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일본차의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이른바 '노재팬'(일본 제품 불매운동)에서 시작된 판매 부진의 터널에서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산차에 기술력을 따라 잡힌 데다 전기차 등 미래차 부재가 부진의 원인으로 꼽힌다. 이에 일부에서는 앞서 한국 시장에서 발을 뺀 닛산의 뒤를 따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수입자 100대 중 일본차는 단 6대
1일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차 브랜드(도요타·렉서스·혼다)는 국내 시장에서 총 1만6991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이는 전년(2만680대) 대비 17.8% 줄어든 수치다.
같은 기간 반도체 수급난에도 불구하고 수입차 전체 판매량은 28만3435대로 2.6% 올랐다. 일본차 브랜드의 부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판매량이 줄면서 지난해 일본차의 시장 점유율도 6.0%로 전년(7.4%)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지난해 판매된 수입차 100대 가운데 단 6대만 일본 브랜드였던 셈이다.
개별 브랜드 실적도 모두 하락세다.
렉서스는 지난해 7592대를 판매했는데, 이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무려 22.1%나 떨어진 수치다. 같은 기간 혼다도 27.9%의 낙폭을 그리며 3140대에 머물렀다. 그나마 도요타는 6259대를 팔아 전년 대비 2.8% 하락하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지난해 수입차 흥행 척도인 연간 1만대 판매 브랜드 중 일본 브랜드는 다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일본차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수입차 시장에서 입지가 탄탄했다. 점유율이 가장 높았던 2008년에는 36%에 달할 정도였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주춤하긴 했지만, 2012년 이후 6년 간 다시금 가파른 상승세를 그렸다.
연간 판매량은 2013년 2만2042대에서 2018년 4만5253대로 2.1배 증가하며 정점을 찍었다. 같은 기간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일본차 점유율은 14.1%에서 17.4%로 3.3%포인트 상승했다.
하지만 일본차는 2019년 7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에 맞서 국내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본격화하면서 타격을 입었다. 2019년 3만6661대로 4만대 밑으로 떨어졌고, 2020년에는 1만8236대로 반토막 나며 한국 시장에서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닛산(닛산·인피니티)은 2020년 말을 기점으로 16년 만에 한국 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2021년에는 큰 폭의 할인을 앞세워 판매량이 다소 회복했으나 지난해 다시 2만대 밑으로 떨어지며 불매운동 직격탄을 맞았던 2020년보다도 판매가 부진했다.
부진 원인은 기술력?
문제는 일본차의 부진이 노재팬의 여파로만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따른 불매운동이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상당히 희석된 지금까지도 일본차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최근 현대차·기아 등 국산차의 약진이 일본차를 부진에 빠트렸다고 보고 있다.
실제 도요타 캠리와 혼다 어코드 등 3000만~5000만원대 시장에선 현대차 그랜저와 기아 K7 등 국산차에 밀리고 있다. 혼다는 2008년 베스트셀링카 어코드를 앞세워 1만2356대를 판매해 수입차 브랜드 판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에 현대차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도 스포츠 세단 G70와 준대형 세단 G80를 앞세워 일본차 잠재 수요를 흡수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하이브리드차 시장은 일본차의 텃밭이었다. 과거 국산 하이브리드 모델은 연비와 품질 등 일본의 하이브리드 모델의 기술력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국산 하이브리드 모델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쏘렌토, 스포티지 등 하이브리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중심으로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베스트셀링 모델인 신형 그랜저 출시로 인해 국산 하이브리드 모델의 경쟁력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또 일본차 업체들의 늦은 전동화 전환으로 부족한 전기차 판매모델이 소비자의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 자동차 시장은 지난해 9월부터 전기차가 하이브리드 모델의 판매량을 앞서왔다. 이처럼 국내 소비자들의 관심이 전기차를 향하고 있지만, 지난해 국내 시장에 판매된 일본차 업체의 전기차는 렉서스의 'UX' 207대가 유일하다.
수입차 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시장으로 꼽히는 전기차 전환이 느린 데다, 국내 완성차 제조 기술도 더 이상 일본차 업체들에 뒤처지지 않는다"며 "이 시장에 새로 유입되고 있는 젊은 층들이 일본차를 선택할 만한 요인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국산차 기술이 매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고 프리미엄 수입차 시장은 독일차가 확실히 선점하고 있어 앞으로 불매운동과 상관없이 일본차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차로 재기 노리는 일본차
일본차 업체들은 올해 신차를 앞세워 재기를 노린다는 방침이다. 올해 국내 출시를 확정하거나 검토 중인 신차만 총 8종이다. 지난해 출시한 신차(3종)와 비교하면 2배 이상 많다.
먼저 도요타는 '라브4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렉서스는 준대형 SUV 'RX PHEV’와 중형 전기차 ‘RZ’를 연내 국내 출시할 계획이다.
또 한국도요타는 다케무라 노부유키 전 사장의 후임으로 콘야마 마나부 신임 대표를 오는 9일 선임했다. 콘야마 신임 대표는 1990년 도요타에 입사 후 '리서치부' '딜러 네트워크 개발' '해외 시장 판매 및 운영 전략 부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2019년부터 한국토요타 부임 전까지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및 오세아니아부'에서 동아시아 지역 담당을 맡아 한국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평가다.
혼다는 연내 신차 5종 출시 및 온라인 판매 플랫폼 도입으로 부진에서 탈출한다는 목표다.
우선 올해 1분기 신형 'CR-V'를 시작으로 상반기 2종, 하반기 3종의 신차를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특별한 신차가 없었던 것과 달리 CR-V, 어코드 등 대표 차종을 앞세워 판매량 확대를 추진한다. 차량 판매가격을 일원화하는 '원프라이스 정책'도 시행한다.
이지홍 혼다코리아 대표는 지난 10일 기자간담회에서 고객 니즈를 반영하고 비즈니스 구조를 혁신하기 위해 55억원을 투자해 온라인 플랫폼 개발을 완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대표는 “고객들이 오프라인 외에 온라인을 통해서도 차량을 구매할 수 있도록 온라인 플랫폼을 조만간 오픈할 것”이라며 “기존 매장마다, 딜러에 따라 판매가격이 달라 불만을 가진 고객이 있었던 점을 감안해 원프라이스 정책도 시행하겠다”고 강조했다.
최근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전기차 개발에도 속도를 낸다.
도요타는 2030년까지 30개의 전기차 모델을 출시할 예정이며, 혼다는 2024년 출시를 목표로 소니그룹과 합작해 프리미엄 전기차를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