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메이저리그(MLB) 정규시즌을 마무리한 결과가 그렇다. 올해 류현진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스피드는 시속 89.8마일(144.5㎞)이었다. 그의 평균 직구 구속이 90마일(144.8㎞)을 넘지 못한 시즌은 2013년 MLB 진출 후 처음이었다. 2014년 평균 147㎞를 기록했고, 지난해에도 평균 146㎞였다.
포심 패스트볼뿐 아니라 투심 패스트볼, 컷 패스트볼 등 속구 계열의 모든 구종 스피드가 감소했다. 평균적으로 1마일(1.6㎞) 정도 줄었다. 체인지업과 커브의 구속은 별 차이가 없었다. 패스트볼과 변화구의 속도 차이가 줄어든 건 위험 신호다.
이로 인해 공 배합도 많이 바뀌었다. 올해 그가 가장 많이 던진 공은 체인지업(전체 투구 중 27.8%)이었다. 그다음 컷 패스트볼(24.2%), 포심 패스트볼(24.1%) 순이었다. 변화구 구사 능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배합의 기본은 포심 패스트볼이다. 류현진은 매년 포심 패스트볼을 가장 많이 던졌다가, 지난해 처음으로 체인지업 구사 비율(27.5%)이 가장 높았다. 그래도 포심 패스트볼(27.3%)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류현진은 2020년 정규시즌을 5승2패, 평균자책점 2.69로 끝냈다. MLB 전체 평균자책점 1위(2.32, 14승5패)에 올랐던 지난해 못지않은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25일(한국시간) 미국 뉴욕주 버펄로 샬렌 필드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와의 홈 경기가 압권이었다. 류현진은 7이닝 동안 투구수 100개를 기록하며 5피안타 2볼넷 4탈삼진 무실점으로 4-1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승리로 토론토는 4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했다.
이 경기 전까지 류현진의 양키스전 통산 성적이 2패, 평균자책점 8.80이었다. 세 번 이상 등판한 상대 중 평균자책점이 가장 나빴다. 주포들이 꽤 빠진 8일 양키스전에서도 류현진은 5이닝 6피안타(3피홈런) 5실점에 그쳤다.
올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류현진은 작심한 듯 양키스를 공격했다. 최고 147.4㎞(평균 145.4㎞)의 포심 패스트볼과 날카로운 컷 패스트볼이 돋보였다. 현지 중계진은 컷 패스트볼을 슬라이더로 분류할 만큼 변화 폭이 컸다. 올 시즌 피칭 중 가장 압도적이었다.
경기 후 류현진은 "팀에 중요한 날 (내가) 해내서 너무 좋았다. (오늘 승리로 토론토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돼) 기쁨이 배가 됐다"며 "한 팀(양키스)에 계속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나도 부담스럽고, 자신감도 떨어진다. 오늘 승리를 계기로 양키스에 대한 자신감이 충분히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날 승리 후 류현진을 향한 찬사가 쏟아졌다. 로스 앳킨스 토론토 단장은 "구위가 더 나은 투수는 있겠지만, 류현진처럼 경기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선수는 본 적이 없다. 류현진이 없었다면 지금 상황(포스트시즌 진출)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지 토론토 선은 "요령 있게 던질 줄 아는 류현진이 마지막 등판에서 강렬한 투구를 보였다. 토론토는 포스트시즌에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지난겨울 류현진과 4년 총액 8000만 달러(940억원)에 계약했다"고 전했다. 류현진은 올 시즌 12차례 등판에서 7번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다. 류현진을 뺀 나머지 투수들이 기록한 퀄리티스타트는 4차례뿐이었다. LA 다저스 시절과 달리 동료들의 수비·득점 지원이 부족한 가운데, 류현진은 아메리칸리그 평균자책점 4위에 올랐다.
사실 류현진의 컨디션은 썩 좋지 않았다. '잃어버린 1마일'이 그 증거다. 시속 100마일(161㎞)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이 MLB에 수두룩한 시대에 144.5㎞와 146.0㎞ 차이가 커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구속이 1마일 감소했다는 것은 몸 상태와 투구 밸런스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난해 다저스에서 류현진과 한 시즌을 보낸 김용일 LG 수석트레이닝 코치는 "류현진이 93마일(149.7㎞)의 패스트볼을 많이 던진 날에는 실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반면 93마일 공의 비중이 적은 날에는 평균자책점이 확 올라간다"며 "1마일에 따라 패스트볼 위력과 변화구 효과가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류현진의 2020년은 혼란스러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플로리다에서 5개월 동안 격리 생활을 했다. 도로 위에서 캐치볼을 하며 훈련했고, 이 기간 딸이 태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7월 새 홈구장(토론토 로저스 센터)에 입성했으나, 캐나다 정부의 MLB 경기 불허로 인해 다른 팀 홈에서 경기를 치렀다. 8월 12일 이후에야 샬렌 필드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
게다가 류현진의 무대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로 바뀌었다. '경기 전 루틴'을 특히 신경 쓰는 류현진으로서는 최악의 출발이었다. 시즌 초에는 구속이 더 느렸다. 컨트롤, 특히 몸쪽 제구도 되지 않았다.
류현진은 놀라운 회복력과 적응력을 보여줬다. 스피드와 컨트롤이 모두 흔들릴 때도 현란한 구종 변화로 버텼다. 그는 올해 체인지업과 커브 비중을 지난해보다 약간 높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아닐 수 있지만, 경기 별로 보면 류현진의 공배합은 크게 달랐다. 패스트볼이 통하지 않을 때 플랜 B, C, D를 실행한 것이다. 시즌 막판 스피드가 올라오자 류현진은 더 강력해졌다.
지난겨울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의 주인공은 게릿 콜(양키스·9년 3억 2400만 달러)과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워싱턴·7년 2억4500만 달러)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스타 매디슨 범가너(5년 8500만 달러)의 애리조나 이적도 화제였다. 사이영상은 역시 강속구 투수인 제이콥 디그롬(뉴욕 메츠·내셔널리그)과 저스틴 벌랜더(휴스턴·아메리칸리그)의 차지였다.
AP=연합뉴스 오프시즌의 주인공들은 미니 시즌이 시작되자 부상과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디그롬만이 류현진보다 낮은 평균자책점(2.38)을 기록했을 뿐이다. 더 많은 돈과 상을 받는 이들보다 류현진이 부족한 건 스피드뿐이었다. 올해는 1마일을 더 잃었다. 그런데도 류현진은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앳킨스 단장의 표현대로 류현진이 상황과 상대에 따라 경기를 '조정'할 줄 알기 때문이다.
2020년 MLB는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 류현진은 늘 변한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