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택 매매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전면 리모델링 대신 살던 집을 부분적으로 수리해 거주하려는 수요가 늘고 있다. 실용성에 방점을 찍은 부분 리모델링족이 증가하자, 인테리어의 핵심 중 하나인 도기와 수전 업계 판도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아메리칸 스탠다드' '한스그로헤' '콜러' '엑센트' 등 고가 수입 브랜드를 우선시하던 분위기였지만, 최근에는 A/S가 용이하고 실용적인 국산 브랜드를 찾는 수요도 늘고 있다.
'있어 보이는' 외국 브랜드
서울 성동구에 거주하는 A 씨는 내년 초 욕실과 주방 리모델링을 계획 중이다. 원래 전면 리모델링을 할 생각이었으나, 원자잿값 급등과 금리 인상으로 견적 비용이 크게 증가하면서 포기했다. 대신 A 씨는 약 2000만원을 들여 욕실 2개를 전면 교체하기로 했다.
그런데 A 씨는 도기(욕조·변기·세면대 등)와 수전(수돗물을 나오게 하거나 막는 장치) 브랜드를 결정하기 시작하면서 큰 고민에 빠졌다. 최근 해외 직구 채널이 늘어나면서 예상보다 집에 들일 수 있는 도기와 수전 브랜드가 다양하고 가격과 콘셉트가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A 씨는 "기왕 돈과 품을 들여 고치는 것 호텔처럼 멋지게 고치고 싶어 외국 브랜드 카탈로그와 제품을 집중적으로 봤다"며 "그런데 전시장도 가보고 하니 요즘은 국내 브랜드도 디자인이 좋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편이라서 마음이 흔들린다"고 했다.
국내 도기와 수전 시장은 외국과 국내 브랜드로 양분돼 있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외국 브랜드는 미국의 아메리칸 스탠다드와 콜러, 독일의 한스그로헤, 스위스의 욕실 전문 브랜드 엑센트 등이다. 대부분 최고급 주택 또는 호텔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가격대도 비싼 편이다. 외국 브랜드는 국산 브랜드의 비슷한 사양의 도기나 수전과 비교해 약 5~40%가량 가격 차이가 난다. 수전과 도기에는 보통 제품 표면에 브랜드명이 표기돼 있다. 방문자가 어떤 제품을 사용했는지 금세 알아챌 수 있기 때문에 비싼 외국 브랜드를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고급 호텔과 강남권 신축 아파트 등에서 주로 외국 제품을 쓰다 보니 아메리칸 스탠다드나 한스그로헤 등의 제품은 모두 비싸고 좋은 제품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국내 리모델링 시장은 지난해 17조3000억원에서 2025년 37조원, 2030년 44조원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리모델링 성장세에 따라 욕실 리모델링의 외연도 점차 확대 중이다. 건설산업연구원 등에 따르면 욕실 인테리어 시장은 연간 5조원대 규모로 4년 전 3조원대에 비해 약 66% 성장했다. 향후 3년 내 8조원대까지 커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리모델링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욕실이 휴식 공간이 됐다. 여기에 요즘 젊은 세대는 자기만족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분위기다. 마음에 드는 외국 브랜드의 변기나 세면대, 수전 같은 것들이 국내에 없으면, 해외 직구를 통해서라도 설치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예전만 해도 설치가 복잡한 수전이나 비싼 도기를 설치하지 못하는 업체가 더러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한다. 요즘에는 프리미엄 욕실 제품만 취급하는 인테리어 업체도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산의 약진
외국 브랜드가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최근 국산 브랜드의 약진도 만만치 않다. 특히 국산 도기와 수전 브랜드로 알려진 '대림바스'와 '이누스' 등은 제품 판매를 넘어 욕실 리모델링 시장에 도전하면서 외연을 키우고 있다. 바로 욕실 전체를 하나의 상품으로 보고 한 브랜드가 시공하는 토털 인테리어 서비스다.
대림바스는 지난 2010년 토털 욕실 리모델링 브랜드인 '대림바스플랜'을 론칭한 뒤 욕실 분야의 강자로 떠올랐다. 대림바스는 내년 상반기 중에 중·고가 욕실 리모델링 패키지 상품을 새롭게 선보일 계획이다. 욕실 리모델링에 부담을 느끼는 소비자들에게 선택권을 넓히기 위해서다.
대림바스는 디자인 부분에서도 수준급이라고 자부한다. 실제로 대림바스의 '자동물내림 일체형비데 스마트렛 엣지'와 '스마트렛 핏', '스마트 탑볼 세면기', '앙헬 폴스 수전 시리즈' 등 총 4개 제품이 국내 3대 디자인 어워드에 속하는 '2022 굿디자인(GD) 어워드'와 '2022 핀업 디자인 어워드'에서 동시에 우수 디자인으로 선정됐다. 대림바스는 지금까지 굿디자인 어워드에서 51건, 핀업 디자인 어워드에서 38건의 수상 기록을 달성했다는 설명이다.
이누스는 욕실 시공 안심 솔루션 강화를 통해 욕실 리모델링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올해 말부터는 품질보증 기간(1년)을 2배로 늘려 최대 2년간 유지되는 무상 품질보증 서비스 '욕실 케어 플러스'를 시작해 반응이 좋다는 전언이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한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시장에서도 구체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이누스는 자사몰과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매출(합산)이 올 상반기(1~5월) 대비 하반기(6~10월)에만 174% 증가했다고 밝혔다.
국산 브랜드가 선전 중이기는 하지만, 넘어서야 할 인식의 벽은 아직 높다. 외국 브랜드를 써야 집의 가치와 품격이 더 올라간다는 편견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재건축 '최대어'인 둔촌주공은 분담금 증가가 우려된다는 일부 입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스탠다드를 기본 적용했고, 유상 옵션으로 콜러를 허용했다.
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브랜드 파워를 보고 구매하는 고객층이 많아 시공사들도 어쩔 수 없이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괜히 국산 제품을 쓰고 '싼 걸 했다'는 말이 듣기 싫기 때문"이라며 "아직도 국산 브랜드는 휴게소나 공공 화장실에서 쓰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외국 브랜드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외국 브랜드의 보급형으로 나온 제품은 중국산인 경우가 적지 않다"며 "국산 고급 제품을 견주면 제품력이나 A/S, 디자인 면에서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국산 브랜드가 더 좋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무조건 외국 브랜드만 찾는 건 옳은 소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