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 안성봉을 만났다. 짙은 수컷의 향기를 뿜어내는 외모부터 심상치 않았다. 중저음의 굵직한 보이스에서도 남성미가 물씬 느껴졌다. 과거가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 직감은 했지만, 아역배우란다. "량현량하가 인기 있을 때 막연히 TV에 나오고 싶었어요"라며 독특한 아역 생활의 시작을 알렸다.
다시 연예계로 복귀한 그는 영화 '아가씨'·'불한당'·'옥자'·'침묵'·'청년경찰' 등 지난해와 올해 기대작에 연달아 이름을 올렸다. 박찬욱·봉준호 등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감독들은 물론, 미국드라마 '센스8' 시즌2를 통해 워쇼스키 감독을 만났다. 비결을 묻자 "저도 모르겠어요. 스탠딩 배우로 시작했는데 조금씩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라고 겸손해 했다.
-아역생활 땐 어떤 작품에 출연했나. "KBS2 '태양은 가득히' 아역분량에 잠깐 나왔어요. EBS 어린이 프로그램도 몇 개 했지만 크게 활약하지 못했죠. 마지막으로 했던 작품은 영화 '몽정기'예요. 그 때 전 중학생이었고, 역할은 고등학생이었죠. 어떻게 보면 노안의 흑역사라고나 할까. 또래에 비해 굉장히 큰 편이었거든요. '몽정기'는 제 인생의 첫 영화였죠."
-다시 작품을 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맞아요. 20대 중반이 되어 다시 영화 촬영장에 돌아왔어요. 힘들진 않아요. 이제 시작하는 게 맞으니까요. 촬영장에서 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또 아직은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어떻게 다시 발을 들였나. "전공이 영화뮤지컬학부예요. 계속 연기의 꿈을 놓지 않고 있었죠. 프로필도 정말 열심히 돌렸어요. 보낸 메일함이 전부 '안녕하세요 안성봉입니다'로 꽉 차있었죠. 몇 천통 보내니까 몇 군데서 답이 오더라고요. 복귀 첫 작품인 '아가씨'도 그렇게 만났죠."
-'아가씨'에선 어떤 역할을 맡았나. "조진웅·하정우 선배님 스탠딩 배우로 시작했어요. 선배들이 찍기 전 제가 카메라 앞에서 테스트 촬영을 했죠. 그러다 아주 짧게 '1번 낭인' 역할을 맡아서 대사도 했는데 편집됐어요."
-하정우와 조진웅이 무슨 말을 해줬는지. "하정우 선배님은 다른 촬영과 겹쳐 바쁘셨고, 조진웅 선배님과는 술자리를 가졌어요. 조진웅 선배님이 술자리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자. 열심히 하다보면 그런 날 오지 않겠느냐'고 격려해주셨어요."
-연달아 '옥자' 출연이라는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아가씨' 조연출이 '옥자'도 담당하게 되면서 연락을 받았죠. 제가 사실 주인공인 돼지 옥자예요. 돼지 틀을 잡아줄 배우를 찾는다고 해서 제가 섭외됐거든요. 동시에 뮤지컬 '그날들' 오디션도 통과했는데 '옥자'를 택했죠. 고민이 많았어요. 뮤지컬 무대에 오르느냐, 큰 영화 이면에서 이름을 알리느냐."
-결국엔 배역도 따냈다고. "봉준호 감독님이 영화 촬영의 기회를 주셨어요. 배역을 저를 위해 만들어주셨죠. 외국인으로 나와요. 대만계인데 연구실 직원 역할이죠."
-'옥자' 분위기는 어떤가. "봉준호 감독님이 워낙 유명하시니까 제작진이랑 배우들이 줄서서 사인을 받았어요. 저도 당연히 줄을 섰는데 감독님이 '성봉이 넌 안 받아도 되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굉장히 감동했어요. 하지만 사인은 받아냈죠. 컵에다 받았는데 잘 모셔뒀죠. 괜히 물 마셨다가 사인 지워지면 안 되잖아요."
-박찬욱 감독과 워쇼스키 감독 이야기도 궁금하다. "박찬욱 감독님은 굉장히 신사세요. 점잖으시고 배우들이랑 소통하실 때에도 매너있게 본인이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늘 양복을 입고 계시는데 흐트러진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에 비하면 봉준호 감독님은 자유로운 분이세요. 저 분의 뇌가 궁금할 때가 있어요. 혼자 생각하시다 나타나서 천재적인 제안들을 하세요. 영어도 잘하시고 그림도 잘그리시거든요. 직접 콘티도 그리시는데 멋지시죠. 워쇼스키 자매 중 키 큰 분을 뵀어요. 즉흥적으로 연출하셔서 콘티가 없죠. 빨리 빨리 찍는 모습을 봤는데 굉장히 신기했어요. 또 핑크색 헤어에 놀랐죠."
-점점 승승장구하는 느낌이다. "아직 직접적으로 좋은 느낌을 받진 못했어요. 좋은 방향으로 가는 건 맞지만, 아직 제가 성과를 내보인 건 없으니까요. 배우라고 말하기엔 부끄럽죠."
-롤모델이 있나. "이병헌 선배님의 연기를 굉장히 좋아해서 여러 번 보고 따라했어요. 그래서 개인기가 생겼어요. 자꾸보니까 이병헌 선배님 목소리까지 따라하게 됐죠. 주변에서도 비슷하다고 인정했어요."
-가족들은 배우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굉장히 지지해주세요. 배우라는 직업이 일정한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제가 잘 버는 것도 아닌데 응원해주시죠. 꼭 가족들한테 보답하고 싶어요. 제가 4남매 중 막내거든요."
-굉장히 대가족이다. 막내로 사랑 받았을 것 같다. "제가 1989년생인데 바로 위에 형이 1975년생이에요. 나이 차이가 엄청 나죠. 제가 한창 자랄 때 형들은 각자 인생에서 취업과 결혼 등 중요한 시기를 보내느라 바빴죠. 그래서 별로 '우쭈쭈' 하며 크진 못했어요. 또 아버지랑 둘째 형, 그리고 제가 해병대를 나왔어요. 둘째 형은 제가 중학교 때 돌아가셔서 지금은 누나 하나에 형 둘이 있지만. 아무튼 집안이 거의 내무반 수준으로 엄격했어요. 어렸을 때 이미 내무반을 경험한 덕분에 군대에 비교적 잘 적응할 수 있었어요."
-배우로서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액션 연기에 자신이 있어요. 태권도를 오래해서 고교시절 대회도 나갔죠. 수상은 못했어요. 본업이 아니라서요(웃음). 태권도 할 때도 연기를 생각했어요. 느와르 영화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하고 싶은 배역은 없지만 주어진 걸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은 커요."
-앞으로의 계획은. "계속 오디션 도전해야죠. 이메일로 프로필 1000통씩 돌렸던 것처럼 오디션 1000번 볼 거예요. 지금까지 한 100번은 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