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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40년 The moment] 소방차 출동하고 정전 사고, 감독 청문회까지

한국 프로야구가 올해로 출범 40주년을 맞이했다. 1969년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1982년 프로야구 태동을 현장에서 지켜본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프로야구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기록했다. 이 기간 여러 구단의 희비가 엇갈렸고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일간스포츠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KBO리그 역사를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①두 번째 왕조 연 삼성 삼성이 한국시리즈(KS) 5차전에서 SK(현 SSG)를 1-0으로 물리치고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했다. 삼성은 전년도 김성근 감독이 이끈 SK에 4전 전패로 패한 아픔을 갚았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1983년 김응용(해태) 2005년 선동열(삼성)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부임 첫 시즌 우승을 이끈 사령탑이 됐다. 이후 삼성은 2015년까지 5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 4년 연속 한국시리즈 KS 우승을 달성했다. ②김성근 감독, SK 떠나다 김성근 감독은 재계약 문제로 구단과 불편한 관계 중에 8월 17일 문학 삼성전을 앞두고 "올 시즌 뒤 SK를 떠나겠다"고 폭탄 선언했다. 구단은 다음날 김성근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이만수 퓨처스(2군) 감독에게 1군 임시 지휘봉을 맡겼다. SK 왕조(KS 우승 3회)를 이끈 김 감독의 전격 퇴장이었다. 김성근 감독의 경질에 반대하는 SK 일부 팬은 8월 18일 경기 종료 후 물병 투척 및 그라운드에 난입해 '유니폼 화형식'을 했다. ③오승환 대기록 축하한 소방차 8월 12일 대구 KIA전에서 오승환이 세계 최소경기(334경기), 국내 최연소(29세 28일) 200세이브를 달성했다. 오승환의 대기록 달성 순간 이를 기념하는 축포가 터졌는데, 전광판 우측 상단에 불이 붙어 화염이 치솟았다. 소방수(마무리 투수)를 축하하는 행사에 급기야 '진짜' 소방차가 출동했다. 인터뷰에서 오승환은 "제가 불 끄러 갈까요"라며 황당해했다. 오승환은 그해 평균자책점 0.63을 기록하며 2006년 자신이 작성한 아시아 한 시즌 최다 세이브(47개) 타이기록에 이어, KS MVP까지 차지했다. ④1948년 개장 대구구장 정전 4월 16일 대구 시민야구장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두산 정수빈이 8회 절묘한 기습번트를 대고 1루로 달려가는 순간 갑자기 암흑천지로 변했다. 6개 조명탑 불이 모두 꺼진 것이다. 12분 뒤 일부 시설이 복구됐지만, 3루 측 조명은 끝내 켜지지 않았다. 심판진과 양 팀 관계자가 모여 논의한 결과 사고 발생 48분 만인 8시 16분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됐다. 경기는 다음 날 정수빈 타석에서 재개됐고, 두산이 3-2로 이겼다. ⑤LG팬 감독 청문회 요구 LG는 8월 14일 잠실 홈 경기에서 롯데에 1-4로 졌다. 당시 5위 LG와 4위 롯데의 승차가 2.5경기로 벌어지자 LG 팬 수백 명이 야구장 입구를 막고 시위했다. 'LG 가을 야구, 또 내년입니까'라는 현수막을 펼쳐 든 채 "감독 나와라"라며 청문회를 요구했다. 팬들에게 박종훈 LG 감독은 다음 날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질책을 달게 받고 더 나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사과했다. 결국 LG는 김기태 수석코치를 신임 사령탑에 선임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13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002년 준우승 이후 11년 만이었다. ⑥장효조·최동원 별세 장효조 삼성 퓨처스 감독이 9월 7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수 시절 그는 천부적인 타격 재능과 끈질긴 집념으로 '타격 기계'로 평가받았다. 통산 961경기에서 타율 0.331을 기록했다. 당시로는 3000타수 이상 소화한 타자 중 최고 타율이었다. 일주일 뒤인 9월 14일, 또 하나의 레전드 최동원 전 한화 퓨처스 감독도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을 기록한 그는 1984년 롯데의 KS 우승 당시 홀로 4승을 책임졌다. 롯데는 최동원의 등 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⑦9구단 NC 창단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월, 9구단 창단 우선협상대상자로 NC를 선정했고 3월 말에는 NC의 창단을 승인했다. NC는 8월 2일 다이노스라는 팀 이름을 발표했고, 8월 31일 초대 사령탑으로 김경문 전 두산 감독을 선임했다. 김 감독은 두산에서 사퇴한 지 두 달 만에 복귀했다. NC는 신인 드래프트, 2차 드래프트, 외국인 선수(4명 등록, 3명 출전) 등을 통해 선수단을 구성했고 2012년 퓨처스리그에 참가했다. ⑧이용훈 2군 퍼펙트게임 롯데 이용훈이 9월 17일 한화와의 퓨처스리그 경기에 9이닝 동안 27명의 타자를 모두 범타로 처리,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 1~2군을 통틀어 KBO 역사상 첫 번째 기록이다. 이용훈은 111개의 공을 던졌고 탈삼진 10개를 기록했다. 2000년 삼성에 입단한 이용훈은 SK를 거쳐 롯데에서 뛰었는데, 1군 통산 190경기에서 42승 49패 평균자책점 5.30을 기록한 뒤 2014년 은퇴했다. ⑨심수창 최다연패 7월 31일 트레이드 마감일, LG는 투수 심수창과 내야수 박병호를 키움에 주고 투수 송신영과 김성현을 받는 트레이드를 했다. 심수창은 8월 3일 대구 삼성전에서 이적 후 첫 등판에 나섰다. 총 6이닝 7피안타 3실점을 기록했지만, 팀이 2-3으로 져 패전 투수가 됐다. 이로써 리그 역사상 최다인 18연패에 빠졌다. 심수창은 LG에서 뛴 2009년 6월 26일 SK전부터 승수 쌓기에 실패했다. 심수창은 8월 9일 사직 롯데전에서 6과 3분의 1이닝 1실점 호투, 승리 투수가 되면서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⑩30주년 레전드 올스타 KBO는 프로야구 30주년을 기념해 포지션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10 투표를 진행했다. 이만수(포수)가 최다 점수를 얻어 최고 인기 스타로 뽑혔다. 선동열(투수) 장종훈(1루수) 박정태(2루수) 한대화(3루수) 김재박(유격수) 장효조·이순철·양준혁(이상 외야수) 김기태(지명타자)가 포지션별 레전드 올스타에 선정됐다. 이형석 기자 사진=IS포토 2022.12.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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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40년 The moment] LG의 마지막 KS 신바람, MVP 종범신

한국 프로야구가 올해로 출범 40주년을 맞이했다. 1969년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1982년 프로야구 태동을 현장에서 지켜본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프로야구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기록했다. 이 기간 여러 구단의 희비가 엇갈렸고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일간스포츠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KBO리그 역사를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①LG 신바람 KS 우승 1994년 KBO리그에는 LG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가 가득했다. 이광환 감독이 이끄는 LG는 4월 26일 한화 이글스전에 승리하며 리그 1위로 올라선 뒤 정규시즌 일정을 모두 마칠 때까지 선두를 지켜냈다. 한국시리즈(KS)에선 '돌풍의 팀' 태평양 돌핀스를 4전 전승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KS 최우수선수(MVP)는 시리즈 1승 2세이브를 거둔 '노송' 김용수의 몫이었다. 공교롭게도 LG의 KS 우승 시계는 1994년을 끝으로 멈춰 있다. ②4할에 근접했던 '바람의 아들' 해태 타이거즈 이종범은 1994년 타율과 도루, 최다안타 등 공격 5개 부문 타이틀을 휩쓸며 데뷔 첫 최우수선수(MVP) 타이틀을 품에 안았다. 그해 이종범은 104경기까지 4할 타율을 유지, 프로야구 원년이던 1982년 MBC 청룡 백인천(당시 0.412) 이후 처음이자 역대 두 번째 '정규시즌 4할 타율'에 도전했다. 아쉽게 0.393로 시즌을 마쳐 목표 달성엔 실패했지만, 그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즌이었다. ③한화 이글스 시작 빙그레 이글스가 아닌 한화 이글스라는 팀 명으로 첫 시즌을 소화했다. 롯데 자이언츠를 이끌던 강병철 감독이 사령탑에 올라 정규시즌을 공동 3위(65승 2무 59패)로 마쳤다. 16승을 따낸 에이스 한용덕을 필두로 정민철(14승 10패 평균자책점 2.15) 송진우(9승 10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3.92)가 버틴 마운드의 힘이 대단했다. 한화는 준플레이오프에서 해태를 2전 전승으로 꺾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선 태평양에 3전 전패로 패해 탈락했다. ④LG 김선진 깜짝 홈런 LG와 태평양의 한국시리즈 1차전은 팽팽했다. 9회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해 1-1 상태로 연장에 돌입했다. LG가 선발 이상훈에 이어 차동철, 김용수를 차례로 등판시킨 것과 달리 태평양은 선발 김홍집이 연장 11회까지 마운드를 홀로 지켰다. 해결사는 LG 대타 김선진이었다. 김선진은 연장 11회 말 1사 후 김홍집의 141구째를 공략해 왼쪽 펜스를 넘기는 끝내기 홈런을 때려냈다. 김선진은 그해 정규시즌 안타가 20개, 홈런은 단 1개에 불과한 대타 요원이었다. ⑤LG 신인 3인방 LG가 1994년 신바람을 낼 수 있었던 건 '신인 3인방' 류지현(유격수) 서용빈(1루수) 김재현(좌익수)의 역할이 컸다. 류지현이 타율 0.305 15홈런 51타점 51도루, 서용빈이 타율 0.318 4홈런 72타점을 기록했다. 김재현은 당시 고졸 선수로는 사상 첫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 깜짝 놀랄 만한 활약을 보여줬다. 셋 중 마지막에 웃은 선수는 류지현이었다. 쟁쟁한 동료들을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했다. LG 선수가 신인왕에 오른 건 1990년 포수 김동수 이후 4년 만이었다. ⑥OB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 17명 1994년는 OB 베어스에겐 최악의 시즌이었다. 성적도 좋지 않았고 팀 내부 갈등도 극에 달했다. 9월 4일 윤동균 감독에 불만을 품은 17명이 집단으로 항명, 숙소를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OB는 잔여 경기를 2군 선수들로 치러야 했고 팀 성적은 계속 악화(정규시즌 7위)했다. 결국 박철순을 비롯한 항명 주동자에 대해 연봉 지급 정지와 출장 정지 처분이 내려졌고 윤동균 감독이 자진해서 사퇴한 뒤에야 사건이 일단락됐다. 윤동균 감독의 뒤를 이어 1995년 OB 사령탑에 오른 건 '국민 감독' 김인식이다. ⑦'원 히트 원더' 김홍집 1994년 김홍집은 정규시즌 12승을 따내며 태평양의 돌풍을 이끌었다. 방위병으로 복무, 그 당시 인천에서 열리는 홈 경기 등판만 가능했지만, 프로 두 번째 시즌 '대박'을 일으켰다.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으로 기억되는 그해 한국시리즈(KS) 1차전에서도 141구 역투로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KS 1차전의 후유증 때문일까. 2003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시즌 100이닝'을 다시 소화하지 못했다. ⑧첫 왼손 타자 홈런왕 김기태 쌍방울 레이더스 간판 김기태는 1994년 홈런 25개를 때려내 김경기(태평양·23개) 김재현(LG·21개) 등을 제치고 홈런왕에 올랐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된 이후 왼손 타자가 홈런왕에 오른 건 역사상 김기태가 처음. 쌍방울은 김기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다. 김기태의 배턴을 이어받아 역대 두 번째 '왼손 타자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한 건 1997년 '라이언 킹' 이승엽(당시 삼성 라이온즈)이다. ⑨사자구단의 몰락 부상자가 속출한 삼성 라이온즈는 프로야구 출범 이후 두 번째로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허리 부상으로 빠진 에이스 김상엽을 비롯해 강기웅·정경배·류중일·김성래 등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마운드와 타선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우용득 감독과 백인천 타격 인스트럭터의 미묘한 긴장 관계가 팀 성적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갖은 노력 끝에 영입한 재미교포 투수 최용희의 활약(1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5.48)도 미미했다. ⑩40세이브 신기원을 연 정명원 태평양의 뒷문을 지킨 정명원은 정규시즌 사상 첫 40세이브 고지를 정복했다. 50경기에 등판해 105와 3분의 2이닝을 소화했고 평균자책점까지 1.36으로 안정적이었다. 올스타전에선 3이닝 퍼펙트 피칭으로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KBO리그는 1984년 윤석환(당시 OB·25세이브)이 20세이브, 1993년 선동열(당시 해태·31세이브)이 30세이브를 각각 처음으로 돌파한 바 있다. 배중현 기자 사진=IS포토·한국프로야구 30년사 2022.12.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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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40인에 아쉽게 탈락한 41~50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레전드 40인'에 아쉽게 탈락한 10명(41~50위)를 추가 발표했다. KBO는 올스타전이 열린 7월 16일을 시작으로 9월 19일까지 총 10회에 걸쳐 40인의 레전드를 발표했다. 출범 40주년을 맞아 지나온 역사를 추억하며 한국 야구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해 마련했다. 후보 선정위원회에서 총 177명(현역 선수 제외)을 추천했고, 전문가 투표(80%)와 팬 투표(20%) 결과를 합산해 최종 40명을 확정했다. KBO는 20일 "출범 40주년의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40명을 주인공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투표 결과 근소한 차이로 40인에 포함되지 못한 또 다른 위대한 선수들이 있다"며 이를 소개했다. 가장 아깝게 레전드 40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는 '스나이퍼' 장성호다. 2000경기 출장-개인 통산 2000안타를 동시 달성한 장성호는 40위 타이론 우즈(40.93점)에 불과 0.32점 뒤진 40.61점으로 41위를 차지했다. 장성호는 팬 투표에서 28만5578표를 얻어 우즈(24만 7116표)를 앞섰지만, 전문가 투표에서 69표(우즈 71표)를 얻는 데 그쳤다. 42위는 개인 통산 337홈런을 기록한 이호준(현 LG 코치)이다. 통산 2053경기에서 1880안타 1265타점을 기록했다.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와 NC 다이노스에서 주장을 맡아 선수단을 잘 이끌었다. 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에서 맹활약한 정명원이 43위, KBO 개인 통산 만루 홈런 1위(17개) 이범호가 44위에 이름을 올렸다. 45위는 LG 신바람 야구의 주역이자 SK 왕조를 이끌었던 김재현이 뽑혔고, 46위는 명유격수 계보를 잇는 류중일(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이 선정됐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끝내기 홈런을 날려 삼성 라이온즈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긴 마해영이 47위, 불멸의 대기록인 100완투를 완성한 윤학길이 48위에 뽑혔다. 49위는 통산 134승을 기록한 김원형(현 SSG 감독), 50위는 삼성에서만 16시즌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한 박한이(삼성 타격 코치)가 이름을 올렸다. 이형석 기자 2022.09.2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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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모인 날, ‘국민 유격수’가 기본기를 말했다

박진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 대행은 현역 시절 '국민 유격수'로 불렸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 데뷔 직후부터 탄탄한 수비를 선보였고, 삼성으로 이적한 뒤인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메이저리거 못지않은 탄탄한 수비를 선보였다. 그 덕분에 박 대행은 실업야구와 프로야구 초창기 활약했던 김재박 전 LG 트윈스 감독부터 시작되는 KBO리그 최고 유격수 계보를 잇는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박 대행은 17일 서울 잠실 LG전에서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로 선정된 김재박 전 감독의 시상식을 함께했다. 여기에 1990년대를 대표하는 유격수이자 '계보'의 일원으로 꼽히는 류지현 LG 감독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선배들과 함께한 의미 있는 날, 박진만 대행은 모처럼 후배들에게 쓴소리를 전했다. 박 대행은 경기 전 인터뷰 때 “프로야구에 갓 입단한 어린 선수들의 수비 기본기가 잡혀 있지 않다”고 했다. 감독 대행 전까지 퓨처스팀(2군) 감독을 맡았던 그는 "퓨처스팀에서 육성, 스카우트 파트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최근 아마추어 선수들이 타격은 열심히 하는데 수비에는 신경을 덜 쓰는 경우가 많다. 드래프트에서 타격 능력을 먼저 보기 때문이지만, 입단하면 수비 기본기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며 "고교 대형 유격수라는 선수들도 대부분 타격 능력으로 주목받는다. (사설 아카데미 등) 학교 밖에서도 야구를 배우는 선수들이 많지만 역시 타격만 익힌다. 내야수는 외야수와 송구 자세가 달라야 하는데 차이가 없다. 포구 자세가 준비 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올해 삼성에는 대형 유격수 이재현과 김영웅이 입단했다. 이재현은 주로 1군, 김영웅은 주로 2군에 머물며 시즌을 소화했다. 박 대행은 “이재현은 주로 1군에 있어서 내가 많이 보지 못했지만, 김영웅은 퓨처스팀에서 손주인 수비 코치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본기 훈련을 반복했다. 초반에는 몸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는데, 이제 포구 자세와 스로잉이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했다. 직접 훈련을 담당했던 손 코치는 "내야수와 외야수는 팔 스윙부터 다른데 어린 선수들이 잘 인지하지 못했다. 캐치볼을 하더라도 마구잡이로 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최근에는 퓨처스팀 경기가 많아져 훈련 시간이 부족해진 이유도 있다”며 “재현이와 영웅이는 타고난 재능은 굉장히 좋지만, 기본적인 것들에서 많이 부족했다. 상황마다 다른 포구나 송구 자세에 대한 숙지가 부족했다. 영웅이와는 기본적인 스텝과 송구 훈련 등을 집중적으로 반복했다"고 했다. 박 대행 역시 이 시기를 겪었다. 현대 시절 신인이었던 그를 지도했던 건 다름 아닌 김재박 당시 감독이다. 그는 “감독님은 내가 신인 때부터 시작해 4년 동안 스프링캠프에서 수비 훈련만 시키셨다. 타격 훈련이 더 재밌는데 수비만 해 답답했다”고 돌아봤다. 손 코치는 "이재현과 김영웅은 재능이 확실한 선수들이다. 조언하면 빨리 이해했고 발전 속도도 좋다. 훈련이 이어진다면 더 좋은 수비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2.08.1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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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왕' 장효조·'최초 100승' 김시진·'해결사' 한대화·'여우' 김재박... 40주년 올스타 선정

한국야구위원회(KBO)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주축 선수들이 40주년 올스타에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KBO는 8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우승 주역인 장효조(6위) 김시진(20위) 한대화(28위) 김재박(31위)이 전문가와 팬이 선정한 레전드 40인에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1982년은 한국 프로야구가 탄생한 해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이 국제대회를 개최하고 우승까지 거둔 해다. 한국 대표팀은 당시 7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 우승을 위해 당시 많은 스타 선수들이 프로 리그 합류를 보류했고, 그 결과가 우승이라는 결실까지 이어졌다. 대표적인 선수가 ‘타격의 달인’ 장효조다. 그는 통산 타율 0.331로 이 부문 역대 2위에 올라있다. KBO 리그에서 3,000타석 이상을 소화한 선수 중 장효조 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현역으로 뛰고 있는 키움 이정후(0.341 – 8월 7일 현재)가 유일하다. 그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시절부터 타격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이름을 날렸다. 프로에서도 입단 첫해인 1983시즌 곧바로 타율 1위에 올랐고, 1985시즌부터 1987시즌까지 3시즌 연속 타율 부문 타이틀을 차지했다. 타율 부문 1위에 4번 오른 선수는 장효조와 양준혁(전 삼성 93,96,98,01년)이 유일하다. 통산 출루율 1위(0.427)답게 출루율 타이틀은 6회(83~87년,91년)나 차지했다. 이는 통산 출루율 공동 2위에 올라있는 김태균(0.421)의 4회 수상보다 2회나 더 많은 기록이다. 장효조는 전문가 투표에서 144표(73.85점), 팬 투표에서 490,154표(8.97점)을 얻어 총 점수 82.82로 40명의 레전드 중 6위에 올랐다. 타선에 장효조가 있었다면, 마운드 위에는 KBO리그 '최초 100승' 투수 김시진이 있었다. 김시진은 장효조 보다 두 살 어렸지만 대구상고, 한양대부터 육군경리단을 거쳐 1983시즌 삼성에 입단해 1988시즌 종료 후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1992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장효조와 계속 함께해왔다. 그는 입단 첫 시즌 17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입단 5년째인 1987시즌 KBO 리그 최초로 100승 투수 반열에 올랐다. 김시진이 100승까지 도달하는데 등판한 경기는 186경기.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최소경기 100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김시진의 커리어 하이 시즌은 삼성이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뤄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던 1985시즌으로, 김시진은 25승(역대 단일시즌 최다승 공동 3위)으로 승리 1위, 201탈삼진으로 이 부문 1위, 승률 0,833으로 이 부문 공동 1위에 오르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김시진은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등판한 첫 경기인 1989년 4월 14일 OB를 상대로 14이닝 동안 219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1실점만 내주고 완투승을 거뒀고, 이는 지금까지도 최다 투구 이닝 승리 공동 1위, 최다 투구 승리 1위 기록으로 남아있다. 김시진은 전문가 투표에서 115표(58.97점), 팬 투표에서 401,640표(7.35점)를 얻어 총 점수 66.33으로 20위에 올랐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8회에 터뜨린 역전 스리런포를 친 한대화는 프로에서도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OB에 입단해 3년간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하던 한대화는, 86년 해태로 트레이드된 첫해 승리타점 1위(16개)에 오르며 ‘해태왕조’ 주역의 등장을 알렸다. 해태가 4시즌 연속 우승한 1986시즌부터 1989시즌까지 꾸준히 홈런 5걸 안에 들며 중심타자로 활약했으며, 1990시즌에는 타율과 출루율 1위, 안타, 타점, 득점 부문 2위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해태를 떠나 LG로 트레이드된 1994시즌에도 타율(0.297)과 타점(67개) 9위에 오르며 중심타선에서 활약, 우승 반지를 7개로 늘렸다. 한대화가 가진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8회 수상(86~91년, 93~94년)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한대화는 전문가 투표에서 90표(46.15점) 팬 투표에서 493,904표(9.04점)를 얻어 총 점수 55.20으로 레전드 순위 28위에 자리했다. ‘개구리 번트’로 국민적 영웅이 된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은 실업리그 7관왕 출신의 '원조 슈퍼스타'다. 그는 프로 데뷔 이전부터 공·수·주 3박자를 다 갖춘 명 유격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1982년 시즌 막판 MBC에 합류해 3경기에 출전했던 김재박은 사실상 프로 데뷔 첫 시즌이었던 1983시즌부터 도루 2위(34개), 득점 4위(53개), 안타 6위(108개)에 오르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당시 기준으로 야구선수로서는 고령인 30세에 프로 무대에 데뷔한 탓에 실업에서의 명성만큼 압도적인 성적을 내진 못 했지만, 안정적인 수비와 공격 그리고 주루 실력을 바탕으로 4년 연속(83~86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KBO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유격수로서 자리를 확고히 했다. 김재박은 전문가 투표에서 81표(41.54점), 팬 투표에서 496,853표(9.10점)를 얻어 총 점수 50.63점으로 31번째 레전드로 뽑혔다. 레전드로 선정된 선수들의 시상은 레전드들의 전 소속 구단 홈 경기에서 진행된다. 장효조와 김시진에 대한 시상은 오는 8월 11일 KIA와 삼성의 대구 경기에서 동시 진행되며, 2011년 별세한 장효조를 대신해 그의 가족이 참석할 예정이다. 한대화에 대한 시상은 16일 SSG와 KIA의 광주 경기에서 열릴 예정이며, 김재박의 시상은 17일 삼성과 LG의 잠실 경기로 예정되어 있다. 40명 레전드와 관련된 특별한 스토리는 KBO의 공식 발표에 맞춰 KBO 홈페이지와 네이버 스포츠의 KBO 40주년 특집 페이지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2.08.08 10:24
프로야구

이변 없었다, 프로야구 4대 천왕

'국보 투수' 선동열(59), '무쇠팔' 故 최동원, '바람의 아들' 이종범(52) 그리고 '국민 타자' 이승엽(46). 야구인과 야구팬이 직접 선정한 프로야구 4대 천왕 결과다. KBO(한국야구위원회)는 지난 1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2 올스타전에서 리그 출범 4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레전드 40인' 중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네 명을 공개했다. 전문가(156명)와 야구팬(109만2432명)의 투표 결과를 각 80%와 20% 비율로 반영한 결과, 선동열이 총점 91.05점을 받아 프로야구 40년 역사 '최고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영원한 라이벌' 최동원은 89.99점으로 2위, 이종범이 87.31점으로 뒤를 이었다. 이승엽은 86.55점을 받아 4위에 올랐다. 야구계에는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는 말이 있다. 세 선수를 모두 지도한 김응용 감독이 남긴 평가로 알려졌다. 여기에 '전설은 최동원'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선동열은 그야말로 최고의 투수였다. 데뷔 2년 차였던 1986시즌, 24승(6패) 평균자책점 0.99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며 페넌트레이스 MVP(최우수선수)를 수상했다. 통산 8번이나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고, 정규시즌 MVP도 3번이나 차지했다. 이승엽은 2003시즌, 56홈런을 기록하며 역대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최다 홈런왕(5회)과 개인 통산 최다 홈런(467개) 기록도 갖고 있다. 이종범은 공격·수비·주루 모두 뛰어났다. 1994시즌엔 타율 0.393 84도루를 기록하며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시리즈(KS) MVP만 2회 거머쥐며 해태 왕조의 전성기 연장을 이끈 주역이다. 최동원은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1984년 롯데 자이언츠 에이스로 보여준 투혼은 아직도 회자된다. 정규시즌엔 51경기에 등판, 무려 284와 3분의 2이닝을 소화하며 27승(13패) 6세이브 223탈삼진을 기록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KS에서는 5경기에 등판, 홀로 4승을 거두며 롯데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다. 전무후무한 기록. 그는 2011년 대장암 투병 끝에 하늘의 별이 됐다. 그를 가슴에 새긴 야구팬은 더 많아졌다. '라이벌' 선동열은 "최동원 선배는 나에게 우상 같은 존재였다. 특히 그 연투 능력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며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 최동원은 전문가 투표에서 전원에게 득표, 155표를 얻은 선동열보다 1표 더 받았다. 개인 통산 기록이나 수상 이력, 우승 경험은 선동열이 앞선다. 그러나 전문가 중 딱 1명은 최동원이 남긴 기록 이상의 가치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이종범과 이승엽은 팬 투표 결과로 순위가 갈렸다. 전문가 점수에선 나란히 76.41점(149표)을 얻었지만, 팬 투표에서 59만 5149표(10점 90점)를 얻은 이종범이 55만 3741표(10.14점)를 얻은 이승엽을 근소한 차이로 앞섰다. 공·수 기여도가 높았던 이종범이 팬심(心)을 사로잡았다. 아들인 이정후(키움 히어로즈)가 리그 최고 타자로 발돋움하며 이종범의 선수 시절을 향한 관심이 높아진 점도 투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선동열과 이승엽, 이종범은 레전드(LEGENDS)라는 문구와 현역 시절 등 번호가 가슴에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올스타전을 찾은 만원 관중 앞에 섰다. 최동원의 자리를 대신한 아들 기호씨는 "아버지를 기억해주고 추억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겨 박수를 받았다. 이들의 시구 퍼포먼스도 특별했다. 각 구단 대표 팬이 홈구장에서 시구하는 모습이 전광판을 통해 릴레이로 상영됐고, 그래픽으로 구현된 최동원의 투구 모습이 영상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후 잠실구장 마운드에 선 선동열이 마치 그 공을 받은 듯한 포즈를 취한 뒤 시구에 나섰다. 유격수 자리에 나선 이종범이 포수 김태군에게 공을 받은 뒤 1루를 지키던 이승엽에게 송구하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줬다. 이번 올스타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잇는 자리였다. 이대호(롯데), 박병호(KT 위즈) 등 현역 최고 스타들이 레전드 4인에게 직접 꽃다발을 전달했다. 올스타전 본 경기에선 황대인(KIA 타이거즈), 정은원(한화 이글스) 등 젊은 선수들이 스타성을 뽐냈다. 이정후는 미국 무대 진출 의지를 드러내며, 아버지 이종범을 넘어서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선동열은 KBO리그 양현종(KIA)부터 안우진(키움)까지 KBO리그 대표 에이스 계보를 잇고 있는 투수들을 칭찬하고 격려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덕분에 올해 올스타전이 더욱 품격을 갖출 수 있었다. 안희수 기자 2022.07.18 06:00
야구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⑦] '바람의 아들' 이종범

바람의 아들, 야구 천재, 종범신(神). 이토록 화려한 별명으로도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재능과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 한국야구 역대 최고의 '5툴 플레이어' 이종범(52) 얘기다.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유격수 부문에 이종범이 선정됐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총 28표를 획득, 2위 김재박과 박진만(이상 4표)을 크게 따돌렸다. 한국야구 계보를 잇는 역대 유격수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혔다. 이종범은 안정감 있는 수비력을 갖추는 게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겨졌던 유격수의 평가 기준을 바꿔놓았다. 프로 데뷔 첫 시즌부터 폭발적인 화력으로 팀 공격을 주도했다. 야수 한 명이 경기 흐름과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수비력도 일품이었다. 특히 강한 어깨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야구계에서는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는 말이 있다. 이종범의 전천후 능력에 대한 극찬이다. 이종범과 선수 생활을 함께했던 후배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타이거즈 직계 후배였던 김종국 KIA 감독은 "공·수·주를 모두 따졌을 때 가장 뛰어난 유격수는 이종범 선배"라고 했다. 선수 생활 말년(2002~2003) KIA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장정석 KIA 단장도 "그야말로 '야신(야구의 신)'이다. 리그 최정상급을 넘어 독보적이었다. 야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라고 돌아봤다. 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도 "수비를 잘하는 다른 후보들이 있어서 고민했다. 그래도 타격이나 도루 등 여러 임팩트에서 이종범이 선배가 제일"이라고 했다. 조원우 SSG 랜더스 벤치코치, 이대진 SSG 투수 코치는 이종범을 역대 최고 유격수로 꼽으며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1993년 1차 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현재 KIA)에 입단한 이종범은 데뷔 시즌부터 득점(85개) 1위, 안타(133개)와 도루(73개) 2위, 홈런(16개) 4위에 오르며 리그를 흔들었다. 신인 최다 도루를 기록하며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인상은 타율 1위(0.341), 홈런 2위(23개)에 오른 양준혁(당시 삼성 라이온즈)에게 내줬지만, 삼성과의 한국시리즈(KS)에서 타율 0.310 7도루로 맹활약하며 해태의 우승을 이끌었다. KS 최우수선수(MVP)도 그가 차지했다. 1994년은 전설로 회자된다. 이종범은 124경기에서 타율 0.393(499타수 196안타) 113득점 77타점 84도루를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 타율은 프로야구 출범 원년 백인천이 기록한 0.412에 이어 역대 2위에 자리했다. 최다 안타는 당시 신기록이었다. 84도루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야구팬은 4할 타율, 200안타, 100도루를 향해 도전하는 이종범의 레이스에 열광했다. 리그 최고의 선수로 올라선 이종범은 1997년 다시 한번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정규시즌 타율 0.324 30홈런 64도루를 기록했다. 도루 1위, 홈런 2위에 올랐다. 후반기 홈런 페이스가 떨어진 탓에 이승엽(32개)에게 타이틀을 내줬지만, 홈런왕-도루왕 동시 석권을 노리며 다시 한번 리그를 달궜다. 역대 두 번째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아직도 이 기록을 해낸 유격수는 이종범이 유일하다. LG 트윈스와의 KS에서는 승부처마다 출루와 도루, 홈런과 호수비를 선보이며 해태의 9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개인 두 번째 KS MVP도 수상했다. 국내 무대를 평정한 이종범은 1998시즌을 앞두고 주니치 드래건스와 계약하며 일본 리그에 진출했다. 초반 경기력은 좋았지만, 이내 일본 야구 특유의 '현미경' 분석에 고전했다.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상대 투수의 공에 오른 팔꿈치를 맞고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복귀 후에도 기대한 성적은 내지 못했다. 결국 2001년 8월 해태에서 KIA로 구단명이 바뀐 친정팀에 복귀한다. 이종범은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났다. 포지션을 외야수로 옮겼지만, 호쾌한 타격과 현란한 주루 능력은 여전했다. 2003시즌에는 50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에 복귀했고, 안타(165개)도 2위에 올랐다. 일본 진출 전만큼 뛰어난 성적은 내지 못했지만, 여전히 리그 정상급 타자로 평가받았다. 만 서른다섯 살이 된 2005년 이후에는 장타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내리막을 타면서도 존재감을 보여줬다. 2006년 3월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에서는 대표팀 주장을 맡아 한국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숙적 일본과의 2라운드 3차전 8회 극적인 2타점 적시타를 치며 2-1 승리 주역이 됐다. 서른아홉 살이었던 2009년에는 역대 두 번째로 통산 500도루를 넘어섰고, SK 와이번스(현재 SSG)와 KS에서는 1차전 결승타 등 선수단의 버팀목 역할을 해내며 타이거즈 구단 역대 10번째 KS 우승에 기여했다. 이종범의 등 번호 7번은 타이거즈 구단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현재 프로야구를 이끄는 후배들에게 이종범은 이미 전설이다. KT 위즈 베테랑 박경수는 "역대 유격수 중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했다. 키움 히어로즈 내야수 김혜성과 NC 투수 송명기도 "그야말로 레전드"라고 했다. 리그 최고 타자로 성장한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키움)는 아버지를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는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2022.01.19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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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②] '신(神)이라 불린 사나이' 양준혁

자신의 이름 앞에 '신(神)'이라는 단어가 붙는 프로야구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 ‘양신(神)’ 양준혁(53)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외야수 부문 한 자리를 차지했다. 현역 시절 등 번호 10번을 달았던 그는 삼성의 '10번 대선배' 장효조와 함께 40주년 올스타 명단에 이름을 올려 의미를 더했다. 양준혁은 이승엽과 함께 라이온즈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대구상고와 영남대를 졸업한 그는 1992년 신인 2차 1순위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됐다. 대구 토박이로 누구보다 고향 팀 삼성 입단을 바랐지만 삼성은 그해 1차 지명 권리를 왼손 투수 김태한에게 사용했다. 양준혁은 쌍방울의 지명을 거절, 상무 야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1년 뒤 1차 지명으로 꿈에 그리던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1993년 프로야구 신인왕 레이스는 역대급으로 평가받는다. 해태 타이거즈 유격수 이종범이 타율 0.280(475타수 133안타) 16홈런 53타점을 기록했다. 도루까지 73개를 성공, '바람의 아들'로 불리며 리그를 강타했다. 하지만 최종 승자는 양준혁이었다. 그는 타율 0.341(381타수 130안타) 23홈런 90타점으로 가공할만한 화력을 보여줬다. 타격·장타율·출루율 1위, 홈런·타점 2위에 오르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홈런·타점왕을 차지한 팀 선배 김성래에 밀렸지만, 최우수선수(MVP)에 도전할 만큼 흠잡을 곳이 없었다. '괴물 타자' 양준혁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1994년 타점왕, 1995년에는 2년 만에 20홈런 고지를 다시 밟았다. 1996년에는 삼성 타자로는 사상 첫 20-20 클럽에 가입했고 개인 통산 첫 번째 타격왕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전천후 개인 성적을 앞세워 3년 만에 MVP에 재도전, 당대 최고의 투수 구대성(당시 한화 이글스)을 위협했다. 구대성은 그해 55경기에 등판,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88을 기록했다. 수상의 영예는 구대성의 차지였지만 그와 경쟁했다는 것만으로도 양준혁에게는 성공적인 1년이었다. 개인 첫 번째 골든글러브 수상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1999년 선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지역 라이벌 해태로 전격 트레이드된 것이다. 하지만 기자회견을 자청,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미국 진출 의사를 밝히는 등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짧은 시간 방황을 끝내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심정으로 방망이를 다시 잡겠다"고 말한 뒤 타이거즈에 합류했다. 각성한 양준혁은 투수에게 위협 그 자체였다. 그해 131경기에서 타율 0.323 32홈런 105타점으로 개인 한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홈런과 득점, 타점, 최다안타를 비롯한 공격 대부분의 지표에서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 해태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9시즌이 끝난 뒤 한국프로야구선수협(선수협) 구성 선봉에 서며 구단에 미운털이 박혔다. 우여곡절 끝에 2000년 3월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돼 광주를 떠났다. 잠실에 입성한 양준혁은 2년 동안 연평균 92타점을 기록, 제 몫을 다했다. '선수협 주동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선수 생명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지만 2002년 1월 총액 27억2000만원에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하며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왔다. 공교롭게도 양준혁은 2002년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132경기 타율이 0.276에 머물렀다. 데뷔부터 매년 이어오던 3할 타율의 명맥이 끊겼다. 양쪽 어깨에 물이 차 제대로 된 타격이 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했다. 훈련 방법, 타격 폼, 생각마저 모두 바꿨고 이 과정에서 전매 특허 '만세 타법'이 탄생했다. 폴로스루 때 왼손을 놓은 방법인데 자칫 타격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연습을 통해 몸에 익혔다. 양준혁은 2003년 개인 한 시즌 최다인 홈런 33개를 폭발시키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양준혁의 이름 앞에는 '기록의 사나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2007년 6월 9일 KBO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 2000안타 고지를 밟았다. 2009년 5월 9일에는 통산 341번째 홈런을 터트려 장종훈(당시 한화 이글스)이 보유하고 있던 개인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웠다. 골든글러브 8회 수상이라는 금자탑도 쌓았다. 그는 2010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은퇴 경기에서도 내야 땅볼에 1루까지 전력으로 질주,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았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한 야구에 대한 그의 진심이었다. 등 번호 10번은 22번(이만수) 36번(이승엽)과 함께 삼성 구단의 영구결번이다. 서용빈 KT 위즈 2군 감독은 "양준혁 선배는 장타, 콘택트, 기록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역대 최고 외야수로 빼놓을 수 없다"고 했고, 박경수(KT)는 "프로야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타자"라고 극찬했다.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던 정경배 SSG 랜더스 코치는 "장효조 선배와 마찬가지로 현역 선수와 비교했을 때 양준혁 선배의 기록도 가치가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혜성(키움 히어로즈)은 "항상 1루로 전력 질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며 40주년 올스타 외야수로 양준혁의 이름을 적었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2.01.09 08:00
야구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는? 선동열·최동원 '원투펀치'

임인년 새해가 밝았다. 한국 프로야구도 새로운 출발선에 설 시간이다. 1982년 3월 27일 닻을 올린 KBO리그는 지난해까지 40년간 숱한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환희와 감격의 역사를 쌓아왔다. 일간스포츠는 41번째 프로야구 시즌을 맞이하기에 앞서 야구인 투표를 통해 지난 40년간 그라운드를 빛낸 포지션별 최고 스타를 선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선동열(59) 전 국가대표 감독이 투표인단 전원의 지지를 받아 '별 중의 별'로 뽑혔다. 일간스포츠 선정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는 선발투수 5명, 불펜투수 2명, 포수·1루수·2루수·유격수·3루수 각 1명, 외야수 3명으로 구성됐다. 해외 리그 성적이 아닌 KBO리그 성적만을 기준으로 삼아 각 포지션별 후보를 추렸다. 투표에 참여한 야구인은 총 40명. 20대, 30대, 40대, 50대 이상으로 그룹을 나눠 각 세대별 10명이 표를 던졌다. 포지션별 올스타 후보에 오른 야구인과 현역 선수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고, 20~30대는 10개 구단 선수 중 연령대별 대표 1명씩을 포함했다. 이렇게 선정한 40주년 올스타 중 선발 투수 5명에는 선동열(40표) 최동원(37표) 류현진(36표) 송진우(22표) 박철순(17표), 불펜 투수 2명에는 오승환(32표) 구대성(19표)이 각각 이름을 올렸다. 이어 포수 양의지(24표), 1루수 이승엽(37표), 2루수 정근우(22표), 유격수 이종범(28표), 3루수 최정(23표)이 각 포지션 최고 선수로 뽑혔다. 3명을 선발한 외야수 부문에선 장효조(26표) 양준혁(22표) 박재홍(20표)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베스트 3' 안에 포함됐다. 선동열은 유일하게 투표인단 40명으로부터 모두 표를 받아 만장일치로 최다 득표자가 됐다. '불세출의 투수' 고(故) 최동원과 이승엽이 나란히 37표를 얻어 공동 2위에 올랐고, 메이저리그(MLB) 토론토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현진이 36표로 그 뒤를 이었다. 현역 선수 중엔 류현진 외에 오승환(삼성), 양의지(NC), 최정(SSG) 등 3명이 40주년 올스타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 선동열은 명실상부한 KBO리그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힌다. 1985년 해태(현 KIA)에 입단한 뒤 1995년까지 통산 367경기에서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탈삼진 1698개를 기록했다. 통산 이닝당 출루허용(WHIP)은 0.80. 11시즌 중 5차례(1986·1987·1992·1993·1995)나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2.00을 넘긴 시즌은 1994년(2.73)밖에 없다. 7년 연속(1985~1991)을 포함해 8번이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가져갔다. 특히 1986년에는 한 시즌 262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면서 24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 탈삼진 214개, 완봉승 8회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다. 선동열은 1995년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면서 33세이브(평균자책점 0.49)를 올린 뒤 임대 선수로 일본 프로야구(주니치)에 진출했다. 이후 리그 정상의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날리다 한국에 복귀하지 않고 1999년 은퇴했다. KIA는 그 후 선동열의 등번호 1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40주년 올스타 선정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띈 건, 표를 많이 얻은 선수일수록 투표자들이 굳이 선정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동열에게 한 표를 던진 이유를 물으면 "이유가 필요하느냐"는 반문이 되돌아왔다. 선동열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은 최동원도 마찬가지다. 40명 중 단 2명을 빼고 모두 최동원을 올스타로 꼽았지만, "설명이 필요없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1번으로 선동열, 2번으로 최동원을 뽑은 NC 이용찬은 "투수 대선배이신 이분들을 왜 뽑았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했다. 실제로 최동원은 1984년 51경기에서 284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면서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 '무쇠팔'이었다. 그해 최동원이 잡은 삼진 223개는 지난해 두산 외국인 투수 아리엘 미란다가 경신하기 전까지 36년간 역대 한 시즌 최다 기록 자리를 지켰다. 최동원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따내면서 롯데에 창단 첫 우승을 안기는 '신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1985년에도 20승 8세이브를 따내면서 평균자책점 1.92를 기록했고, 1986년엔 267이닝을 소화하면서 19승(평균자책점 1.55)을 올렸다. 그러나 프로에서의 첫 5년간 1209와 3분의 1이닝(평균 241.6이닝)을 책임진 여파로 이후 팔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1990년 삼성에서 은퇴했다. 전성기가 길지 않았는데도 그 누구보다 강했던 KBO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2011년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등번호 11번이 뒤늦게 롯데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다. 특히 많은 투표인단이 KBO리그 역사를 대표하는 선동열과 최동원의 라이벌 관계에 주목했다. 나이로는 5년 터울이고 프로 경력으로는 4년 선후배 사이였던 이들은 영남(최동원)과 호남(선동열), 연세대(최동원)와 고려대(선동열)의 대리전까지 펼친 필생의 맞수였다. 선수 시절 세 차례 맞대결 성적은 1승 1무 1패. 1986년 4월 첫 대결에서는 선동열이 완봉승을 따냈고, 최동원은 솔로홈런 하나를 맞아 1실점 완투패했다. 그해 8월에는 최동원이 선동열을 상대로 완봉승했고, 선동열은 자책점 없이 2실점(수비 실책으로 인한 비자책점) 완투패했다. 1987년 5월 16일 세 번째 대결은 '퍼펙트게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됐을 만큼 극적이었다. 두 투수가 연장 15회까지 완투하면서 4시간 56분 혈전을 벌인 끝에 2-2 무승부로 끝났다. 이날 선동열은 공 232개, 최동원은 209개를 각각 던졌다. SSG 박종훈과 키움 김혜성이 "당대 최고 라이벌이자 설명이 필요 없는 역대 가장 뛰어난 투수들"이라고 입을 모은 이유다. 류현진은 KBO리그에서 단 7년을 뛰고도 37명의 몰표를 받아 선동열과 최동원 다음으로 나설 '3선발'이 됐다. 그는 한화에서 데뷔한 2006년 다승(18승) 평균자책점(2.23) 탈삼진(204개) 타이틀을 휩쓰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면서 역대 최초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와 최우수신인선수(신인왕)를 함께 수상했다. 이후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7시즌 통산 98승 5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80을 남기고 2013년 MLB로 진출했다. 빅리그에서도 2020년 MLB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는 등 KBO리그 출신 선수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현역 시절 류현진과 상대했던 이호준 LG 코치는 "난 오른손 타자였지만 왼손 류현진의 공을 정말 치기 어려웠다. 무릎과 옆구리 깊숙한 쪽으로 공이 파고 들어와서 몸에 맞는 공이 될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가 선언되곤 했다"며 "공의 각도가 굉장히 좋았고, 체인지업을 포함해 여러 구종을 던지면서 모두 컨트롤이 좋았다. 다시 나오기 쉽지 않은 투수"라고 했다. 최태원 삼성 코치도 "왼손으로 시속 150㎞ 이상을 던지면서 경기 운영과 컨트롤은 역대 최고였다"고 했다. 류현진이 미국으로 떠난 뒤 한화로 온 포수 최재훈은 "설명이 필요없는 에이스"라며 "나중에 한화에서 배터리로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고 기대했다. 2명을 선정한 불펜 투수로는 오승환(삼성)과 구대성(전 한화)이 뽑혔다. 둘 다 강력한 구위 외에도 위기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강심장과 포커페이스로 이름을 날린 투수들이다. 이동욱 NC 감독은 "오승환과 구대성은 감독 입장에서 언제든 믿고 투입할 수 있는 투수"라고 했다. 오승환은 KBO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47) 세이브, 최다 연속경기(28) 세이브, 통산 최다 세이브(339)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최고 마무리 투수다. 성적뿐 아니라 마운드에서의 위압감도 역대 최강이었다. 5년간 일본과 미국에서 뛰다 지난해 복귀했지만, 40세 나이에도 여전히 국내 최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해 44세이브를 올려 구원왕 타이틀을 가져갔다. 최태원 삼성 코치는 "오승환이 마운드에 오르면 경기에 졌다고 여겼을 정도"라고 했다. 구대성은 1996년 다승 1위(18승)와 세이브 2위(24세이브)에 모두 이름을 올릴 만큼 전방위로 활약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7시즌 연속(해외 진출한 2001~2005년 제외) 20세이브를 올렸고, 1999년 한화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직접 마무리하면서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국제대회에서 '일본 킬러'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통산 성적은 67승 71패 214세이브, 평균자책점 2.85. 김종국 KIA 감독은 "구대성 선배처럼 배짱 있는 투구를 하는 투수를 본 적 없다"고 했고, KT 박경수는 "릴리스포인트가 보이지 않는 투수였다. 오른손 타자 몸쪽과 바깥쪽 제구가 자유자재였다. 너무 까다로웠다"고 기억했다. 포수 부문에선 역대 최고 공수겸장 포수로 꼽히는 양의지가 24표를 얻어 박경완(12표)을 두 배 차로 제쳤다. 양의지는 2020년 만장일치에 가까운 역대 최고 득표율(99.4%)로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을 만큼 현역 중엔 적수가 없는 독보적 1인자로 꼽힌다. 2015년부터 '두산 왕조'의 전성기를 앞장서 이끌었고, 2019년 NC 이적 2년 만에 창단 첫 우승의 디딤돌을 놓았다. 2019년 35년 만에 포수 타격왕에 오르고 지난해 포수 첫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작성하는 등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장정석 KIA 단장은 "양의지는 결국 가장 좋은 기록을 남기고 역대 최고 포수로 남을 것 같다"고 내다봤고, 이호준 코치는 "야구 센스와 수비, 타격 모두 (NC 시절) 옆에서 지켜 보니 깜짝 놀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포지션 구분 없이 역대 최고 선수라고 본다"고 치켜세웠다. 최태원 코치도 "공 배합이나 경기 운영, 리더십을 보면 박경완일 수 있겠지만, 공격력으로 보면 양의지가 압도적"이라고 선택의 이유를 밝혔다. 이뿐만 아니다. 박경수는 "양의지가 안방에 있으면, 투수가 아닌 포수와 싸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KT 소형준도 "내가 만약 감독이라면, 양의지 선배를 기용할 것 같다"고 했다.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은 "양의지가 선수 생활을 가장 오래 할 것 같다. 앞으로 다치지 않으면 5년은 더 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1루수 부문은 KBO리그 역대 최고 타자로 꼽히는 이승엽이 압도적으로 표를 얻었다. 이승엽은 1997년 삼성에서 데뷔한 이후 KBO리그 홈런의 역사를 다시 써왔다. 2003년 역대 한 시즌 최다 홈런(56개) 기록을 세웠고, 통산 최다 홈런(464개) 기록을 남기고 2017년 은퇴했다. 한국 프로야구에 처음으로 '400홈런'이라는 기록을 새긴 주인공이다. 일본에서 뛴 8년(2004~2011년) 성적을 포함하지 않았는데도 이승엽을 따라잡을 홈런 타자는 나오지 않았다. 일본전에서 결정적인 홈런이나 적시타를 때려내던 '국가대표 4번타자' 이승엽의 존재감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대체자가 없다. 실제로 수많은 투표인단이 "독보적", "압도적"이라는 감탄사를 쏟아냈다. 양상문 위원은 "이대호(롯데) 같은 선수도 뛰어났지만, 역대 최고 1루수는 단연 이승엽이다"라고 했고, 정경배 SSG 코치는 "그렇게 홈런을 많이 친 선수를 능가하는 타자가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SSG 최지훈은 "초등학교에서 야구하던 시절, 베이징올림픽(2008년) 야구 금메달의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누구나 알고 있는 '레전드'라서 고민 없이 뽑았다"고 했다. 2루수 부문에선 정근우(22표)가 박정태(14표)를 넘어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2020년 은퇴할 때까지 16년간 프로에서 뛴 정근우는 통산 1747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2, 1877안타, 722타점, 1072득점, 도루 371개를 기록했다. 안타·타점·득점 모두 역대 2루수 중 최다 기록이다. 또 세 차례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숱한 국제대회에서 국가대표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정근우 스스로 은퇴 기자회견에서 "역대 최고 2루수는 내가 맞는 것 같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했다. 소형준은 "2루 수비도 좋았지만, 타석에서 상대 배터리와 수비를 흔들 수 있는 타자였던 것 같다. 투수 입장에서도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고 했고, KIA 이의리는 "악바리 같은, 근성 있는 모습이 같은 운동 선수로서 인상적이었다"고 떠올렸다. 김경기 위원은 "2루수는 꾸준히 레전드급으로 활약하기 힘든 포지션인데, 정근우는 그중 팀에 가장 큰 도움이 됐다. 2루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했다. 김종국 감독은 "함께 뛰어 본 선수 중 가장 좋은 2루수다. 공·수·주 모두 독보적이었고, 근성도 뛰어났다. 신체 조건이 좋은 편은 아닌데 그런 단점도 이겨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경수는 "국가대표팀에서 보여준 좋은 플레이와 임팩트가 2루수 중 단연 최고"라고 했다. 쟁쟁한 후보가 많았던 유격수 자리는 이종범(28표)이 차지했다. 1993년 해태에서 데뷔한 이종범은 천재적인 야구 센스를 뽐내면서 공·수·주를 가리지 않고 펄펄 날았다. 1990년대 '해태 왕조'의 집권기를 연장한 주역이다. 특히 1994년에는 타율 0.393, 196안타, 113득점, 도루 84개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남겨 단숨에 프로야구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 타율 0.393은 프로야구 원년의 백인천(0.412) 이후 여전히 가장 높은 기록으로 남아 있고, 한 시즌 도루 84개는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기록 중 하나로 회자된다. 양상문 위원은 "이종범은 팀을 우승시킨 선수다. 개인 기록도 좋지만, 팀 기여도가 높았다"며 "김재박, 류중일, 류지현 등 뛰어난 선수가 많았지만, 이종범은 타격과 도루도 잘하면서 '유격수'라는 포지션이 공격까지 잘해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장정석 단장은 "그야말로 '야신'이다. 정말 야구를 위해 태어난 선수 같았다. 플레이가 리그 최정상급을 넘어 독보적이었다"고 평가했고, NC 송명기는 "수비, 타격, 주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그냥 레전드"라고 했다. 조웅천 SSG 코치는 "박진만이라는 훌륭한 유격수조차 이종범이라는 큰 산을 넘기는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3루수 부문에선 현역 선수인 최정이 투표인단 중 23명의 선택을 받아 올스타로 뽑혔다. 김동주(11표), 한대화(5표)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전직 국가대표 3루수들을 제치고 57.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005년 SK(현 SSG)에서 데뷔한 그는 지난 시즌 이승엽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400홈런 고지를 밟았다. 세 차례 홈런왕을 수상했고, 최근 6시즌 동안 2019년(홈런 29개)을 제외하고 매년 30홈런을 넘겼다. 현재 통산 홈런 수는 403개. 이승엽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에 도전할 유일한 후보로 꼽힌다. 롯데 감독 출신인 조원우 SSG 코치는 "현재 기록도 뛰어난데 앞으로 더 많은 기록을 깰 것"이라고 했고, 김종국 감독은 "3루수가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리빙 레전드'로 향하고 있는 최정을 뽑았다. 아직 현역이지만, 아마 은퇴 후 그가 남긴 기록이 더 각광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의리는 "꾸준하게 좋은 기량을 유지하시면서 롱런하시는 부분이 부럽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SSG에서 한솥밥을 먹는 후배들은 공격력에 가려진 최정의 수비에 높은 점수를 줬다. 투수 박종훈은 "홈런 능력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뛰어나 멋있는 선수인 것 같다. 같은 팀이 아니었어도 뽑았을 것 같다"고 했다. 외야수 최지훈은 "많은 분이 장타력을 강점으로 보시겠지만, 실은 어깨도 강하고 수비력도 뛰어난 선배님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니 더 대단해 보인다"고 감탄했다. 외야 세 자리를 지킬 선수로는 고(故) 장효조와 양준혁, 박재홍이 차례로 선정됐다. 장효조는 26표로 외야수 후보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양준혁은 22표를 받았다. 투표인단 절반(20명)의 지지를 얻은 박재홍은 LG 출신 이병규(9번·18표)를 2표 차로 제치고 마지막 한 자리를 꿰찼다. '타격 기계'라는 별명의 원조인 장효조는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의 왼손 콘택트 히터였고, 강팀 삼성의 간판타자였다. 프로에서 뛴 10시즌(1983~1992년) 중 4차례(1983년, 1985~1987년) 타격왕에 올랐고, 선구안이 좋아 "장효조가 치지 않은 공은 볼이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프로 통산 타율 0.331은 여전히 깨지지 않은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고향팀 삼성에서 2군 감독을 맡고 있던 2011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 야구계를 안타깝게 했다. 이종열 SBS 해설위원은 "공격력 면에서 최고의 외야수였다. 장효조 선배님을 보면서 타격을 연구한 선수들이 많았다"며 "어떤 상황에서든 배트 중심에 맞힐 수 있는 선수"라고 했다. 박경수는 "학생 때 나를 지도해주신 많은 분이 늘 장효조 선배님을 언급하며 '너무 잘 치는 타자'라고 하셨다. 발도 빠르셨다고 들었다"고 떠올렸고, 삼성 백정현은 "팀 기여도가 눈에 보이는 기록 그 이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경배 코치는 "장효조 선배의 통산 타율은 현역 선수들의 기록보다 그 가치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며 "장효조 선배가 같은 선수가 또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양준혁은 KBO리그를 대표하는 타자 중 한 명이자 이승엽과 함께 삼성을 상징하는 레전드 스타다. 1993년부터 2010년까지 18년간 프로에서 뛰었는데, 3할을 넘기지 못한 시즌은 단 4번뿐이다. 통산 2135경기에서 타율 0316, 안타 2318개, 홈런 351개, 1389타점, 볼넷 1278개, 사구 102개를 기록하면서 은퇴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다 안타, 타점, 득점, 4사구 기록을 남겼다. 서용빈 감독은 "양준혁 선배는 장타, 콘택트, 기록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역대 최고 외야수로 빼놓을 수 없다"고 했고, 박경수는 "프로야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타자"라고 인정했다. 김혜성은 "항상 1루로 전력질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박재홍은 '현대 왕조'의 주역으로 꼽힌 천재형 외야수다. 신인이던 1996년 홈런 30개를 치고 도루 36개를 해내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동시에 리그 역사상 유일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다. 타격의 정교함, 파워, 견고한 수비, 강한 어깨, 빠른 발을 모두 갖춘 '5툴 플레이어'의 대표 격이다. 2000년대 후반 SK의 전성기에도 힘을 보탠 뒤 2012년 은퇴했다. 이의리는 "박재홍 선배님은 '호타준족'이 무슨 뜻인지 내가 인지할 수 있게 해준 선배님"이라고 했고, 김종국 감독은 "공·수·주에서 완벽한 천재형 선수다. 야구 하는 능력이 정말 좋았다"고 감탄했다. 조웅천 코치는 "최초의 30홈런-30도루를 해냈고, 그 후 두 번 더 같은 기록을 달성한 게 대단하다"고 했고, 김혜성은 "신인 선수의 30홈런-30도루가 쉽지 않은 만큼 더 인상적"이라고 기억했다. 배영은·배중현·이형석·안희수·차승윤 기자 2022.01.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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