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장종훈의 41 홈런 얘기다. 1992년 작성된 이것은 한국야구에서 전인미답의 경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딱 6년까지만 해야 했다. 1998년 외국인 선수 도입과 함께 등장한 타이론 우즈는 42개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면서 그 해 MVP까지 거머쥐었다. 당시 1998년 10월 2일 중앙일보 스포츠면의 헤드라인 제목은 “우즈 42호포, 한국야구 금자탑“이었다. 이후 17년, 한국야구에서 그들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올해부터 외국인 선수 보유 숫자가 구단 별 3명으로 늘었다. 10구단 체제인 내년부터는 역대 최다인 31명(신생팀 kt는 4명)이 그라운드를 누빈다. 일간스포츠는 2015년의 우즈가, 리오스가 될지도 모르는 그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포문을 연 SK의 메릴 켈리에 이어 이번 손님은 최근 LG와 계약을 맺은 잭 한나한(Jack Hannahan)이다. LG는 23일 "잭 한나한의 100만 달러에 영입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고교야구에 광주일고가 있다면, 미국엔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 위치한 크레틴-더햄 홀 고등학교가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포수인 조 마우어를 비롯해 2004년 명예의 전당에 오른 폴 몰리터를 비롯해 베테랑 야구 심판인 팀 츠치다, 마크 웨그너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1982년 이후 미네소타 주에서 들어올린 우승컵만 11차례이며 1996년부터는 3연패를 달성하기도 했다. 오늘 소개할 잭 한나한 역시 이 학교 출신이다. 한나한이 졸업반이던 시절 세 살 터울의 조 마우어(현재 미네소타 트윈스 포수. 작년 WBC에 미국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가 신입생으로 들어오며 같이 학창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경기에 뛴 적은 없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폴 몰리터조차 신입생 때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니까요” 한나한의 말이다.
한나한은 고교 재학 시절 주전 3루수로 활약하며 0.221의 타율과 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동시에 미식축구팀과 농구팀에서 맹활약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병행할 순 없는 법. 미네소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한나한은 야구로 노선을 굳힌다. 선택은 옳았다. 신입생 시절인 1999년, 한나한은 0.360의 타율에 28득점, 30타점, 4홈런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2년차엔 한층 더 성장했다. 타율은 0.327로 다소 떨어졌지만 홈런은 그 전 해의 두 배인 8홈런, 43타점, 46득점이라는 성적표를 남겼다. 이후 지역 퍼스트 팀에 선발되며 득점과 홈런, 타점 부문에서 자신의 이름을 맨 꼭대기에 올렸다.
2001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그의 이름이 초반에 호명된 건 당연했다. 3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지명되며 프로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2002년 더블A, 2005년 트리플A를 거쳐 마침내 2006년 5월 26일, 고대하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른다. 빅리그의 벽은 높았다. 한나한은 그 해 단 3경기에 출전해 9타수 무안타 1 볼넷, 1 삼진이란 성적으로 데뷔 시즌을 마쳤다.
메이저리그는 한나한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듬해 트리플A에서 전전하던 한나한은 8월 13일 오클랜드 애슬리틱스의 외야수인 제이슨 페리와 시즌 도중 맞트레이드 된다. 오클랜드에서 보낸 3년은 나쁘지 않았다. 236 경기에 출전하며 158안타를 쳐냈고, 13개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겼다. 타율은 한 번도 3할을 넘기진 못했으나 주로 3루수로 출전하며 준수한 수비력을 뽐냈다. 2007년 8월 15일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마크 벌리를 상대로 첫 안타를 뽑아냈고, 5일 후엔 빅리그 홈런 신고식을 치렀다. 처음으로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2008년이 절정이었다. 9년이라는 빅리거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143경기에 출전했으며 95안타를 뽑아냈다. 이른바 한나한의 리즈 시절. 당시 오클랜드의 감독이었던 밥 게렌은 한나한을 회상하며 “가장 영리한 선수였으며 노력가였다”고 말했다. “그에겐 좋은 미래가 있을 거라 생각했죠”
밥 게렌의 말이 실현된 걸까. 한나한의 인생에서 꿈같은 경기가 생겼다. 2008년 8월 18일의 일. 메이저리거로서 고향을 찾은 것이다.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원정경기가 열린 메트로돔에는 한나한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렸다. “꿈이 현실이 됐어요. 트윈스의 구장에서, 그것도 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경기를 하다니요! 흥분되고 짜릿했습니다” 당시 여자친구인 제니 하이넨(2010년에 한나한과 약혼식을 올렸다)을 비롯해 경기장에 모인 200여명의 친지들을 보며 한나한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쓸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2009년, 한나한은 다시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했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투수 저스틴 수자와 트레이드 되어 팀을 떠난다. 오클랜드에서 단 2이닝만을 유격수로 출장한 바 있는 한나한(1루수로는 90이닝, 3루수로는 1832와 2/3이닝)은 시애틀에서 유격수로의 변신을 감행한다. 당시 시애틀의 감독이었던 돈 와카마쓰가 그를 팀 내야의 백업선수로서 활용할 구상안 때문이었다, “스프링캠프나 마이너에서 유격수를 본 적은 있었죠. 포지션 변화가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한나한은 덤덤하게 말했다. “팀에서 날 (유격수로서) 필요하다면, 아마 만족할 수 있을 겁니다(If they need me, they’ll find me).”
한나한의 시애틀 생활 역시 길지 않았다. 2010년 10월 3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은 그는 2011년부터 2년간 추신수와 한솥밥을 먹게 된다. 특히 2012년 추신수가 몸에 맞는 공에서 비롯된 벤치클리어링에 앞장섰던 모습이 국내팬들에게 화제가 된 바 있다. 클리블랜드에서 보낸 2년 동안의 총 성적은 607타수 100안타 2할 4푼대의 타율이다. 2012년은 한나한의 연봉이 처음으로 1백만 달러를 넘겼던 해이기도 한데, 이후 매년 1백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유지하게 된다. 짧았던 클리블랜드의 시절, 2013년 함께 신시네티 레즈로 팀을 옮길 때까지 둘의 우정은 계속된다.
신시내티에서의 야구 인생은 썩 순탄치 않았다. 2013년부터 그를 괴롭혀 왔던 오른쪽 어깨 부상 탓이다. 결국 2013년 10월 12일 ‘관절와순 파열(torn labrum)’ 수술을 받았고 이듬해까지 수술과 재활을 병행하게 된다. 신시네티닷컴에 따르면 한나한은 34살이 된 올해 개막 이후 60경기에 결장했다. 7월 초 마이너리그에서 재활 경기를 가지며 주로 지명타자와 1루수로 출전하며 총 12경기에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이후 같은 달 28일에 열린 워싱턴 내셔널즈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2013년 9월 21일 이후 근 10개월만의 빅리그 재입성.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어떤 포지션에 서든(심지어 벤치로 밀려나든) 안타를 때려내기 위해 노력할 거란 사실입니다. 만일 팀에 내가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 자청해서 라인업에서 빠질 겁니다” 한나한은 조이 보토가 없는 팀( 7월 6일 이후로 무릎통증 탓에 장기 결장)에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어깨 부상 탓일까. 주로 1루수와 지명타자로만 출장하며 단 26경기만 출장해 타율 0.188을 기록했다(LG는 “한나한 어깨, 메디컬 체크 이상없다”고 밝힌바 있다). 한나한의 메이저 인생의 마침표가 찍히는 시점이다.
한나한은 2001년부터 14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614경기, 마이너리그에서는 그보다 많은 861경기를 출전했다. 전형적인 '4A' 타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4A 선수란 트리플A에 속하기엔 실력이 출중하지만, 빅리그에서 뛰기엔 실력이 모자라는 어정쩡한 선수에게 붙이는 약호다. 양상문 감독은 한나한을 “수비 잘하는 3루수로 그만”이라고 말했다. 2015시즌 LG의 핫코너는 안전할까. 한나한은 세간의 우려를 부식시킬 수 있을까. 팬들은 아직 지난 시즌 초반 조쉬벨의 화려한 수비를 기억하고 있다. 올해도 화끈했던 LG 타순은 더 뜨거워질까. LG 내야진의 마지막 퍼즐이 완성될지도 궁금하다. 내년 시즌, 잠실 구장을 찾을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사진=유튜브, MLB.com, 베이스볼 레퍼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