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점기계' 안드리 셉첸코(37)와 '엘니뇨(소년)' 페르난도 토레스(29)는 세계 정상급 스트라이커였다. 조건이 붙는다. 푸른 옷을 입고 스탬포드 브릿지에 오기 전까지다. 첼시에 오면서 득점기계는 멈췄고, 엘니뇨(이상 고온현상)는 런던 팬들의 혈압을 높이고 있다.
토레스는 15일(한국시간) 영국 런던에 위치한 스탬포트 브릿지에서 열린 슈테아우어 부쿠레슈티(루마니아)와의 UEFA(유럽축구연맹) 유로파리그 16강 2차전에서 1골을 넣으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1차전에서 0-1로 패했던 첼시는 합계점수 3-2로 8강에 올랐다. 토레스는 공식경기에서 15경기 만에 골을 기록했다. 오랜 만에 득점이 토레스의 자신감을 되살릴지 관심이 모인다. 토레스는 2009년 팀을 떠난 셉첸코처럼 '그저 그런' 공격수로 전락한 뒤 퇴출될 위기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 말부터 영국 언론들은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며' 첼시가 토레스를 팔고 팔카오를 영입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득점기계와 소년
우크라이나 출신의 셉첸코는 첼시에 오기 전 AC밀란(이탈리아)에서 뛰었다. AC밀란 시절 셉첸코는 득점기계란 별명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줬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208경기에 나와 127골을 꽂아 넣었다. 스페인 국가대표인 토레스는 애틀렌티코 마드리드(스페인)와 리버풀(잉글랜드)에서 활약했다. 역시 매서운 골 감각을 자랑했다. AT마드리드에서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 82골(214경기)을 넣었고, 리버풀로 이적해서는 65골(102경기)을 기록했다. 경기당 0.47골을 넣으며 스페인 국가 대표팀에도 자주 부름을 받았다. 첼시를 인수한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차례로 두 골잡이에게 꽂혔다.
구단주의 고집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2006년 여름 첼시로 셉첸코를 약 600억 원을 주고 데려왔다. 당시 첼시를 이끌던 주제 무리뉴 감독(현 레알 마드리드)은 셉첸코 영입을 반기지 않았다. 무리뉴 감독은 디디에 드록바와 셉첸코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셉첸코에 꽂힌 아브라모비치는 무리뉴 감독의 조언을 무시했다. 감독에게도 셉첸코를 쓰라고 압박했고 잘 나가던 첼시가 흔들거렸다. 결국 무리뉴가 팀을 떠났다. 무리뉴의 예상대로 셉첸코는 첼시에 어울리지 않았고, 9골(48경기)만 기록하고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11년 겨울, 아브라모비치는 리버풀의 붉은 옷을 입고 뛰던 금발의 소년 토레스에게 푸른 첼시의 유니폼을 입혔다. 이적료는 약 900억 원이었다. 드록바가 있었지만 아브라모비치는 개의치 않았다. 2012년 드록바는 첼시에 사상 첫 UFEA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선물하고 팀을 떠났다. 그럼에도 토레스는 살아나지 않았고,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그를 살리기 위해 계속 감독을 바꿨다. 지금 팀을 이끌고 있는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은 토레스가 첼시에서 만난 네 번째 감독이다.
부상과 부진...그리고 부활?
두 선수에 대한 구단주의 무한 애정은 다른 선수들에게 위화감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해 한 영국 언론은 첼시 구단 직원의 말을 빌려 '토레스가 구단주의 비호를 받고 있어 선수들 사이에서는 왕따'라고 폭로했다. 셉첸코와 토레스는 이런 부담을 갖고 경기에 임했다. 전 소속팀에서는 침착하게 득점을 만들었던 두 선수는 몸에 힘이 들어가 쉬운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늘었다. 언론은 그때마다 호되게 질타했고, 부담감이 커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여기에 부상이 겹쳤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셉첸코와 토레스가 첼시에서 부진한 것은 비슷한 이유다. 둘 다 전성기 시절 순간 가속도 등 물리적 능력이 좋았다"고 평가하면서 부상이 두 선수를 무너트린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그는 "셉첸코는 첼시에서 부상이 잦았고, 회복이 더디며 AC밀란 시절의 운동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토레스는 2010년 월드컵을 마치고 부상을 당했고 이후 폼을 되찾지 못한 상태에서 첼시에 왔다"고 설명했다.
토레스는 슈테아우아 전에서 오랜 만에 골 맛을 봤다. 올 시즌 그는 28경기에 나와 7골을 넣고 있다. 골을 넣을 때마다 '부활할까'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민망할 정도다. 셉첸코처럼 '실패'할지, 성공할지는 앞으로 남은 2개월에 달렸다.
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 사진=트위터 계정 @grifoisra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