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서울월드컵경기장 인터뷰실. 대구FC전 2-2 무승부에 대한 기자회견을 모두 마친 안익수(58) 감독이 취재진에 양해를 구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기자회견장에서 취재진 질문에 대한 답 대신 감독이 직접 나서서 메시지를 전하는 건 종종 있는 일. 현장에 있던 모두의 눈과 귀는 안 감독을 향했다.
안익수 감독은 직접 준비해 온 태블릿 PC를 준비하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는 “준비한 걸 읽으려고 한다. 제목은 그냥 ‘사퇴의 변’이라는 식으로 말씀을 드리겠다”고 했다. 현장에 있던 취재진은 물론이고, 당장 서울 구단 관계자들조차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한마디였다.
안 감독은 고개를 숙인 채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2년 전 한 인터뷰에서 서울 감독 제안을 받고 수락한 이유에 대해 ‘서울은 한국 축구의 분명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구단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11위였는데, 내 명예보다 서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서울이 발전하려면, 지금 시점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여러분들과의 약속이자 제 마음속 다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추구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겠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 추구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게 돼 죄송하게 생각한다. 멀리서 마음으로 수호신(서울 서포터스)이 돼 응원하겠다”고 밝혔다. 구단주를 비롯한 구단 관계자들과 팬들, 그리고 선수단 등을 향한 고마움과 미안함의 뜻도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사퇴 발표 이후 안 감독은 취재진 질문은 따로 받지 않고 기자회견실을 빠져나갔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퇴 표명이었다. “구단과 상의해 거취를 결정하겠다” 정도가 그동안 사령탑들이 사퇴를 내비친 간접적인 표현이었다면, 안 감독처럼 직접적으로 기자회견에서 ‘중도 하차’라는 표현을 통해 사퇴의 뜻을 밝힌 건 이례적이었다. 강등 위기에 몰려 거센 사퇴 압박을 받는 상황이라거나, 경질설이 돌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예상 가능한 범위를 훌쩍 넘어간 기습적인 발표에 현장 분위기는 '당혹' 그 자체였다.
취재진만이 아니었다. 구단도, 선수단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현장에 있던 직원들도 이른바 ‘멘붕’에 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쏟아지는 취재진 질문과 전화 연락 등 상황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심지어 구단 대표이사, 단장 등 고위 관계자들조차 늦은 밤 속보로 전해진 언론 보도를 통해서야 안 감독의 사퇴 선언을 접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 감독의 사퇴 발표에도 구단 차원의 공식 입장을 빠르게 내놓지 못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선수단 역시 다르지 않았다. 코치진조차 기자회견을 끝난 뒤 이 사실을 접했다. 선수들에게도 경기 후 미팅을 통해서야 뒤늦게 전해졌다. 평소보다 더 길어진 미팅 이후 경기장을 빠져나간 서울 선수단의 분위기는 침울하기만 했다. 모든 선수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버스를 향하는 내내 눈물을 쏟던 선수, 애써 울음을 참다 코치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선수도 있었다. 팀 분위기를 고려해 공동취재구역(믹스드존) 인터뷰마저 진행하지 않았다.
안익수 감독은 지난 2021년 9월 서울의 제14대 감독으로 부임해 강등 위기에 몰렸던 팀을 7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지난 시즌엔 파이널 B(하위 스플릿)에 머물렀다. 지난해엔 성난 일부 팬들의 이른바 ‘버스막이’ 사태도 있었다.
그나마 올시즌엔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을 유지했다. 다만 6월 이후 부진이 심해졌다. 최근 12경기에서 2승 6무 4패, 최근 5경기는 모두 무승(3무 2패)에 그쳤다. 특히 후반 막판 실점으로 경기를 놓치는 결과가 반복됐다. 순위만 보면 4위지만, 9위 제주 유나이티드와 격차가 5점에 불과할 정도로 중위권 추락 위기에 몰린 상태였다.
결국 대구전 역시 2-1로 앞서던 리드를 지키지 못하자 서포터스석에선 “안익수 나가”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공교롭게도 팬들의 이 외침에 안 감독이 자진 사퇴로 답한 셈이 됐다. 즉흥적인 발언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원고를 보고 읽었다는 점에서 안 감독은 스스로 물러날 뜻을 계속 품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그 결심이 선 것이다.
아직 계약이 남은 만큼 구단이 만류를 한다거나, 안 감독 스스로 번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상태다. 그런 전례가 많지 않거니와 대구전 경기 종료 직후 서포터스석에서 나온 ‘안익수 나가’라는 외침에 대한 안 감독의 대응에 서울 팬심도 싸늘하게 돌아선 상태이기 때문이다. 당시 안익수 감독은 서포터스 쪽을 향해 오른팔을 크게 들어 올리며 항의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코치들이 그를 말리는 모습이 다수의 영상을 통해 공개됐다. 안 감독의 제스처가 서포터스를 향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팬들은 이미 자신들을 향한 것으로 보고 있다.
FC서울 서포터스 수호신 측도 20일 입장문을 내고 “경기 종료 후 감독님을 향한 외침은 현장팀 주도가 아닌 서울을 사랑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모인 것이었다”며 “평소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응원해 주는 수호신에게 고맙다는 인터뷰에 반해, 어제(19일) 서포터석을 향한 행동은 너무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이에 수호신은 FC서울 팬들을 대표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만약 서로 오해가 있거나 해명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결별하더라도 반드시 풀고 가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안익수 감독이 갑작스럽게 떠난 후폭풍은 이제 오롯이 서울 구단과 선수단이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서울과 안익수 감독의 결별이 확정되면 당장 새 사령탑부터 물색해야 한다. 문제는 당장 오는 27일 선두 울산 현대전, 내달 2일엔 수원 삼성과의 슈퍼매치 등이 연이어 예정돼 있다는 점이다. 정규리그는 이제 6경기밖에 남지 않았고, 이후엔 파이널 A·B 그룹으로 나뉘어 파이널 라운드를 치러야 한다. 최악의 경우 정식 감독도 없이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야 한다. 현재로선 김진규 수석코치가 감독대행 역할을 맡아 당분간 팀을 이끌 가능성이 크다.
선수들 역시 시즌 도중 찾아온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남은 시즌을 치러야 한다. 가뜩이나 좋지 못한 흐름 속 팀 분위기부터 잡아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안 감독의 자진 사퇴 소식에 눈물을 쏟았던 어린 선수들은 심리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최근 실점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도 안 감독이 중용했던 자원들이다 보니 사령탑 사퇴에 대한 자책에 빠질 수도 있다.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안 감독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합류한 선수들의 입장도 난감해진 건 마찬가지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는 가장 빠른 길은 결국 새 사령탑의 선임이다. 다만 현시점에 마땅한 후보군을 추리기가 쉽지 않은 데다, 그중에서도 팀을 잘 이끌 감독을 찾는 건 더더욱 쉽지 않다. 가장 중요한 과정인 만큼 무작정 속도만 강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늦어져서도 곤란하다. 안익수 감독의 사퇴와 동시에 서울 구단이 부담해야 할 중대한 과제다.
팬들은 구단에 신중한 감독 선임을 요구하는 한편, 새 감독이 선임될 때까지 남은 코치진과 선수들이 중심을 잘 잡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수호신 측은 “최근 5년간 우리는 많은 감독님들을 떠나보내고, 수많은 대행 체제를 겪었다. 구단은 이러한 상황들이 재발돼 팬들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감독 선임에 신중을 기해주시기 바란다”며 “김진규 코치님 이하 선수단에게도 요구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늘 그대들의 발걸음에 자존심을 맡기고 있는 팬들의 마지막 자부심에 상처 내는 일은 더 이상 없길 바라며, 평균 관중 1위를 이어가고 있는 수도팀 서울의 자존심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