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국민 노예'라는 수식어는 헌신과 투지를 상징하지 않는다.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그 의미가 퇴색했다.
사실 노예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정현욱(현 WBC 대표팀 코치)이 그걸 해냈다. 그는 2009년 열린 2회 WBC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마운드에 올라 임무를 완수했다. 대표팀이 치른 9경기 중 5경기에 등판, 총 10과 3분의 1이닝을 소화하며 1승·1홀드·평균자책점 1.74를 기록했다. 특히 일본과의 순위 결정전(3월 9일)에서 한국이 1-0으로 앞선 7회 말, '검객'이라는 별명이 있던 상대 간판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를 공 3개로 잡아낸 장면은 아직도 야구팬에게 회자될 정도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준우승했고, 야구팬은 '주역' 정현욱을 국민 노예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 별명은 훈장과도 같았다.
2021년 열린 도쿄 올림픽에서는 키움 히어로즈 '불펜 에이스'였던 조상우가 빛났다. 그는 한국이 치른 7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해 8이닝을 소화했다. KBO리그 시즌 중이었지만, 그는 열흘 동안 공 146개를 던지는 투혼을 보여줬다. 특히 도미니키공화국과의 동메달 결정전(8월 7일)에서는 2이닝 동안 45구를 기록했다.
한국은 역전패(스코어 6-10)당하며 메달 없이 귀국했다. 조상우는 피로 누적 탓에 올림픽 브레이크에서 리그가 재개한 뒤에도 2주 동안 휴식기를 보내야 했다.
정현욱과 조상우는 대회 성패를 떠나 누구보다 빼어난 투구와 투지를 보여주며 가슴에 단 태극마크를 빛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 WBC에서 등장한 국민 노예는 그 행보와 배경이 조금 다르다.
한국 야구대표팀 마운드는 2023 WBC 1라운드(B조) 1~3차전에서 무려 27실점·29피안타를 기록했다. 5번 출전한 이 대회에서 역대 최다 실점(1라운드 기준)을 경신했다.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보였던 첫 경기 호주전에서 8실점, 일본전에서는 콜드패 위기에 놓이는 등 13점을 내주며 역대급 참사를 겪었다. 8강 진출을 위해 실점을 최대한 줄여야 했던 체코와의 3차전에서도 3점을 내줬다.
매 경기 등판한 투수는 롯데 자이언츠 클로저 김원중이다. 그는 지난 6~7일 오릭스 버팔로스, 한신 타이거즈와의 평가전부터 본 대회 1라운드 1~3차전 모두 등판했다.
매 경기 고전했다. 호주전에서는 한국이 4-2로 앞서 있던 7회 초, 로비 글렌다이닝에게 역전 스리런 홈런을 맞았다. 일본전에서는 3-5로 지고 있던 5회 말, 오타니 쇼헤이에게 초구에 우전 2루타를 맞은 뒤 후속 두 타자에게 진루타와 희생 플라이까지 허용하며 추가 실점했다. 체코전에서도 안타 1개를 내주며 두 타자 만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김원중의 구위와 제구력은 정상이 아니었다. 원래 시속 150㎞ 가까이 나오던 포심 패스트볼(직구)은 14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원중이 3연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다른 투수들의 컨디션이 더 좋지 않았다는 얘기다.
공인구(롤링스) 적응 문제, 이른 실전 투입 등 변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참가국도 같은 조건 속에 대회를 치렀다. 일본전에 나선 몇몇 투수들은 '스트라이크도 못 던진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실력뿐 아니라 대회 준비, 멘털 모두 부족했다. 코칭 스태프의 실책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김원중·정철원·원태인 등 그나마 구위가 좋은 투수들이 마운드에 오른 것. 이들의 등판은 투혼이 아니라 혹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