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신춘호 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 공과 모친 김필순 여사의 5남 5녀 중 셋째 아들이다. 집안의 첫째가 롯데그룹 창업자인 고(故)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다. 신춘호 회장은 한국전쟁 혼란 속에 경찰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58년 부산 동아대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에서 성공한 신격호 회장을 도와 제과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롯데와는 결별하고 농심을 세웠다. 신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던 라면에 주목했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그는 롯데공업을 차려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형제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형인 신격호 회장은 결국 동생에게 ‘롯데’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한다. 결국 1978년 농심(農心ㆍ농부의 마음)으로 사명을 바꿨다. 이후 농심은 신라면과 새우깡 같은 히트작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굴지의 식품회사로 성장한다. 이후 두 형제는 의절했고, 선친의 제사도 따로 지낼 만큼 사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라면 시장으로의 직접 진출을 자제하며 형제간 금도(禁度)는 지켰다.
신회장은 농심의 주력 제품인 라면에 대해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한다"며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브랜드 철학도 확고했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해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에 ‘한국적인 맛’을 강조했다.
그는 탁월한 경영자인 동시에 연구자였다. 스스로를 ‘라면쟁이’·‘스낵쟁이’라 부르며 직원들에게 장인정신을 주문했다. 회사 설립 초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둔건 유명한 일화다. 당시 라면 산업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면 제품 개발은 쉬웠겠지만 농심만의 특징을 담아내기도 어렵고, 또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2년 안성공장을 설립할 당시에도 그의 이런 고집은 여실히 드러난다. 선진국의 관련 제조설비를 들여오되, 한국적인 맛을 구현할 수 있도록 턴키방식의 일괄 도입을 반대했다. 선진 설비지만 서양인에게 맞게 개발됐단 이유에서였다.
그는 브랜드 전문가이기도 했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의 명칭을 만든 것도 그다. 대표작은 역시 신(辛)라면이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출시 당시에는 파격적인 이름이었다. 제품에 대부분 회사명이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발음이 편하고,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신라면은 결국 농심이 라면 업계 1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첨병 역할도 했다. 신라면은 지난해 해외에서만 약 3억9000만 달러(약 4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농심 전체 해외 매출의 40%에 육박한다.
━
경영권 분쟁 없지만, 故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과는 화해 못해
농심은 롯데와 달리 경영권 분쟁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일찌감치 지주사 지분을 차등으로 배분하는 방식으로 후계구도를 정리해 놓은 덕이다. 하지만, 지난해 형인 신격호 회장이 세상을 떠날 당시에도 빈소를 찾지 않은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게 됐다. 다만 신동원 농심 부회장과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이 빈소를 방문해 그를 대신했다.
신춘호 부회장은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부회장), 신동윤(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 부인)의 3남 2녀를 두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30일 오전 5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