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는 원래 '대호'가 아니었다. '차호'였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이대호의 형 이차호(31)씨의 전언은 이렇다. "원래 대호 이름이 차호였어요. 제가 대호였죠. 할머니가 한글을 모르셔서 뒤바뀌었죠." 할머니는 손자들 이름 짓기에 공을 들였다. 부산서 유명하다는 작명소에 찾아가 거금을 들인 결과 장남은 '대호' 차남은 '차호'라는 이름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가 이름을 등록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가면서 시작됐다. 할머니는 글자를 몰랐다. 종이 위에 순서 없이 써 있던 '대호·차호'를 두고 고민하던 할머니는 동사무소 직원에게 "큰 손자 이름이 이건 것 같소"라며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뿔싸. 그 이름은 '차호'였다. 자연스럽게 이대호는 '대호'가 됐다.
이름이 좀 바뀌면 어떤가. 형제간 우애는 남부럽지 않았다. 저녁이면 형제는 쪽방을 흐릿하게 비추는 전등 밑에 마주 앉았다. 젖살이 통통한 대호가 "형아야. 옆집 검둥이가 흰둥이를 낳았다는데, 와 그라노?" 라고 시답지 않은 질문을 하면, 형이 "검둥이 배에 흰털 있다"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 나누는 두 사람 가운데엔 소쿠리가 놓여 있었다. "깻잎은 이래 묶는 기라." 형제는 할머니를 기다리며 저녁마다 시장에 내다 팔 된장 콩과 깻잎을 다듬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어요. 밤 늦게 돌아오는 할머니의 고단함을 덜기 위해 스스로 했지요."
대호·차호 형제는 어느 여름 처음으로 찾았던 사직구장을 잊지 못한다. "초등학생 둘이 표 값과 버스요금을 내려면 3000원이 필요했어요." 지금도 인기가 많지만, 1990년대 초반 부산서 롯데는 "영웅들의 구단"이었다. 당시 그들에게 3000원은 큰돈이다. 롯데의 야구를 보기 위해 형제는 용돈을 모았다. "몇 달 정도 꼬박 모았죠."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이였지만, 야구를 보는 기쁨과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넉넉한 인심도 정겨웠다. "야구장에 어린 아이 둘이 가면, 옆에 있던 아저씨들이 라면이나 과자를 줬어요. 그것 먹는 재미가 어찌나 좋던지요."
사직구장은 이대호에게 '야구공'을 선물하기도 했다. "홈런이나 파울성 타구가 관중석에 넘어오면 아주라~아~하잖아요. 그 공을 대호가 받았어요." 어떤 선수의 타구였는지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 공은 2010년 한국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선 이대호에게 중요한 의미였다. "그 공을 가지고 둘이 열심히 야구를 했어요." 연습용 공이 아닌, 진짜 선수들이 사용하는 공으로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기회는 이대호에게 밑거름이 됐다.
야구 선수로의 운명은 추신수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추신수가 부산 수영 초등학교로 3학년때 전학왔다. 같은 반에서 '고등학생 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이대호를 보고 학교 야구부 감독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추신수의 거듭된 채근에 결국 야구부에 간 이대호는 해가 져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야구에 빠졌다. "집에서 난리가 났죠. 1시면 돌아오는 아이가 8시가 넘도록 집에 오지 않았죠." 할머니는 파출소에 "우리 손자가 실종됐다"며 전화를 걸었다. 형 차호는 온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거포의 탄생은 파출소 실종 신고와 함께 시작됐다.
서지영 기자 [saltdol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