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후계자들의 다양한 경영수업 방식이 시선을 모으고 있다. 그룹에 입사해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나가는 ‘엘리트 코스’는 기본이고, 햄버거를 조리하는 등 현장 서비스를 몸소 체험하거나 창업을 통해 조직 운영을 미리 경험하는 후계자들도 나오고 있다. 각양각색의 도전과 실패 속에 후계자들의 승진 속도도 예전보다 빨라지고 있는 추세다.
현장실습, 창업, 컨설팅 다양한 경험
최근 대기업의 오너가가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앞치마를 두른 채 햄버거를 조리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의 직원처럼 고객을 응대한 이는 한화그룹의 후계자 중 한 명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전략본부장이었다. 오는 6월 파이브가이즈의 국내 출시를 앞둔 김동선 전략본부장이 직접 햄버거 조리를 체험하는 등 현장실습에 나선 것이다.
한화갤러리아에 따르면 김 본부장은 지난달 홍콩 내 주요 파이브가이즈 매장 두 곳에서 진행된 현장실습에 참여했다. 김 본부장은 실습 기간 일반 직원과 마찬가지로 재료 손질부터 패티를 굽고 토핑을 올리는 조리 과정까지 서비스 전 과정을 체험했다.
김 본부장은 높은 수준의 동일한 맛을 내기 위해 조리법을 여러 차례 반복해 연습했다.
그는 "반복 훈련을 통해 퀄리티 컨트롤을 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며 "국내 매장에서도 장인정신 수준의 성의가 느껴질 수 있도록 품질 유지에 각별히 신경 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이 현장 서비스 업무에 직접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영 수업을 하면서 현장 서비스 체험을 하는 후계자의 모습은 흔치 않아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외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그룹 계열사에 입사하는 ‘안정된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예전과 달리 창업을 먼저 경험해보는 후계자도 생겼다. 최성환 SK네트웍스 사업총괄 사장은 평범한 유학생 시절에 스타트업 회사를 운영하며 남다른 경험을 쌓았다.
SK그룹의 ‘맏형’인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의 장남인 최성환 사장은 카카오택시보다 빠르게 모바일 콜택시 서비스를 운영한 ‘쓰리라인테크놀로지스’라는 회사를 세웠다. 창업을 통해 아이디어의 사업화와 조직 운영 등 경영 일선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먼저 겪은 셈이다.
지난 2014년 미국 뉴욕에 이 회사를 설립했고, 모바일 콜택스 서비스인 ‘백기사’를 출시하며 이목을 끌었다. 당시에는 카카오택시 출시 이전이라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었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스타트업 창업 경험을 바탕으로 최성환 사장은 연세대 글로벌 MBA 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기사는 카카오택시에 밀려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룹의 본격적인 경영 참여 이전에 사업의 생리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간으로 평가받는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은 “과거에는 해외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하는 ‘정석 코스’로 경영에 참여하는 후계자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다양한 경험 등을 쌓는 오너가들이 많아졌다”며 “예전보다 스펙들이 좋아진 데다 창업 등을 통한 실패의 경험들도 분명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우 임원을 달기 전에 ‘e삼성’이라는 인터넷 벤처지주 회사를 창업한 바 있다. 당시 이재용 회장이 5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해 60% 지분을 소유한 최대주주로 설립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창업 이후 닷컴의 e비즈니스 버블이 꺼지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적자를 면치 못한 e삼성은 결국 1년 만에 사업을 정리해야 했다.
실패도 자산, 조직 장악 이전 인성 함양도 관건
‘경영 사관학교’로 불리는 글로벌 컨설팅 회사를 거치는 후계자들도 두루 있다. 정기선 HD현대 사장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정기선 사장은 스탠퍼드 MBA를 마친 뒤 세계 3대 컨설팅회사로 꼽히는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지사에서 2년 정도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서의 실무는 다양한 산업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글로벌 기업의 경영진을 만나서 기업들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풀어갈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문제 해결 능력과 인적 네트워크 향상에도 좋다”며 글로벌 컨설팅 회사가 ‘경영 사관학교’라 불리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자녀 2명도 글로벌 컨설팅 회사를 거쳤다. 장녀 최윤정 씨는 베인앤드컴퍼니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고, 장남 최인근 씨는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인턴십을 수행하며 실무를 경험했다. 최윤정 씨는 현재 SK바이오팜의 전략투자팀장으로 신약개발 등의 임무를 맡고 있다. 최인근 씨는 올해부터 SK의 글로벌 에너지솔루션 북미법인인 패스키에서 근무하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인 신유열 롯데케미칼 상무는 증권사를 경험한 뒤 그룹에 입사했다. 신동빈 회장이 노무라 증권 런던지점을 거쳤다면 신유열 상무는 노무라 증권 싱가포르지사에서 6년간 근무했다.
재계 관계자는 “증권사의 경우 돈의 흐름을 파악하며 실물경제를 직접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더 없이 좋은 경영 공부가 된다. 향후 M&A나 사업 확장 측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룹 밖의 경영수업은 인연의 장이 되기도 한다. 신유열 상무의 경우 노무라 증권 입사 동기로 알려진 일본인 여자와 연애한 뒤 결혼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윤정 팀장도 베인앤드컴퍼니에서 지금의 남편인 윤모 씨를 만나 결혼까지 골인했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사회 경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성 교육’이라고 입을 모은다. 인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영을 잘하더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과거처럼 후계자들이 베일에 가려지지 않는다. 오너가의 사생활과 면면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심심치 않게 공개되곤 한다. 이에 이들의 인성과 면면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대기업 관계자는 “과거 물의를 일으켰던 한화 김동선과 CJ 이선호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려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들이 과거의 잘못을 씻기 위해서는 글로벌 경영 성과 등을 내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고 했다.
임원 승진에 4.5년, 후계자 초고속 승진
오너가의 승진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는 추세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아버지 세대인 1·2세대의 경우 임원 승진까지 5.1년이 소요됐다. 하지만 김동관, 김동선, 이선호 등의 3·4세대 오너가의 경우 임원 승진이 4.5년으로 단축된 것으로 조사됐다. 평균 25년 걸리는 일반인과 비교하면 임원 승진이 20년 이상 빠른 셈이다.
신유열 상무의 경우 2020년 입사했으니 임원 승진까지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후계자 윤곽이 드러난 한화그룹 3형제의 경우도 초고속 승진이 이뤄지고 있다. 1983년생인 장남 김동관은 2020년 말 사장으로 승진했다. 2010년 한화에 입사한 지 10년 만에 사장 타이틀을 달았다. 이어 다시 1년이 채 되지 않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김동선도 1년 5개월 만에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했다. 이런 3·4세대의 사장 승진은 13.6년으로 1·2세대의 14.4년보다 빨라졌다.
오너가의 고속 승진은 조직 장악 측면에서 장점이 될 수 있다. 원활한 경영 승계를 위해서 하루빨리 조직에 스며들어 지휘봉을 잡는 것이 유리하다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임직원의 경우 초고속 승진을 지나친 ‘특권’으로 볼 수 있어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오일선 소장은 “예전 세대 오너가의 경우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서 올라간다는 느낌이 있었다”며 “하지만 요즘 세대 들어 승진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데 조직을 빨리 장악하고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영 성과 없이 승진만 빠르게 한다면 내부 반발에 부딪힐 수 있고, 기업의 새로운 방향성 제시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