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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 핸드볼,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선리그 1차전 우즈벡 완파

남자 핸드볼대표팀이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선리그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한국은 22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담맘에서 열린 제20회 아시아 남자핸드볼 선수권대회 결선리그 1조 1차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을 31-21로 제압했다. 조별리그에서 싱가포르, 요르단, 쿠웨이트를 차례로 꺾은 데 이어 결선리그 1차전까지 승리, 4연승을 질주했다. 경기 초반 5-2 리드를 잡은 한국은 5-5 동점을 허용한 뒤 7-9까지 밀렸다. 하지만 작전타임으로 분위기를 전환했고 4연속 득점으로 11-9를 만들었다. 신재섭의 버저비터까지 터져 전반전을 13-11로 앞섰다. 후반 시작과 함께 처음 투입된 박세웅이 득점포를 가동, 5분 만에 18-13으로 점수 차를 벌렸다. 박재용의 선방과 김진영의 득점까지 터져 후반 8분 21-14로 달아났다. 후반 내내 경기력에서 우위를 보인 한국은 이요셉과 박세웅의 속공 플레이까지 살아나 10점 차 낙승을 거뒀다. 한국은 25일 자정 홈팀 사우디아라비아와 결선리그 2차전, 26일 오후 8시 카타르와 3차전을 치른다. 결선리그 조별 상위 두 팀은 준결승에 진출하고 3위는 5~6위전, 4위는 7~8위전을 치른다. 최종 5위까지는 2023년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획득한다. 1977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남자핸드볼은 총 9번의 우승, 4번의 준우승을 기록했다. 19회 대회에선 카타르에 져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2.01.2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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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 핸드볼대표팀, 아시아선수권 출전…12일 새벽 출국

제20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 출전하는 남자 핸드볼대표팀이 출국했다. 대한핸드볼협회에 따르면 남자 핸드볼대표팀은 사우디아라비아 담맘에서 열리는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해 12일 새벽 카타르로 출국했다. 남자 핸드볼대표팀은 지난달 30일부터 진천선수촌에서 약 2주 정도 훈련했다. 카타르에서 짧게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뒤 16일 사우디아라비아에 입성할 예정이다. 국가대표팀에는 2년 전 아시아선수권 준우승 당시 국가대표였던 김동명(PV·두산) 박세웅(PV·SK호크스) 최범문(LW·충남도청)을 필두로 지난 시즌 리그 신인상 신재섭(RB·하남시청) 스페인리그에서 활약중인 김진영(RB·아데마르 레온)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번 시즌 상무에서 전역한 장동현(LW·SK호크스) 김동욱(GK·두산)과 기존 선발된 이현식(LB·SK호크스) 박광순(LB·하남시청)이 부상으로 명단에서 제외되고 김태규(LB·SK호크스) 이요셉(LB·인천도시공사)이 대체 발탁됐다. 제20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는 일본이 팀 내코로나 19 확진으로 불참해 16개국이 참가한다. 각국은 4개 조로 나뉘어 조별예선을 치른 뒤 조별 상위 두 팀이 본선으로 진출, 2개 조로 나뉘어 한 번 더 결선리그를 진행한다. 결선리그 각 조 2위 안에 들어야 준결승에 오를 수 있다. 한국은 A조에 속해 싱가포르(18일) 요르단(20일) 쿠웨이트(22일)를 차례로 상대한다. 이번 대회에서는 상위 5개 팀에게 제28회 세계남자선수권대회 (폴란드·스웨덴) 출전 티켓도 주어진다. 1977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남자핸드볼은 총 9번의 우승, 4번의 준우승을 기록했다. 19회 대회에선 카타르에 져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2.01.1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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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②] '슈퍼스타' 차범근·선동열·최동원…서울올림픽 감동에 푹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①] '박치기왕' 김일에 열광하고 양정모 첫 올림픽 금에 환호[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③] 스포츠 영웅들, 국민에게 희망을 안기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④] 2002년 '붉은 물결' 대한민국을 휩쓸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⑤] 김연아·이상화·손흥민…천재들의 시대가 열리다 2019.09.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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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0 특별기획]한국스포츠 50년, 슈퍼스타 50인, 환희의 50신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 <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89~1999 :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 희망을 안긴 영웅>19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실의와 고통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안긴 스포츠 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가 곧 희망이자 위로였다. -박찬호(야구)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는 IMF 위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긴 영웅이었다.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7년 1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1998년 15승을 수확하며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2000년 18승을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아시아 최다승이다. 또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동메달 등을 이끌며 야구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세리(골프)IMF 위기의 시절 국민들을 위로했던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박세리다.미국 LPGA 개척자.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들었고, 데뷔 4개월 만에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US오픈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특히 US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한 장면은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박세리의 모습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LPGA 25승으로 한국인 최다 우승자 역시 박세리다. -황영조(마라톤)'몬주익의 영웅'의 등장으로 한국 육상은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다.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뒤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힘차게 들고 골인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육상 첫 올림픽 금메달.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금메달 이후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이후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다시 한 번 포효했고, 1994년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인 2분8초09를 기록했다. -심권호(레슬링)심권호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다.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건 뒤 1995년 프라하세계선수권,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48kg급이 폐지되자 54kg급으로 체중을 늘려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1998년 예블레세계선수권·1998년 방콕아시안게임·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금메달을 일궈냈다. 하계올림픽 최초 올림픽 2연패,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두 체급 석권 그리고 세계 레승링 최초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기영(유도)한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는 유도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전기영이다.유도 천재, 업어치기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가한 1993년 해밀턴세계선수권 78kg급에서 우승했다. 한국 역대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는 86kg급에 도전해 금메달을 차지, 두 체급을 석권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1회전을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이기며 정상에 섰다. 1997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도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박주봉(배드민턴)배드민턴의 교과서 박주봉.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전설이었다.1980년 17세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고, 1982년 덴마크오픈에서 이근구와 한 조로 역대 최연소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19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 우승·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19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 금메달·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1991년 코펜하겐세계선수권 1위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년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했다. -전이경(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유일한 선수, 전이경이다. 그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1988년 1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어 1995년 요빅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1996년 헤이그, 1997년 나가노까지 개인종합 3연패를 일궈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도 1000m와 3000m 계주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최초로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품었다. -허재(농구)농구대통령이 당선됐다. 농구 9단이라 불리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 허재다.중앙대 1학년 시절 농구대잔치에 나서 평균 24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자 기아 왕조가 구축됐다. 기아의 에이스로 농구대잔치 5연패 등 7회 우승을 일궈냈다. 3번 MVP를 수상했고, 베스트 5에 6회 포함됐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세계선수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넣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홍명보(축구)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그는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품었다. 이후 일본 J리그에서 진출하며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한국 대표팀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홍명보는 A매치 136경기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씨름)이만기를 1인자에서 내려앉히고 새로운 1인자로 등극한 괴물, 강호동이다.이만기의 은퇴는 곧 강호동이라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과 연결된다. 1989년 일양약품에 입단한 20세 강호동은 첫 백두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4강에서 이만기와 첫 공식전에서 맞붙어 2-0으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990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천하장사에 올라섰다. 이후 백두장사 7회, 천하장사 5회를 차지했다. 최단기간 천하장하 5회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이 은퇴하자 씨름의 황금기도 끝났다. <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2009~2019 : 동계스포츠의 비상 그리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과거 한국의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종목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연아(피겨)한국 동계스포츠의 역사는 김연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김연아가 나온 건 기적이다.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피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하이라이트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김연아는 쇼트 78.50점, 프리 150.06점 총합 228.56점으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 선수권·그랑프리 파이널 등을 모두 제패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기록됐다. 11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상화(스피드스케이팅)'빙속여제' 이상화를 빼놓고 한국 동계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2010년 밴쿠버올림픽 여자 500m에서 76초09로 우승, 한국 여자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74초70, 올림픽 신기록으로 2연패에 성공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메달을 딴 선수로 남았다.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나온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성빈(스켈레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딴 주인공, 윤성빈이다.한국 스켈레톤의 간판인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1∼4차 레이스에서 무려 3차례나 트랙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1∼4차 합계 3분20초55로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과 아시아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켈레톤 불모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윤성빈. 그의 헬멧에 그려진 아이언맨처럼 그는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 -양학선(체조)한국 체조의 새로운 역사, 도마의 신이 창조했다. 양학선이다.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양학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구에서 단 한 명만 할 수 있는 최고난위도 기술 '양학선'을 앞세워 도마 금메달을 차지했다. 16.533점. 압도적 우승이었다. 한국 체조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2013년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황경선(태권도)태권도 종주국 한국. 수많은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섰다. 그중 가장 많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는 '태권여제' 황경선이다.18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67kg에 나서 동메달을 차지한 그는 2005년 마드리드세계선수권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그리고 2007년 베이징세계선수권까지 재패한다. 남은 건 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진출을 일궈냈다. -박인비(골프)미국 LPGA에는 한국 여성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 최선봉에 자리를 잡은 스타, 박인비다.골프 여제의 2008년 US오픈 우승.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US오픈 총 2회 우승 등 메이저대회에서 7회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고 기록이다. LPGA 통산 19승으로 박세리에 이은 2위다. 56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고, 4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아시아 최초로 달성하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인비 품에 안겼다. -정현(테니스)2018년 1월, 한국에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정현이 일으켰다.정현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2018년 호주오픈 1~3라운드에서 미샤 즈베레프·다닐 메드베데프·알렉산더 즈베레프를 연이어 꺾으며 기대를 받았다. 16강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노박 조코비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 한국에 정현 신드롬이 일어났다.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마저 넘으며 4강에 올라섰다. 4강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김연경(배구)한국 여자배구에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는 없었다. 김연경이다.흥국생명에 입단한 2005년. 득점상·공격상·서브상·신인왕·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한다.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인 지 알 수 있는 기록. 이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2009년 일본 JT마베라스 유니폼을 입은 뒤 2011년 터키 페네르바체로 이적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다. 가는 팀마다 우승으로 이끌면서 가치는 올라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배구대표팀에서도 기둥이었다. -류현진(야구)21세기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류현진이다.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자마자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한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가 됐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한 첫해 14승 올리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후 꾸준함을 보이다 2019년 평균자책점 전체 1위를 기록,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등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야구대표팀 역사와도 함께 했다. -손흥민(축구)지금 한국 축구는 '손흥민의 시대'다.2010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레버쿠젠을 지나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세계 톱클래스 공격수로 거듭났다. 특히 2018~20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우승후보 맨체스터 시티를 침몰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손흥민을 앞세운 토트넘은 최초로 결승에 올랐다. 축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주인공.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2019.09.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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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의 전술노트]세계대회를 통해 본 남자핸드볼 현실

유럽 강호를 상대한 다섯 경기는 전패. 최종 순위는 22위. 초라한 성적이다. 한국 남자 핸드볼대표팀의 현주소다. 유럽과 비유럽 국가 간 전력 차이는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진 것 같다. 지난달에 폐막한 2019 세계남자핸드볼선수권대회에서 재확인됐다. 아시아 4개국(남북 단일팀·일본·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 가운데 카타르만 상위 순위 결정전에 진출했다. 카타르는 유럽과 아프리카 출신 귀화 선수를 보유했다. 세계 8강권 전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아시아 맹주를 넘어 세계 10위권을 바라봤다. 1988년에 개최된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말까지 다수의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강재원·심재홍·윤경신·조치효·최현호·황보성일·한경태·백원철·이재우 등 많은 선수들이 큰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췄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박중규·박찬영·정의경·윤시열·정수영 등 젊은 선수들이 꿰찼다. 국내 리그의 발전도 도모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표팀의 세대교체로 이어졌다. 신구 조화도 돋보였다. 2008 베이징올림픽 8위, 2009 크로아티아 세계선수권대회 12위, 2011 스웨덴 세계선수권대회 13위를 차지했다. 세계 무대에서도 중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물론 아시아 무대에선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2012년을 기점으로 중흥기가 지난 모양새다. 급격하게 무너졌다. 2012 런던올림픽 예선에서 전패를 당했고, 2013년에 열린 스페인 세계선수권대회는 21위에 그쳤다.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선언한 뒤 출전한 2014 바레인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5위에 머물렀다. 세계선수권 출전도 불발됐다. 이후에도 아시아 대회에서 부진하며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2019년 독일 대회는 6년 만에 출전하는 세계선수권대회다. 지난해 수원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3위에 오르며 진출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온전한 최상의 전력 구축은 하지 못했다. 부상이나 소속팀 사정으로 기량과 경험을 두루 갖춘 선수를 선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있는 선수는 정수영과 나승도, 2명뿐이었다. 그래서 신예 선수를 대거 발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 처음으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며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딛기도 했지만, 전력 상승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세계 랭킹 5위) 러시아(4위) 독일(1위) 세르비아(6위) 브라질(27위)과 함께 최악의 조에 편성됐다. 1승조차 기대하기 어려웠고, 실제로 그랬다. 기록으로 한국 남자 핸드볼과 세계 수준 차이를 짚어 보자. 일단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단일팀은 일곱 경기에서 총 177득점을 기록했다. 참가국 가운데 19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슈팅 성공률(56%)은 20위. 일곱 경기를 기준으로 최다 득점을 기록한 국가는 노르웨이다. 339개 슈팅 가운데 237득점을 했다. 성공률은 80%다. 단일팀과 무려 60골 차이가 난다. 단일팀의 평균 신장은 180cm대 초반이다. 그러나 유럽 국가 선수들은 대체로 190cm가 넘는다. 코트 안에서 신장과 힘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한국의 강점인 1 대 1 돌파와 속공 플레이가 많이 나오지 않은 이유다. 과거보다 체격 조건은 조금 나아졌지만 기동력이 비례해 상승하지 않은 점도 영향을 미쳤다. 오히려 힘을 앞세운 유럽 선수들의 돌파가 더 위력적으로 전해졌다. 과거에 유럽 선수들은 체격 조건이 좋고 파워가 강했지만 기동력은 떨어졌다. 그러나 점차 속도전까지 앞서고 있다. 수문장의 대응력도 아쉬웠다. 단일팀은 총 291개의 슈팅을 허용했고, 그 가운데 75개(15위)를 막아 냈다. 세이브율은 26%. 세이브 1위 스웨덴은 총 265개의 슈팅 가운데 101개(세이브율 38%)를 막아 냈다. 골키퍼도 유럽 선수가 높은 타점에서 던지는 슈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수비수 머리 위에서 던지는 강력하고 높은 타점의 슈팅을 이전에 막아 본 경험이 적었던 것. 공격수의 슈팅 기술과 속도는 점차 좋아진다. 그래서 유럽은 주로 맞춤형 방어 시스템을 가동한다. 골키퍼와 수비수가 슈팅 방어를 위해 사전에 약속된 동작으로 각자 다른 코스를 막는 방식이다. 단일팀은 힘과 높이를 앞세운 상대에 체계적인 수비를 하지 못했다. 순위와 기록이 초라하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국내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강전구가 국제 대회에서 빛났다. 소속팀 두산에서는 국내 최고 선수인 정의경이 버티고 있어 출전 시간이 적었던 선수다. 그러나 이번 대회를 통해 득점력을 증명했다. 그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못 던진 슈팅을 세계 대회에서 다 던져 보고 왔다. 국내에서도 멋진 슈팅을 기대해 달라"며 자신감을 전하기도 했다.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가 좋은 계기를 맞이했다. 신인 박광순과 대학생 강탄이 의미 있는 경험을 쌓은 것도 주목된다. 여자 국가대표팀 현직 전력분석원. 2012년 런던올림픽,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등 다수 국제대회에서 대표팀의 조력자로 나섰다.숫자는 스포츠를 모두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변화를 이끈다. 팬에게 즐거움도 선사한다.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핸드볼 전도사로도 나서고 있다.김혜민 여자 국가대표팀 전력분석원정리=안희수 기자 2019.02.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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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 핸드볼, 남북단일팀으로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남자 핸드볼대표팀이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대한핸드볼협회는 17일 '남자 핸드볼대표팀이 내년 1월 10일 독일과 덴마크에서 공동으로 개최되는 제26회 세계남자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한다'고 밝혔다. 남자 대표팀은 지난 1월 수원에서 열린 제18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차지해 6년 만에 세계선수권 출전 티켓을 따냈다.일정도 확정됐다. 17일 진천선수촌에서 1차 훈련을 하고 21일 독일로 출국한다. 북측 대표 선수단과 22일 독일 현지에서 합류해 약 2주간 합동 전지훈련을 마친 뒤 내년 1월 10일 베를린에서 개최국 독일과 개막전을 치를 예정이다.조영신 감독(상무 피닉스)이 이끄는 이번 남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은 지난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보다 연령대를 평균 4세 이상 낮추며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베테랑 정수영(RB·하남시청)과 나승도(RW) 조태훈(RB·이상 두산)을 중심으로 구창은(PV·두산) 장동현(LW·SK 호크스) 최범문(LW·충남체육회) 정재완(PV·하남시청) 등 기존 아시안게임 대표 7명을 선발했고 부상에서 돌아온 김동명(PV·두산)과 1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활약했던 박광순(LB·하남시청)과 박재용(GK·한체대)이 다시 합류했다.또한, 박영준(LB·상무)과 김동욱(GK·경희대)이 대표팀에 승선했고 강전구(CB·두산) 서승현(LW) 박동광(RW·이상 하남시청) 강탄(CB·한체대)이 처음으로 성인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젊은 피를 대거 수혈한 남자 대표팀은 16명의 평균연령이 25.8세로 지난 아시안게임보다 평균연령을 대폭 낮췄다. 여기에 북측 선수 4명이 합류해 총 20명이 단일팀을 구성할 방침이다.독일과 덴마크에서 공동으로 개최되는 이번 대회는 24개국이 참가해 4개 조로 나뉘어 경기를 펼치게 된다. 조별리그로 펼쳐지는 예선에서 A·B조 상위 3개 팀, C·D조 상위 3개 팀까지 각각 2개 조의 본선 라운드에 진출하게 되며 각 조의 상위 2개 팀이 4강에 진출해 준결승과 결승 토너먼트를 치러 최종 순위를 가린다.이번 남자 핸드볼 단일팀 구성은 지난 5월 초, 국제핸드볼연맹(IHF)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IHF는 단일팀 선수 엔트리를 16명에서 20명으로 확대하는 등 단일팀 구성을 주도했고 대한핸드볼협회는 엔트리 확대에 동의하며 남북 교류 상황에 맞춰 추진해 왔다. 이후 남북 체육분과회담과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ANOC) 총회에서 단일팀 합의와 합동 훈련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고 대회가 열리는 독일에 조기 입국해 전지훈련을 진행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했다. 단일팀의 명칭은 평창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코리아로 결정했으며 약어는 COR. 개최국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러시아·세르비아·브라질과 함께 A조에서 대회를 치른다. 단일팀과 독일의 개막전 경기에 IOC(국제올림픽위원회) UN 및 독일 고위급 인사 등 다수 VIP가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한편 한국 남자 핸드볼은 1986년 제11회 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 총 11번 참가했다. 제15회 대회(1997년)에서 8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제23회(2013년) 이후 출전권을 따내지 못했다.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tbc.co.kr 남자핸드볼 남북단일팀 명단 성 명 소 속 비 고 감독 조영신 상무피닉스 코치 백원철 하남시청 코치 강일구 대한핸드볼협회 코치 신명철 북한 선수단 NO. 성명 소속 출생년도 포지션 비고 66 김동욱 경희대학교 1997년생 GK   1 박재용 한국체육대학교 1997년생 GK   22 서승현 하남시청 1991년생 LW   11 장동현 SK호크스 1995년생 LW   10 박영준 상무피닉스 1994년생 LB   23 박광순 하남시청 1996년생 LB   34 강전구 두산 1990년생 CB   5 최범문 충남체육회 1996년생 CB   20 강탄 한국체육대학교 1999년생 CB   7 정수영 하남시청 1985년생 RB   9 조태훈 두산 1991년생 RB   17 나승도 두산 1990년생 RW   13 박동광 하남시청 1996년생 RW   15 김동명 두산 1985년생 PV 88 구창은 두산 1993년생 PV 52 정재완 하남시청 1996년생 PV 2 리경송 1997년생 CB 북한 선수단 3 박종건 1998년생 LB 북한 선수단 13 리영명 1998년생 RB 북한 선수단 14 리성진 1989년생 LB 북한 선수단 2018.12.1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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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핸드볼 대표팀, 아시아선수권 4연패 도전

여자 핸드볼대표팀이 아시아선수권대회 4회 연속 우승에 도전한다. 강재원 감독 체제로 출범한 대표팀은 오는 30일부터 일본 구마모토에서 개막하는 제17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리그 대표 선수 16명이 지난 14일 진천 선수촌에 입촌해 2주 동안 훈련을 진행했고, 28일 격전지로 출국했다. 이번 대회에는 10개국이 참가한다. 중국·홍콩·싱가포르·인도와 예선 B조에 편성됐다. A조는 일본·카자흐스탄·이란·호주·뉴질랜드다. 한국은 아시아 강국이다. 이 대회에서 13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2012년 열린 14회 대회부터 3회 연속 정상을 지켰다. 지난 8월에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도 결승까지 6전 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2연패다. 심해인(31) 주희(29) 류은희(28·이상 부산시설공단) 등 베테랑 선수에 유소정(22·SK) 강은혜(22·부산시설공단) 박지원(18·경남체고) 등 신예가 합류했다. 대표팀은 아시안게임부터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평가다. 리그 대표 선수자 대표팀 주축이던 김온아(30·SK) 정지해(33·삼척시청) 권한나(29·부산시설공단)가 이번 대회에 출전하지 않지만 정유라(26·컬러풀 대구) 이효진(24·삼척시청)이 주축으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었다. 이효진·이미경(히로시마) 최수지(SK 슈가글라이더즈)로 구성된 센터백 포지션의 변화로 경쟁력을 갖췄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대표팀을 4위로 이끈 강 감독의 검증된 지도력도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는 요인이다. 경쟁 상대는 일본과 중국·카자흐스탄으로 꼽힌다. 일본은 2019년 세계여자선수권, 2020 도쿄올림픽 유치국이다. 덴마크 출신 울리크 커클리 감독을 선임해 전력 강화를 노린다. 카메타니 사쿠라·이케하라 아야카·수나미 카오 등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지 않았던 유럽파가 총출동한다. 중국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우베 롬멜 감독이 팀을 맡은 뒤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첫 경기는 오는 30일 오후 7시에 열리는 인도전이다. 12월 1일 싱가포르, 4일 홍콩, 5일 중국을 차례로 만난다. 지난 2일 개막한 SK 핸드볼 코리아리그는 대회 준비 관계로 잠시 중단됐다. 안희수 기자 2018.11.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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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위원 삼총사' 백상서·조은희·최현호가 말하는 한국 핸드볼

'함성을 던져라!' 2018~2019 SK핸드볼코리아리그가 시작된다. 다음 달 2일 SK슈가글라이더즈와 광주도시공사의 여자부 경기를 시작으로 2019년 4월 22일까지 이어지는 6개월간 대장정의 막을 올린다. 서울·삼청·대구·마산·청주·인천·천안까지 전국 7개 도시를 순회하며 열리는 이 대회는 핸드볼의 활성화를 위해 2009년 출범한 실업 리그다. 이후 대한민국 핸드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자리를 굳혔다. 올 시즌은 특별한 변화가 많이 생겼다. 처음으로 봄과 여름이 아닌 겨울에 리그를 진행한다. 하남시청이 남자 핸드볼팀을 창단해 남자부가 6개 팀으로 늘어났다. 무엇보다 JTBC3 FOX Sports(이하 JTBC3)에서 리그 전체를 생중계해 일반 팬들이 안방에서 TV로 핸드볼을 볼 수 있게 됐다.여러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 선수와 지도자를 역임했던 백상서(49) 조은희(46) 최현호(42) 해설위원이 마이크를 잡고 이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간스포츠가 세 위원을 직접 만나 기념비적인 대회 개막을 앞둔 기대와 설렘 그리고 한국 핸드볼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 JTBC3 채널에서 사상 최초로 핸드볼 리그 전 경기를 TV로 중계하게 됐다. 해설위원을 맡은 소감과 각오는. 백상서(이하 백)= "핸드볼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020 도쿄올림픽에 앞서 메달 획득의 초석을 놓을 수 있는 대회라서 더 그렇다. 일단 팬들이 듣기에 재미있는 해설을 하고 싶다. 핸드볼에 재미를 느끼고 경기장에 찾아올 수 있도록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해설을 할 생각이다. 인터넷이나 모바일이 아닌 TV로 리그 전체를 중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더 기대된다." 최현호(이하 최)= "핸드볼을 사랑하는 팬이자 핸드볼인으로서 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관중이나 시청자분들이 핸드볼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열심히 해 보겠다. 2005~2006시즌 이후 해설은 10여 년 만이라 긴장되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 내가 재미있게 해야 보는 분들도 즐기실 수 있지 않나. 또 무조건 좋은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돌직구' 같은 해설을 할 생각이다. 쓴소리해야 할 때는 따끔하게 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선수들과 시청자 그리고 내가 함께 호흡한다는 생각으로 현장감을 살리고 싶다." 조은희(이하 조)= "처음 해설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놀랐다. JTBC PLUS에서 핸드볼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전 경기를 중계해 준다는 게 뿌듯하다. 내가 아는 핸드볼 팬들이나 SNS에서 알게 된 팬들은 물론, 최근에 만난 핸드볼 관계자들이나 감독, 코치들이 모두 굉장히 좋아하고 있다. 핸드볼을 좀 더 쉽게 알리고 시청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해설자가 돼야 할 것 같다." - 핸드볼은 일반 스포츠팬들에게 상대적으로 낯선 종목이다. 어떤 재미가 있는지 소개한다면. 백= "일단 굉장히 빠르고, 익사이팅하고, 몸싸움이 굉장히 심하다. 핸드볼이 인기가 많은 유럽에선 그 과정을 즐기고 굉장히 감동받더라. 다만 핸드볼 룰이 조금 어려워서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면이 있다. 팬들이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그런 부분을 보완하는 중계를 하겠다." 최= "내가 봤을 때 핸드볼은 굉장히 많은 스포츠를 접목한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종합적인' 운동이다. 스피디하고, 파워풀하고, 때로는 전략적이기도 하고, 와일드한 몸싸움도 있다. 여러 가지를 한번에 볼 수 있는 종목이다." 조= "각 종목의 장점을 다 가졌다. 몸싸움이 많다 보니 선수들끼리 스킨십이 잦아서 경기 자체에 인간미가 있고, 단체 종목이니까 응집력에서 오는 감동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룰도 어렵다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농구의 룰에서 살짝 변형된 것들이 많다. 해설로 쉽게 풀어 가면 팬들이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예전보다 팬이 많아져서 모바일 중계 조회 수가 높고 댓글이 많아졌다. JTBC3에서 중계하면서 TV와 모바일로 동시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생겼으니 팬들이 다가오기가 더 쉽지 않을까." - 이번 대회 우승팀이나 판도를 예상해 본다면. 백= "여자부에선 아무래도 삼척이 우승에 가까운 팀이다. 또 얼마 안 있으면 신인 드래프트가 열리는데, 이때부터 대학교나 고등학교에서 온 선수들이 게임을 많이 뛰게 된다. 이 시기에 좋은 선수를 보강할 수 있는 팀이 유리해진다. 부산이나 대구 같은 팀도 우승권에 가까워질 것 같다." 최= "어떤 팀이든 준비를 많이 하고 시작할 것이다. 남자부에서는 역시 두산이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한다. 다만 두산도 약점이 있다. 리빌딩 과정이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주축 선수들이 대부분 베테랑이다. 올해까지는 우승 후보일 것 같지만, 그 후엔 대비가 필요하다. 여자부에서는 삼척이나 서울·대구가 강하다. 여자 핸드볼은 아무래도 선수층이 두껍다 보니 남자 리그보다 더 접전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남자부도 여자부 같은 방향을 찾아 나가야 하지 않나 싶다. 일부 선수의 기량에 좌우되지 않고 전체 팀이 나름의 색과 파워를 가진 팀이 돼야 한다." 조= "이번 대회는 변수가 많을 것 같다. 드래프트가 끝나고 나면 선수들이 합류해 손발을 맞춰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이적하는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뛰는 내년 1월부터 판도가 확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여자부는 첫째 주 경기를 치르고 나면 아시아선수권 참가를 위해 한 달 정도 휴식기가 있다. 따라서 그 전까지는 탐색전이라는 느낌이 강하고, 내년 1월 이후에 모든 팀이 정상 전력 속에서 더 재미있는 대결을 할 수 있다. 남자부는 반대로 내년 1월에 세계선수권이 있어서 그 전에 순위의 윤곽이 조금 드러날 것 같다. 전체적으로 선수 구성이 좀 달라진 팀이 있는 반면, 기존 전력을 7~8년째 이어 온 팀도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 미래의 핸드볼 팬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선수가 있나. 백= "아무래도 역시 여자부의 김온아(SK슈가글라이더스) 선수와 류은희(인천시청) 선수다. 국가대표 생활도 오래 했고, 2016 리우 올림픽에서 좋은 활약을 했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선수들이고, 실력이 좋다." 최= "여자부에선 김온아 선수가 독보적이다. 남자 선수 가운데선 역시 정이경(두산) 선수가 가장 특출하다. 다만 정이경은 은퇴를 몇 년 남기지 않은 베테랑이라는 점이 아쉽다. 그가 은퇴하기 전에 뒤를 이을 만한 선수가 많이 생기면 좋겠다. 사실 그동안 남자 핸드볼의 간판은 누가 뭐래도 윤경신(두산 감독) 선배였다. 그런 선수가 한국에서 나왔다는 게 행복하고 자랑스러울 만큼 세계적인 선수였는데, 그런 선수가 또 나타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어느 정도 비등한 선수를 찾아내고 키워야 하는 게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조= "지난 8월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정유라(컬러풀 대구) 선수와 왼손잡이 거포 류은희 선수를 추천하고 싶다. 한국 여자 핸드볼대표팀이 늘 외곽에서 파워가 있는 슈팅을 할 수 있는 거포 부재를 걱정했는데, 류은희는 그 점을 채워 줄 수 있는 선수다. 정유라는 류은희와 장점이 확연히 다르다. 리그 때 서로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까 싶다. 또 이제 드래프트에 나올 강은혜(한체대) 선수도 주목할 만한 유망주다." - 한국 핸드볼의 현재를 진단한다면. 백= "아시아권에서 독보적이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기량이 좀 더 향상돼야 한다. 더 발전할 필요가 있다. 또 선수들이 경기도 중요하지만 멘틀이나 체력적인 부분을 잘 관리해야 한다. 특히 리그가 계속 진행되면 부상 염려가 커지기 때문에 늘 몸을 잘 관리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최= "신체 조건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선수들이 너무 몸을 사리면서 경기하는 것 같다. 스포츠는 감동을 줘야 한다. 예전에는 경기 도중 몸싸움하다 피가 나도 '이겨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뛰었다. 요즘엔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게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경기 현장에서만큼은 조금 더 그 안에 몰입하는 게 프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핸드볼이 위기라고 생각한다. 한때 '아시아의 맹주'로 불렸던 우리다. 유럽에서 '한국에 핸드볼 팀이 몇 개나 되냐'고 물었다. 실상을 알려 주자 '그 정도 팀으로 어떻게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냐'고 놀라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팀이 강해지기도 했고 반대로 우리가 약해지기도 했다. 그 부분을 협회나 지도자, 선수 모두가 자각하고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배영은 기자 2018.10.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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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톡] 레버쿠젠 류승우, 프라이부르크전 교체투입 데뷔전 外

○…한국 22세 이하(U-22) 축구대표팀이 26일(한국시간) 오만 무스카트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22 챔피언십 3-4위 결정전에서 요르단과 연장까지 총 120분 동안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뒤 승부차기에 들어가 2-3으로 패해 4위로 대회를 마쳤다. ○…김보경(25·카디프시티)이 26일(한국시간) 영국 볼턴 리복 스타디움에서 끝난 잉글랜드 FA컵 4라운드(32강전)에서 이청용(26·볼턴 원더러스)과 맞대결했다. 둘은 나란히 선발로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했고, 경기는 카디프시티의 1-0 승리로 끝났다. ○…독일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의 류승우(21)가 25일(한국시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열린 2013-2014 분데스리가 18라운드 프라이부르크와의 원정경기에서 후반 37분 손흥민(22) 대신 교체투입되며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경기는 레버쿠젠이 2-3 역전패했다.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첼시의 공격형 미드필더 후안 마타(26)를 영입했다고 26일(한국시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했다. 마타의 이적료는 3710만 파운드(약 666억 원)로, 맨유의 역대 최고 이적료다. ○…남자 핸드볼대표팀이 25일(한국시간) 바레인 마나마의 칼리파 스포츠 시티홀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선수권대회조별리그 A조 첫 경기에서 이란과 24-24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은 27일 중국을 상대로 첫 승을 노린다.○…최나연(27·SK텔레콤)이 26일(한국시간) 미국 바하마 파라다이스 아일랜드 오션클럽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퓨어실크-바하마 클래식 3라운드에서 7언더파를 쳐서 중간합계 15언더파 204타를 기록, 2위 리제트 살라스(25·미국)를 1타 차로 따돌리고 단독 선두로 뛰어올랐다. 2014.01.2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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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에이스 정의경·김온아 “남녀팀, 서로 성적 신경쓰여”

이제 핸드볼은 ‘후(後)생순’ 시대다. 핸드볼 하면 떠오르던 ‘우생순(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줄임말)’도 옛말이다. 여자 핸드볼대표팀을 이끌었던 우생순 세대가 대거 은퇴하고 대표팀은 한층 젊어졌다. 진작부터 세대교체를 진행해온 남자대표팀도 마찬가지다. '후생순'의 대표 주자는 여자 대표팀의 김온아(23·인천시체육회)와 남자 대표팀의 정의경(26·두산)이다. 김온아는 소년 같은 매력, 정의경은 예쁘장한 외모가 눈에 띈다. 여자대표팀은 지난달 중국에서 열린 런던 올림픽 아시아지역예선에서 전승을 거둬 본선 직행권을 따냈다. 8회 연속 올림픽 본선행이다. 남자팀도 이에 질세라 곧이어 런던 행을 확정했다. 아시아 최초의 핸드볼경기장(잠실 SK올림픽 핸드볼경기장)에서 이룬 쾌거였다. 김온아와 정의경은 모두 센터백으로, 경기를 조율하는 핵심 포지션을 맡고 있다. 지난 8일 태릉선수촌에서 이들을 함께 만났다. 남녀 대표팀은 아시아 예선을 마치자마자 또 훈련 중이었다. ? 남녀팀, 서로 성적 신경 쓰여- 아시아 예선이 끝난자마자 또 태릉선수촌이다. 김온아(이하 온아) : 다음달 초 브라질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있다. 올림픽 예선 끝나고 거의 쉬지도 못했다.정의경(이하 의경) : 내년 1월에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있다. 국가대표 된 이후에 3일 이상 쉬어 본 적이 없다. - 둘 다 올림픽 예선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다. 특히 일본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펄펄 날더라. (남녀 대표팀 모두 일본과 마지막까지 올림픽 출전권을 다퉜다) 온아 :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에 지는 바람에 동메달을 땄다. 이후 아시아선수권에서도 비겼다. 제대로 벼르고 있었는데, 부담감에 경기를 망칠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동안 여자대표팀이 아시아에서도 우승을 못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이번에 우승하며 홀가분해 졌다. 의경 : 한국에서 열린 대회였고, 일본과의 결승에는 관중도 많아서 더 의식이 됐다.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해 본적이 없어서 잘 하고 싶다는 욕심도 났지만, 그저 내 몫만 하자고 생각했다. -남자·여자 대표팀끼리 서로 견제도 하고 그러나. 의경 : 남자팀엔 그런 게 좀 있다. 남자는 1988 서울올림픽 이후 올림픽 메달을 못땄는데, 여자대표팀은 꼭 동메달이라도 따 온다. 이번에도 여자팀이 전승으로 우승해 부담됐다. 우리도 주목받고 싶은데 또 밀릴까봐. 온아 : 몰랐는데 작년에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좀 느꼈다. 그 때 남자대표팀은 금메달 땄는데 여자 대표팀은 동메달에 그쳤다. ○핸드볼뿐 아니라 축구도 '달인'- 핸드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의경 : 초등학교 핸드볼부 선생님이 간식 사준다고 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그 때는 맞으면서 운동할 때라…. 맞는 게 싫어서 운동을 그만두고 전학을 갔다. 그 학교에서도 운동을 하고 싶어 하키부에 들었는데 거긴 더 맞더라. 하키채로(웃음). 그래서 다시 핸드볼 하게 됐다. 온아 : 초등학교 4학년 때 오빠들이랑 운동장에서 농구, 축구하는 거 보고 선생님이 불렀다. 학교에 운동부가 핸드볼밖에 없었는데 들어간 지 한 달만에 대회에 나갔다. - 다른 종목 했다면?의경 : 농구했을 거다. 키가 크니까”온아 : 축구? 훈련할 때 축구한다. 축구랑 핸드볼은 두 종목 다 스텝이나 체력, 볼 센스가 중요하기 때문에 연관이 있다. 의경 : 온아가 그렇게 축구를 잘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핸드볼 하는 사람들 거의 축구 잘 한다. 난 지단이 아니고 ‘정단’이다(웃음).-둘 다 스무살 무렵부터 대표팀으로 뛰었다. 태릉에서의 추억이 많겠다. 의경 : 힘들게 훈련한 기억밖에 없다. 젊은 날을 훈련으로만 보낸다.온아 : 우린 20대를 모두 훈련만 하며 보내는 거다. ○이상형은? "예쁜 여자" "매력있는 남자"-오영란·강일구 핸드볼 커플도 대표팀 훈련하다 만났다고 들었다. 두 사람은 연애 해 본적 없나. 의경 : 당연히 있다. 모두 선수는 아니었고, 2번 정도 진지하게 만나봤다. 난 순정남이다. 정말 좋아하면 ‘올인’한다. 온아 : 나도 연애는 해 봤다. 100일을 넘긴 적은 없다. 자주 못 만나니 그냥 친구같이 되더라. -각자 이상형은?의경 : 난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좋다. 여기 하나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온아 : 그게 어려운 거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만 입어서 예쁘려면 날씬한 건 물론이고 얼굴도 예뻐야 한다.(정의경이 옆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잘 생긴 사람보다 보면 볼 수록 매력 있는 사람이 좋다. 의경 : 난 또 센스 있는 사람이 좋다. 원래 센터백은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이라 센스가 있어야 된다. 내가 센터백이라 그런지 센스를 좀 따지는 편이다. 손애성 기자 iveria@joongang.co.kr사진=이호형 기자 2011.11.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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