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사회 각층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남기는 사자성어를 결정한다. 내게는 어떤 사자성어가 해당되는지 생각하다 문득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일모도원'은 춘추시대 오자서가 한 말로,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이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을 때 ‘일모도원’이라는 말을 쓴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처음으로 사기의 '오자서 열전'을 읽었다. 오자서는 초나라에 6대째 충성을 바친 가문 출신이었다. 초나라 평왕은 태자 건과 혼인시키려던 진나라 공주를 가로채 자신의 왕비로 삼은 뒤, 태자 건을 송나라로 내쫓고 태자의 사부였던 오자서의 부친 오사와 오자서의 형 오상마저 처형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오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온갖 고초와 풍파를 겪으면서 오로지 평왕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오나라 오왕 합려의 부름을 받아 외교 고문의 자리에 오른 오자서는 그토록 바라던 초나라 정복에 성공했다. 그러나 초나라 평왕은 이미 죽고 진나라 공주가 낳은 소왕이 즉위한 상태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꺼내 300번이나 매질했다. 이를 본 초나라 대부 신포서가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그대의 복수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사람의 수가 많으면 하늘을 이길 수 있지만, 하늘이 결정을 내리면 사람을 깨뜨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대는 옛날에는 평왕의 신하로서 몸소 북면하여 그를 섬겼는데 이제 죽은 사람을 욕보였으니 어찌 천도가 없는 것의 극이 아니겠는가”라고 전했다. 그때 오자서가 말했다. “부디 신포서에게 잘 전하라. 해는 지고 길은 멀기 때문에 갈팡질팡 걸어가며 앞뒤를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이다.”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 바로 '일모도원'이다. 중학생 때 처음 이 고사를 읽고 신포서의 말처럼 오자서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복수하고 싶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300번이나 매질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훗날 오자서에 대한 평가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마치 함무라비법전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복수했다고 하나 자신이 모셨던 왕에 대한 복수치고 정도가 지나치다는 의견이 많았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이가 되고 나니 이제야 '오자서 열전'을 이해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몸은 쇠약해지는데 해야 할 일은 많으니, 시간에 쫓겨 반드시 도리에 맞게 일을 처리할 수만은 없다는,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방법이 아닌 그 마음을 말이다.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면 모두 남의 일이요, 정작 내가 원했던 일은 별로 이룬 것이 없다. 이제 나이가 들고 투병 생활로 예전 같지 않은 몸으로 새해를 맞이하니 문득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던 오자서의 심정이 이런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19년은 '일모도원'하는 마음으로 열어 보고자 한다. 해는 저물었고 해야 할 일은 많다. 많은 일을 한 것 같아도 바라던 것은 아직 완수하지 않았으니 투병 중인 내 몸과 나이가 걱정스럽다. 시간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고 인생은 찰나처럼 짧고 허무하다. 그럼에도 내겐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2019년 기해년, 하루하루를 정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