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제대로된 기자 소재 영화가 나왔습니다. 박인제 감독이 연출하고 황정민·진구·김민희·김상호가 출연한 '모비딕'(팔레트픽쳐스)입니다. '모비딕'(Moby Dick)은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이 1851년에 지은 장편소설입니다. 우리말로는 '백경'(흰고래)이죠. 모비딕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한 흰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포경선 선장 에이햅의 복수담을 담고 있는데요.
황정민의 '모비딕'은 소설에서 큰 고래라는 이미지만 따왔을 뿐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사실 이부분에서 박인제 감독이 "의외로 관객들이 '모비딕'을 잘 몰라서 영화를 낯설어 하는 게 매우 걱정"이라고 밝히기도 했으니까요.
시대적 배경은 1994년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초입니다. 의문의 교각 폭발사건이 일어나고 명인일보의 이방우 기자(황정민)와 손진기 기자(김상호)·성효관 기자(김민희)가 사건의 진실을 추적합니다. 정부와 언론에선 간첩테러라며 여론을 몰아가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거죠. 그러니 기자들의 취재가 쉬울 리 없습니다. 나쁜 사람들에게 쫓기는 것도 모자라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제보자(진구)와 딥 스롯(Deep Throat, 비밀 정보원)의 도움을 얻어 진상에 다가갑니다. 기자는 마치 형사처럼, 애국지사처럼 부조리를 파헤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거대한 악의 조직에 맞섭니다.
영화를 취재하는 기자로서 딱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는 실로 간만에 보는 '착한 기자'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동안 기자 소재 영화나 드라마는 좀 그랬습니다. 특종을 위해서라면 남의 아픔쯤은 아랑곳 하지 않는 냉혈한들이 많았죠. 파파라치처럼 자신의 '업무욕'만 채우기에 급급한 '얍삽한' 캐릭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우나 손진기는 다릅니다. 기자가 봐도 참 존경스럽습니다. 요즘도 저런 기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1972년 6월 미국 닉슨 대통령을 사임케한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의 주인공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사건기자였던 두 사람은 이 희대의 스캔들을 추적 보도해 대통령을 낙마시켰습니다. 당연히 퓰리처상도 탔고요.
하지만 이 부분이 동시에 아쉬운 점이기도 합니다. 황정민·김상호 두 기자의 콤비 플레이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소재로 했던 영화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 1976)이 자연스레 연상됩니다. 다큐멘터리적 기법이나 거대한 음모에 대항하는 점에서 닮아있음을 엿볼 수 있는 거죠.
음모론하면 1998년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와도 연결됩니다.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사진에서 찰칵 찰칵하며 계속 구역을 좁혀가서 미국의 한 대도시 거리 속 목표물을 찾아 보여주던 영화 생각나시죠? 강직한 변호사 로버트 딘(윌 스미스)이 국가 안보국의 첨단 감시 시스템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입니다. 10여년 전의 영화인데도 지금의 '모비딕' 속 음모론자들에 비해 훨씬 '디지털'했는데요. 요런 점만 빼면 음모론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발견됩니다.
어쨌거나 '모비딕'은 국내 최초의 음모론 소재 영화임을 표방하는 것처럼 그럴싸한 스토리로 관객을 유혹합니다. 조금은 덜 세련돼 보여도 음모를 획책하는 무리들의 잔인함과 집요함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믿을만한 실력파 배우 황정민과 주연에 못지않은 조연들의 존재가 빛납니다. 특히 황정민은 형사같은 사회부 기자로 적절한 경계를 지켜가며 '착한 기자'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진짜 기자를 하라면 못할 것 같다고 했지만 그 정도라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작품성 ★ ★ ★
흥행성 ★ ★ ☆
(별점은 5점 만점, ★는 1점, ☆는 0.5점)
김인구 기자 [cl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