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세상을 떠난 80년대 중반 일본의 인기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에 대한 비화가 공개됐다.
당시 그녀의 소속사 선뮤직의 전무였던 후쿠다 토키오는 ‘주간 아사히’를 통해 “일을 그만둘 정도로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었다”고 말문을 열면서 “3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유키코의 데뷔 시절은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내게 있어서는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오카다 유키코를 회상하는 이야기를 전했다.
1967년생인 오카다 유키코는 중학교 2학년인 14세 때 니혼TV의 ‘스타 탄생’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응모해 나고야 지역 예선에 참가했다. 당시 합격 기준은 심사위원들의 점수로 통과가 정해지는 것이 아닌, 프로덕션이나 레코드 회사의 스카우트들의 ‘좋다’는 의견이 일정 기준에 도달해야 통과하는 시스템이었다. 예선 무대에 있던 후쿠다 토키오는 “오카다 유키코에게 사쿠라다 준코(70년대 일본 유명 아이돌)의 아우라를 느꼈다”고 전했다.
학교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예계에 진출한 오카다 유키코는 선뮤직 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 것으로 전해졌다. 후쿠다 토키오는 “나는 나고야 출신의 유키코를 밀었지만 다른 스태프는 치바 출신의 아이를 데뷔시키고 싶어했다”며 “만약 그 아이가 데뷔했다면 유키코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오카다 유키코는 1984년 4월 우여곡절 끝에 데뷔, 같은 해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같은 소속사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의 뒤를 이을 ‘포스트 세이코’라는 기대와 함께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그러나 오카다 유키코는 데뷔 2년이 지난 1986년 4월 8일 18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날 오카다 유키코는 자살 미수로 한차례 소동을 빚었다. 자택에서 가스를 피워 자살을 기도했으나 이웃 주민의 신고로 발각돼 무위로 돌아간 것이었다.
후쿠다 토키오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날 아침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유키코가 힘든 상황이니 기타아오야마 병원에 데려가달라’고 전화했다. 도착해보니 커튼 안쪽에서 손목에 붕대를 두른 유키코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병원에 데려가자 입원이 필요없다는 의사의 말에 택시를 타고는 유키코에게 ‘고향인 나고야에 갈까, 자택으로 돌아갈까, 사무실에 갈까’를 물었다. 사무실이 좋다고 해 (사무실이 있는)요츠야로 향했다”고 말했다.
이어 후쿠다 토키오는 “나와 여비서가 유키코를 6층에 있는 사장실로 데려갔다. 잠시 후 밖에 있던 아이자와 사장한테서 (향후 대처 의논을 위한) 전화가 와 옆방으로 간 사이 유키코가 없어져 버렸다”고 말했다.
오카다 유키코는 사무실에서 사라진 직후 도쿄 신주쿠 구 요츠야에 있는 소속사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당시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미수가 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많은 언론매체들이 그녀의 행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은 그녀의 참혹한 시신이 모자이크 없이 잡지에 실리거나 텔레비전 화면으로 그대로 전송되는 등 황색 저널리즘의 행태를 여실하게 드러냈다.
후카다 토키오는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이 있은 지 1시간 뒤에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와 기자회견에 임했다. 그는 “회견 때 정말 괴로웠다. 기자의 질문에 솔직하게 전부 대답하기로 아이자와와 상의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진상은 모른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유키코가 멋진 아이였다는 것”이라고 오카다 유키코를 추억했다.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이후 2주 동안 일본은 31명의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등 베르테르 효과로 청소년 자살률이 유례없이 치솟는 홍역을 앓았다. 후카다 토키오는 “유키코가 사무실에 첫 출근했을 때 그녀가 ‘애인 있으신 분은 3분의 1, 사모님이 있으신 분은 4분의 1만큼 유키코에게 사랑을 주세요’라고 했다. 이런 말을 하는 아이는 처음”이라고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오카다 유키코의 ‘사랑을 주세요’라는 말은 그녀의 죽음 2년 뒤인 1988년, 그녀의 모친이 그녀가 남긴 일기와 메모, 사진 등을 엮은 책의 제목으로 발간하면서 다시 한 번 세상에 전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