 지 회장은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선배님의 이름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없다. 선배님처럼 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대스타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며 "당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다. 같은 시대에 살아 행운이었다. 한국영화 역사의 전설이었고 신화였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은 "선생님은 한국 사회상의 표상이었다. '맨발의 청춘'의 댄디한 모습은 새로운 남성상이었다"라면서 "영화인으로서 후배들에게 힘이 돼주신 선생님. 영화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열정을 잊지 않겠다. 선생님께서 살아가신 영화를 치열하게 기억하겠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영화인들을 대표한 두 사람의 말처럼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영원히 한국영화사에 남았다. 신성일이라는 배우를 빼놓고서는 한국영화사를 논할 수 없기에 그는 500편이 넘는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됐다. 신성일은 지난 4일 새벽 전남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고,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937년 출생한 신성일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원조 미남 배우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작품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고,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지금의 예명을 받아 본명 강신영이 아닌 신성일로 활동을 시작했다.이후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이 중후한 매력을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신성일은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청춘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무수히 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서 박찬욱 감독은 그에 대해 "이토록 한 사람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없었다"며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영화사는 물론 한국 현대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평했다.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사진=박세완 기자 2018.11.06 12:00
무비위크

[현장IS]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된 故신성일"..엄앵란 배웅 받으며 영면[종합]

한국영화계 큰 별이 영면에 들었다. 6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故) 신성일의 영결식과 발인식이 엄수됐다. 가족과 친지, 영화계 인사들 7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은 배우 독고영재의 사회로 치러졌다. 개식사, 영정입장 및 운구, 묵념, 김두호 홍보위원장의 약력 보고, 추모영상 상영, 지상학 장례위원장의 조사,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의 추도사, 유가족과 영결식에 참석한 전원의 분향 및 헌화, 엄앵란의 유가족 대표인사, 독고영재의 폐식 선언으로 진행됐다. 추도사에 나선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은 "불과 한달전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위를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오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여기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모두를 챙겨 바라보던 눈빛은 영화인들의 무한한 든든함이었다"라며 고인을 추억했다. 이어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추억을 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500편이 넘는 수많은 영화들 속에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됐다"며 "영화인으로서 후배들에게 힘이 돼주신 선생님. 영화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열정을 잊지 않겠다. 선생님께서 살아가신 영화를 치열하게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영결식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엄앵란은 이날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가만히 앉아서 사진을 보니까 '당신도 늙고 나도 늙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어 "이 세상 떠나면서 울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다. 누가 보면 날더러 '왜 안 우냐'고 한다. 그런데 울면 망자가 걸음을 못 걷는다더라"라면서 "신성일이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이젠 선녀같이 동경하며 그러고 살고 싶다. 부인들에게 잘 하라. 잘하면 기쁨이 온다"고 이야기했다. 이어진 발인식에서 안성기와 이덕화가 가장 앞에서 관을 들었다. 가족들의 부축을 받은 엄앵란이 뒤를 따랐다. 나한일 등 후배 배우들도 여러 영화계 인사들도 장지인 경북 영천으로 떠나는 고인을 배웅했다. 신성일은 지난 4일 새벽 전남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고,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937년 출생한 신성일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원조 미남 배우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작품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고,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지금의 예명을 받아 본명 강신영이 아닌 신성일로 활동을 시작했다.이후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이 중후한 매력을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신성일은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청춘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무수히 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1960~1970년대 영화계는 신성일이 없이는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개봉한 1194편의 작품 중 324편이 그의 출연작이었다. 평생동안 주연작만 500편 이상을 남겼고, 119명의 여배우와 연기 호흡을 맞췄다. 많은 활동을 한 만큼 화려한 수상 경력도 가지고 있다. 1964년 제7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시작으로,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아시아영화제, 황금촬영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 국내 다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사에 전무후무한 배우였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서 박찬욱 감독은 그에 대해 "이토록 한 사람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없었다"며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영화사는 물론 한국 현대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평했다. 1964년 당대 최고의 톱 배우 엄앵란과 결혼한 고인은 사생활 문제로 대중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2011년 일간스포츠에 7개월간 연재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를 펴낸 그는 1970년대 아나운서 겸 연극배우였던 고 김영애와 외도했던 경험을 털어놔 파장을 일으켰다. 엄앵란과는 20년 넘게 별거하기도 했으나 2016년 엄앵란의 유방암 투병 후 서로를 돌보며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한 방송에서 엄앵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변하지 않고 의지하는 기둥이다"며 부부의 특별했던 관계를 표현했다.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사진=박세완 기자 2018.11.06 11:05
무비위크

[현장IS] 엄앵란 "울면서 보내지 않겠다"..故신성일 영결식 엄수

배우 고(故) 신성일의 영결식이 영화계 인사들의 눈물 속에 엄수됐다. 6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고 신성일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독고영재가 영결식의 사회를 맡았다. 개식사, 영정입장 및 운구, 묵념, 김두호 홍보위원장의 약력 보고, 추모영상 상영, 지상학 장례위원장의 조사,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의 추도사, 유가족과 영결식에 참석한 전원의 분향 및 헌화, 엄앵란의 유가족 대표인사, 독고영재의 폐식 선언으로 진행됐다. 장례위원장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선배님의 이름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없다. 선배님처럼 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대스타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며 "선배님은 왕도 돼 보고 영웅도 돼보고 만인의 연인으로 살아보셨으니 이 세상 미련은 버리셔도 될 것 같다. 시련도 아픔도 있었지만, 선배님 같이 은총을 누린 인생이 어디 있겠나. 당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다. 같은 시대에 살아 행운이었다. 한국영화 역사의 전설이었고 신화였다"고 말했다. 또 그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를 다음과 같은 말로 바꾸고자 한다. 큰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육신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추도사에 나선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은 "불과 한달전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위를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오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여기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모두를 챙겨 바라보던 눈빛은 영화인들의 무한한 든든함이었다"라며 고인을 추억했다. 이어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추억을 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500편이 넘는 수많은 영화들 속에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됐다"며 "영화인으로서 후배들에게 힘이 돼주신 선생님. 영화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열정을 잊지 않겠다. 선생님께서 살아가신 영화를 치열하게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아내 엄앵란은 유가족을 대표해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 엄앵란은 "가만히 앉아서 사진을 보니까 '당신도 늙고 나도 늙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 떠나면서 울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다. 누가 보면 날더러 '왜 안 우냐'고 한다. 그런데 울면 망자가 걸음을 못 걷는다더라"며 "신성일이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이젠 선녀같이 동경하며 그러고 살고 싶다 부인들에게 잘 하라. 잘하면 기쁨이 온다"고 이야기했다. 신성일은 지난 4일 새벽 전남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고,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937년 출생한 신성일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원조 미남 배우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작품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고,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지금의 예명을 받아 본명 강신영이 아닌 신성일로 활동을 시작했다.이후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이 중후한 매력을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신성일은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청춘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무수히 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사진=박세완 기자 2018.11.06 10:52
무비위크

오석근 영진위원장 "故신성일, 영화만을 위해 살았던 별"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이 배우 고(故) 신성일을 추모했다. 오석근 영진위원장은 6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고 신성일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오 위원장은 "불과 한달전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위를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오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여기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모두를 챙겨 바라보던 눈빛은 영화인들의 무한한 든든함이었다"고 말했다.이어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추억을 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500편이 넘는 수많은 영화들 속에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됐다"며 "선생님은 한국 사회상의 표상이었다. '맨발의 청춘'의 댄디한 모습은 새로운 남성상이었다.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영화계 다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고 전했다. 오 위원장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한국영화계 상징적 존재인 선생님을 재조명하고자했다. 영화계 산적해 있는 많은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가는데 선생님의 혜안을 듣고자했다"고 회상하면서 "영화인으로서 후배들에게 힘이 돼주신 선생님. 영화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열정을 잊지 않겠다. 선생님께서 살아가신 영화를 치열하게 기억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신성일은 지난 4일 새벽 전남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고,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937년 출생한 신성일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원조 미남 배우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작품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고,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지금의 예명을 받아 본명 강신영이 아닌 신성일로 활동을 시작했다.이후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이 중후한 매력을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신성일은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청춘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무수히 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사진=박세완 기자 2018.11.06 10:35
연예

"1000억원 지원·특별법 제정" 부산국제영화제 재도약할까

부산국제영화제가 다시 날아오른다. 2014년 '다이빙벨' 상영 중단 사태로 파행을 겪은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새로운 부산시장 취임에 따라 완전한 정상화를 꾀하고 있다. 부산시는 BIFF의 정상화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오거돈 부산시장 당선인은 지난달 20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과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 등 영화인들과 만나 지난 4년간의 파행에 대해 사과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부산시는 BIFF의 재도약을 위해 오 당선인의 임기 내 매년 250억원씩, 모두 발전 기금 1000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세계 3대 영화제 규모로 국비 지원을 늘리는 것이 최종 목표다.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월드시네마 랜드마크를 만들고, 남북의 문화 교류 협력을 위한 한국 영화 100주년 남북 공동 행사 등도 추진된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독립성과 자율성 보장이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오 당선인은 부산국제영화제 특별 지원 조례를 제정해 독립성과 자율성을 법으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오 당선인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정치적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해 시민과 함께하는 영화제로 발돋움해야 한다. 부산영화제 자체 개혁과 쇄신에 전폭적인 지지와 행적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다이빙벨' 사태를 야기한 서병수 전 부산시장의 퇴임에 이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오 부산시장의 취임은 그간 보이콧을 외쳐 온 많은 영화인들의 마음을 돌릴 것으로 보인다.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 지난해에도 "서병수 시장이 계속 부산에 있는 한 영화제에 참여할 수 없다.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며 보이콧을 외친 영화인들에게도 '명분'이 생긴 셈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아시아를 대표하던 BIFF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모두 나설 때다. 시끌벅적했던 BIFF가 돌아오길 바란다"고 밝혔다.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BIFF가 파행을 겪는 사이 전주국제영화제 등 경쟁자들이 급격히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협약을 맺었다고 하지만, 확정된 계획이 아니다. 실제로 부산시가 막대한 돈을 들여 영화제를 지원할지, 특별 지원 조례가 만들어질지 지켜볼 일이다"고 전했다. 박정선 기자 2018.07.02 08:00
무비위크

'자백' 최승호 사장 "前정권 지원배제, 영진위 사과받았다"

MBC 최승호 사장이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사과를 받았다고 밝혔다. 최승호 사장은 29일 자신의 SNS에 "오늘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의 전화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영진위가 ‘자백’에 대한 ‘지원 배제’를 결정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최승호 사장은 뉴스타파 제작 시절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을 연출했다. '자백'은 국가정보원의 간첩 보작 사건을 추적한 탐사보도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누적관객수 14만 명을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최승호 사장은 "전화를 끊고 나니 ‘나도 곧 이런 사과 전화를 많이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과거 MBC가 한 불공정, 왜곡보도의 과정이 속속 밝혀지고 있어서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사가 끝나면 MBC의 나쁜 보도에 피해를 입은 분들께 사과하고 잘못된 보도를 한 당사자들은 처벌해야 할 것이다"면서도 "근데 왜곡보도를 한 당사자들이 마치 회사의 부당한 조사로 탄압을 받는 양 피해자 행세를 한다. 어쨌든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이제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조연경 기자 cho.yeongyeong@joins.com 2018.03.29 16:23
연예

‘한국 유기농업의 아버지‘ 원경선 원장, 100세 일기로 타계

한국 유기농업의 아버지이자 풀무원 농장의 설립자인 원경선 원장이 8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풀무원은 원 원장이 8일 오전 1시49분 경기도 부천 순천향대 병원에서 노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알렸다. 원 원장은 지난 2일 갑자기 기력이 떨어지면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장남 혜영(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차남 혜석(미술가), 장녀 혜옥, 차녀 혜진, 삼녀 혜주, 사녀 혜덕, 오녀 혜경, 사위로 하중조(KT&C Engineering 대표), 송영관(前 상명고 교사), 김창혁(회사원), 김준권(정농회 회장), 유진권(前 중앙일보 기자), 자부 안정숙(前 영화진흥위원장), 류정희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5호, 장지는 인천시 강화군 파라다이스 추모원이다. 장례는 풀무원홀딩스 회사장으로 치러지며 장례위원장은 전성은 전 거창고등학교 교장이 맡았다. 영결식은 오는 10일 오전 9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다. (02)3410-6915. 고(故) 원 원장은 1914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 살 되던 해 부친이 별세하면서 농군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한국 전쟁을 겪고 난 마흔의 나이에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기로 결심을 하고 1955년 경기도 부천에 땅 1만평을 개간하여 ‘풀무원농장’을 마련, 오갈 데 없는 이들을 위해한 공동체를 설립·운영했다. ‘풀무원농장’의 풀무는 대장장이가 쇠를 달구거나,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는데 이용되는 기구를 뜻하는 말로, 사람도 풀무질이 필요하다는 게 원 원장의 생각이었다. 열한 살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독실한 기독교인인 원 원장은 ‘풀무원농장’을 통해 농장에 들어온 식구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농사일로 풀무질해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뜻에서 풀무원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원 원장은 1976년 경기도 양주로 농장을 옮긴 후 ‘생명존중’과 ‘이웃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을 시작하면서 한국 최초의 유기농민단체 ‘정농회’를 설립했다. 공동체 운동으로 시작된 그의 이타적 삶은 인류를 기아와 전쟁으로부터 보호하고, 공해로부터 인류를 건지려는 환경운동과 생명보호운동, 평화운동으로 진보를 거듭했다. 1989년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창립에 초석을 마련하고 빈곤 타파 운동을 벌이며 이웃과 나누는 삶을 실천했다. 일찍부터 아프리카 기아 현장에 가서 구호 활동을 하고 그 참상을 기아대책을 통해 국내에 알림으로써 국제기아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마련했다.‘인간 상록수’로 불리는 원 원장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목이 달아나도, 재산이 바닥나도 실천하며 살아왔다. 그가 1961년부터 이사장을 맡아온 ‘열린 교육’으로 유명한 경남 거창고등학교는 군사정권시절 교육계와 마찰을 빚으며 3번이나 문을 닫을 뻔했다. 하지만 매번 그는 “타협하느니 차라리 학교 문을 닫는 것이 인격적으로 바른 교육이 된다”며 버텼다.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유엔 세계환경회의에 한국을 대표해 참석, 유기농 실천운동에 대한 강연을 하였으며, 그 직후 경실련 산하기구로 시작한 환경개발센터(現 환경정의 전신)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환경과 생명을 존중하는 삶을 직접 실행하며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다. 2004년부터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새로 일군 풀무원농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농장 인근에 평화원 공동체를 세워 한평생의 꿈인 공동체 운동을 지속하며 ‘생명존중’과 ‘이웃사랑’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일평생을 바쳤다. 지난 2009년 10월 기아대책 창립20주년 기념식에서 원 원장은 “전세계 63억 명의 인구 중 10억 명이 굶고 2초에 한 명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기아대책은 나와 내 가족을 넘어 이웃과 인류의 생명을 살리는 운동” 이라며 “더 많은 후원자들과 기업들의 참여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생명이 없는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어가자”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유기농을 통해 환경보호와 보존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녹색인상, 1995년 유엔 글로벌 500 상, 199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8년 인촌상을 수상했다.한편, 원 원장의 생명존중과 이웃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장남인 원혜영 의원이 1981년 창업한 풀무원은 30여 년이 지난 현재 연간 매출 1조5000억원이 넘는 한국의 대표적인 식품기업으로 성장했다. 원 의원의 고등학교·대학교 동기로 사업에 동참했다가 경영권을 넘겨받은 남승우 풀무원 총괄사장은 원 원장의 고귀한 이웃사랑 정신을 이어받아 풀무원 브랜드 제품 매출액의 0.1%를 지구사랑기금으로 적립, 국내외 소외된 이웃을 돕는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풀무원은 원 원장이 평생 실천해온 이웃사랑과 생명존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북 괴산의 풀무원 연수원인 ‘로하스 아카데미’ 내 원경선 원장 기념관을 설립, 그의 높은 뜻을 이어가기로 했다고 밝혔다.이소은 기자 luckysso@joongang.co.kr 2013.01.08 11:02
브랜드미디어
모아보기
이코노미스트
이데일리
마켓in
팜이데일리
행사&비즈니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