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았던 한해'. 김광수(52) 전 두산 감독대행의 2011년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이 있을까.
김 대행은 지난 6월13일 두산 수장 직에서 물러난 김경문 감독을 대신해 두산 감독 대행자리에 올랐다. 정규시즌이 한창이던 당시 팀은 하위권으로 추락한 상황이었다. 그는 4개월 동안 76경기에서 36승 38패를 기록하며 두산을 정규시즌 5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두산은 시즌 후 김진욱 당시 투수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김 대행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잠실구장을 떠났다. 그를 지난 주 송파구 모처에서 만났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 앉은 김 대행에게 "근사하다"고 하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찍는 첫 공식 사진이다. 어색하다. 좀 괜찮은가."
29년만의 외출
김 대행은 "두산은 나에게 고향이고, 집과 같은 존재다. 내 가족과 함께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참 많이 웃고, 또 울었다"고 했다. 그는 뼛속부터 두산맨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그는 OB(두산 전신)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다. 2루수였던 그는 현역 시절 도루왕을 수상할 정도로 빠른 발과 야구 센스를 갖췄다. 데뷔 10년째이던 1992년 은퇴한 뒤 두산에서 수비와 수석코치를 역임했다. 데뷔 때부터 지도자 생활까지 두산 이외에 다른 구단에는 발을 들인 적이 없다.
근황이 궁금했다. 김 대행은 "살아오면서 이렇게 여유 있는 가을을 보낸 적이 없다. 지인들과 함께 산을 타고 있다. 땀도 흘리고, 정복했을 때 느끼는 상쾌함도 좋다.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가다듬기에도 산이 최고다"라고 말했다. 저녁에는 가족들과 함께 집 근처 올림픽 공원에 산책도 나선다. 그는 "야구 선수, 코치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다"라고 귀띔했다.
달을 바라본다
김경문 감독이 떠나던 날, 김광수 감독대행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감독님. 함께한 세월, 그래도 슬펐던 날보다 좋았던 날이 더 많았습니다'. 진심이었다.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없는 사이였다. 김 대행은 1993년 수비코치직을 맡았고, 2000년부터 수석코치에 임명됐다. 그는 김경문 감독과 함께 2000년대 명문 구단 두산을 이끈 힘으로 꼽혔다.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 하지만, 사퇴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안한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설마 사퇴하실까' 싶었다. 결정이 단호했고, 빨랐다."
그는 대행 임명을 받는 순간, 가장 먼저 팬이 떠올랐다고 했다. "감독대행직을 맡게 됐다는 말을 듣고 '내가 명문 두산을 떨어뜨리면 안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코치'로서 기술적 측면에 치중하다가, 마침내 팬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집'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김 전 대행은 "나는 수석코치였다. 누군가는 두산 야구를 끌고가야 했다. 팀이 힘든 상황이었지만, 김경문 감독님에게 서운한 마음은 젼혀 없었다. 앞으로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대행은 김경문 감독의 장점으로 '뚝심'을 꼽았다. "8년 간 곁에서 모시면서 '뚝심'하나는 타고난 사람이라고 느꼈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쉽게 돌파하고, 한 번 믿고 결정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밀고 나간다. 지금의 두산을 만든 동력이었다."
김경문 감독은 두산 사령탑으로 재임한 7년 반 동안 2006년을 제외한 여섯 시즌 모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번번이 한국시리즈 문턱에서 고배를 바셨다. 2011년은 두산이 우승을 달성할 수 있는 적기였다. 김 전 대행은 "우승에 대한 압박감이 컸다. 그동안 수많은 경험을 통해 명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우승은 감독님이 앞으로 넘어설 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대행 김광수의 성과
딱 5할 승부였다. 대행으로 임명된 6월 13일부터 프로야구가 끝난 10월 6일까지 그가 거둔 성적말이다. 김 대행은 올 시즌 76경기에서 38승 38패로 5할 승률을 기록했다. SK와 더불어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두산은 시즌 시작 후 '미처 예상하지 못한'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혔다. 김 대행이 바통을 이어받을 당시 두산은 7위까지 곤두박질 쳤던 상황이었다. 더그아웃 분위기 역시 야구를 이어가기 어려운 만큼 가라 앉았다.
김 대행은 '친숙함'으로 부침 많았던 두산 선수단을 추슬렀다. 그에게 모든 두산 선수들은 제자이자, 후배다. 29년을 함께 걸어 온 가족과 같은 존재다. 그는 "선수들의 성향과 능력치를 꿰고 있었다. 함께 소통하기 위해 애썼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노력이 통했을까. 두산은 지난 10월 마지막 5경기를 연승으로 장식했고, 정규시즌을 단독 5위로 끝마쳤다.
감독대행직은 팀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이어받는 경우가 많다. 4할 승률 이상만 거둬도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김성근 전 SK감독은 2001년 5월 LG 감독대행에 올랐다가, 정식계약을 맺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4개월동안 '두산의 야구'를 망가뜨리지 않고, 지켜갔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고 자평했다. 김 대행이 말하는 '두산 야구'가 궁금했다. "허슬두다. 두산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수분 마운드와 기동력, 그리고 화끈한 방망이 까지 3박자를 고루 갖춘 구단이다. 팬들에게 '보는 야구'를 선사했다. 4개월 동안 수많은 2군 유망주를 마운드에 올렸다. 선수들이 부상으로 고전했지만, '허슬두'를 구현하기 위해 애썼다."
야구장 밖, 김광수
1985년 12월 29일 결혼했다. 지인의 누이였던 아내는 26년 동안 착실하게 집안을 가꿨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대부분의 야구선수들은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달고 산다. 김 대행은 "우리 아이들은 여름에 피서 한 번 가보지 못했다. 7~8월은 시즌 중이었다. 꼼꼼한 아빠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잘 커줬다. 아내가 마음 고생 많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취미는 바둑이다. 경기에 지거나,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날에는 혼자 방에 들어가 두 세시간 동안 바둑을 둔다. 경쟁에서 지는 것을 싫어한다. 이겼을 때 짜릿한 쾌감이 상당하다고한다. 이외에도 골프와, 등산도 즐기는 편이다.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주로 잔잔한 발라드. 단풍진 올림픽 공원을 걷는 그에게 노래 한소절을 읖조렸다. "아무도 찾 지 않는 조그만 연못속에 달빛 젖은 금빛물결 바람에 이루나. 말 없이 기다리다 쓸쓸히 돌아서서."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였다.
미래, 다시 야구
'민간인'으로 돌아온 그에게 미래를 물었다. 김 대행은 "그라운드에 있을 때 마음이 제일 편하다. 야구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아직 야구 이외의 것을 생각해 본 적 없다.
두 가지 길을 열어두었다. 해설위원과 지도자다. 김 대행은 1998년부터 2년간 라디오 야구 해설자로 활약했다. 29년 '두산 외길인생'에서 유일하게 잠실 구장을 벗어났던 시기였다. 참 재밌게 잘했다고 한다. 그는 "해설위원은 무거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대중과 야구를 연결하는 끈이기 때문이다. 해설뿐만아니라, 재미와 정보까지 건네야 한다"고 설명했다. 감독대행직을 맡으며 야구를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는 것도 플러스 요인. "지금 해설을 하면 정말 잘 할 수있겠구나 싶다. 선수·코치·감독 자리에서 야구를 바라봤다. 3개를 모두 경험한 이만 할 수 있는 해설을 할 자신이 있다."
지도자의 끈은 이어가고싶다. 그는 해설위원을 하던 시절에도 모교인 선린인터넷고에서 인스트럭터를 겸했다. 김 대행은 "야인생활을하는 지금도 초록색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선수들이 떠오른다. 특색과 장·단점을 파악해 작전을 짜고, 하나의 그림을 완성할 때 행복하다"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감독'의 꿈도 여전히 유효하다. "야구인은 누구나 감독직을 희망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아니라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직 야구로 가득 찬 사람. 인터뷰를 끝마칠 무렵 "그놈의 야구, 지긋지긋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단호했다. "아니. 젼혀. 나는 야구가 좋은가봐,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